이 책에서 ‘동물’은 동물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기 동물’과 ‘살아있는 동물’ 간의 차이가 작품 속 동물의 의미를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
책 속 세계에서 살아있는 동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일종의 힘의 상징이다. 반대로 전기로 흉내 낸 동물을 가진 것은 큰 수치이며 숨겨야 할 일이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인식은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실제로 살아있는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고 가치 있지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들은 필요에 의해 죽여 마땅한, 아니 죽인다는 표현도 아까워 ‘퇴역’ 시켜버려야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곳에서는 아예 '전기 인간'인 안드로이드(앤디)를 잡는 '앤디 사냥꾼'도 존재한다.
그러나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유능한 앤디 사냥꾼 '데카드'는 안드로이드들과 사랑에 빠지거나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등 그간 가졌던 신념을 무너뜨리고 만다. 결정적으로 데카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작품의 맨 마지막, ‘전기 두꺼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작품에서는 동물과 인간을 대비시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작품에서는 데카드가 여성형 안드로이드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껴 당혹스러워 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런 발상을 영화화 한 작품이 있다.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속도감 있고 빠르게 읽히는 흥미진진한 책이었으나 결코 그 내용이 던지는 질문들이 가볍지 않았다. 사람의 본질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까지 윤리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인지, 또 로봇과의 사랑이 가능하다면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지….
단순히 미래의 이야기를 예측해서 쓴 공상과학 소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상당히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들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제목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책에서는 데카드가 ‘안드로이드도 꿈을 꿀까?’하고 의문을 갖는 장면이 있다. 내가 생각한 대답은 ‘전기 양이 살아있는 양과 다르지 않게 여겨지는’ 꿈을 꾼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입장에선 전기 양이든 앤디든 윤리적으로 고려되는 대상으로 여겨지길 꿈꿔왔을 것이다.
기계와의 공존이 불가피해지는 세상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1968년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앞으로 '기계'와 '윤리' 혹은 '사랑'이라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단어들이 깊이 숙고되어야 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기계에 대해 생각하며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읽고 ai와 소통할 날이 언젠가 오기를 꿈 꿔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