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은 누군가의 노래가 되어가고 있습니까, [문학]

허연 시인의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읽고 [문학]
글 입력 2020.10.1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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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라는 선물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름이 선사하는 특별한 힘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의 <꽃> 일부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쩌면 숨을 쉬는 순간마다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곤 한다. 이름을 몰랐던 당신과 나는 수신호를 나누고 서로에게 갈피가 되면서 점점 특별한 이름을 갖는 우리가 되어간다. 나와 허연 시인과의 만남도 이름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전작 <오십 미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허연 시인의 이름은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얗다는 말의 방언일까, 우연이든 인연이든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담기진 않았을까 하면서 뒤늦게 살펴보았던 신작의 제목은 어느새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슬픔의 모양, 슬픔의 재질에 대하여



우리는 수많은 인연들과 함께 하면서 그보다도 많은 감정들을 느끼곤 한다. 그 중 슬픔의 감정은 고대에서부터 비극의 양식으로 널리 다루어졌던 만큼 우리의 역사와 같이 하고 있다. 다른 감정들보다 슬픔은 더없이 투명하면서도 잔인할 만큼 아프고 때로는 비릿하게 다가온다. 때로는 산들바람처럼 우리를 스치며 풍부하게 하고. 때로는 유리처럼 산산히 부서져, 세포처럼 잘게 쪼개져 날아온다. 물론, 서로 다른 표정과 목소리를 가진 우리들이 다양하게 분화되는 슬픔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보다 개인적이더라도 보다 선명해져서, 보다 궁금해지는 슬픔들이 있다. 사라지는 일만 남은 무지개를 한없이 기다리듯. 

 

 

가끔 기도는 할게. 그대의 슬픈 내력이 그대의 생을 엄습하지 않기를, 나보다 그대가 덜 불운하기를, 그대 기록 속에 내가 없기를.

 

그러니까 다시는 가슴 덜컹하지 말기.

이별의 종류는 너무나 많으니까. 또 생길 거니까.

 

너무 많은 길을 가리키고 서 있는 표지판과

너무 많은 방향으로 날아오르는 새들과

너무 많은 바다로 가는 배들과

너무 많은 돌멩이들

 

사랑해, 그렇지만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中, pg. 40~41

 

 

허연 시인의 전작에 수록된 작품 <내가 원하는 천사>와 <목련이 죽는 밤>에서 시인은 각각 ‘천사’와 ‘목련’의 시어를 중심으로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엇에 대한 슬픔을 그려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이번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에서는 특별한 소재나 시어를 중점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화각장을 비롯해 소멸과 죽음으로 가득한 공간뿐만 아니라 다리 밑, 카페, 도서관, 구내식당 등 지극히 일반적인 공간 속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읊조리고 있었다. 이미 다분히 일상이 되어버린 자신의 감정을 어루만지고 있다고 느껴졌다. 마치 슬픔의 옷이 익숙한 것처럼 시인은 가지런히 넣어두고 있었다.

 

 

 

평범하게, 노래에 담기고 결국, 퍼지는 슬픔이여



자칫 슬픔과 안타까움, 아쉬움의 회오리에서 허우적댈 수도 있지만 시인은 자신의 자리에서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무척이나 평범하게.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시인의 기다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제목 속 ‘당신’에 주목하고자 한다. 얼핏 보기에 ‘당신’이라는 단어는 다소 일반적이고 평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지시어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시인처럼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당신’은 오히려 정해지지 않아서,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될 최선의 언어였다.

 

그래서 시인은 ‘당신’들의 생과 사가 여전히 교차하고 있는 공간을 아무렇지 않게 찾아가고(<상수동> <24시 해장국> 中) 혼자라도 식사를 하며(<구내식당> 中)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은 기다림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프지만 소중한 아니, 아프고 저렸기에 더 소중해진 경험 속에서 시인은 ‘노래’로써 수많은 당신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노래’라는 것은 단순히 가사의 형태로 남아있다면 다시 말해, 누군가에 의해 불리지 않는다면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불리기를 기다리는 ‘노래’는 미완의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있지만 끝내 ‘노래’로 떠나버린 ‘당신’들을 위해서 시인을 비롯한 우리는 그 ‘노래’를 부를 사람이 되고자 한다. ‘노래’를 통해 우리는 ‘당신’들을 떠올리고 영원히 기억할 수 있으며 마침내, 언제든 목을 놓아 ‘당신’들을 부를 수 있는 용기의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재회의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당신’들이 ‘노래’가 되어가기를 바라며, 그 만남 속에서 언제까지라도 혼자서라도 기다릴 것이다.

 

 

재회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아니었음을.

오래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

지 않기를.

지금 이 진공관 안에서 끝끝내 중심 잡기를.

 

당신. 가지도 말고 오지도 말 것이며

어디에도 속하지 말기를.

그래서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中, pg. 42~43

 

 

허연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은 후에 나의 가슴에는 멍울이 군데군데 생긴 것 같았다. 평안함만을 바라면서 나는 생의 감각만을 쫓지 않았을까? 살아있는 사람, 아픔을 지나온 사람, 이별을 기억하는 사람의 입장에 멀쩡히 있던 적이 있었을까? 나 또한 소중한 사람들을 먼저 보낸 기억이 있었지만 열렬히 마음 속에 담아내지 못했다.

 

반복되는 일상의 숫자만큼 우리의 슬픔도 반복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만이 남았던 마음도 한편 이렇게 특별하지 않은 단어들과 생각들로 특별한 이야기들을 전할 수 있는 글들을 만날 수 있어 외롭지 않았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이 되어가고 있고 ‘노래’가 되어가는 순간이다. 누군가를 위해 아름다움과 슬픔이 함께 진동되어가는 날, 나는 그저 '노래'에 대한 약속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영혼으로부터 떠내려온 것들에 대해

다른 계절에서 온 것들에 대해

질투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푸른색의 행렬에 집중한다

 

입석들이 세워지고

 

이곳에선 모든 미래가 푸른색으로 행진한다

 

<열대> 中, pg. 54

 

 

[남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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