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대학과 미술관, 그 교육의 목적은 어디에 [문화 전반]

언택트 강의에서 느낀 갈증의 뿌리를 미술관 교육에서 찾다
글 입력 2020.09.1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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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강의가 메울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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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집에서 수업을 듣는 것이 익숙해졌다. 온라인 수업을 막 시작했던 지난 3월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6개월 전의 내가 새로운 수업 방식을 향해 가졌던 태도는 오로지 반발심뿐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는 학교 측에서도 처음으로 시도하는 온라인 방식인 연유로 수업의 질이 떨어진 탓, 두 번째로는 녹화 강의의 경우 끝없이 딴짓을 하는 내 모습을 목도해야 했던 탓이었다. 언제든 내 의사대로 멈출 수 있는 녹화 강의 특성상 내 손은 나도 모르게 5분 간격으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집어들곤 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 단계에 접어들었다. 첫 번째, 1학기 수업의 피드백이 이루어져 강의의 질이 꽤 양호해졌다. 지금도 모자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각 수업의 특성에 맞춰 새로운 방식으로 재정비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 또한 2학기도 1학기처럼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점점 집중력을 늘리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수업이 기존의 현장 강의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난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 까닭은 온라인 수업이 대체할 수 없는 현장 강의만의 고유한 특성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정답을 떠올리지 못한 채로 새 학기의 일상에 적응하던 중, 미술관 교육을 다루는 한 과목의 수업을 통해 그 답변을 두루뭉술하게나마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려면 먼저 미술관 교육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미술관 교육의 역사


 

<미술관 교육 – 관람객과 호흡하는 경험과 해석의 미술관>에 정리된 내용에 따르면, 미술관 교육의 방법론은 두 가지 성격의 충돌로 전개되어 왔다. 바로 ‘미적 경험’과 ‘미술사적 지식’ 중 어떤 것을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공식적인 미술관 교육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06년 보스턴 미술관의 도슨트 서비스였고, 이들은 관람객의 감상과 비판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초창기의 미술관 강사들은 미술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를 특별한 미적 경험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술사학과가 프린스턴 대학에 개설되며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미술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미적 경험’과 ‘미술사적 연구’는 서로 대비되는 것으로 구분됐다. 이때 지식과 정보에 그치는 미술사, 그리고 체험을 통한 생생한 미적 감상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교재의 저자는 이러한 시선이 결국 미술관 교육에 불안정한 기반을 제공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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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이러한 관점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실제로 교재가 서술하는 그 이후의 역사는 여러 가지 목적의식들 사이의 끝없는 문제 제기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각 미술관들이 시도했던 방식은 제각기 달랐기 때문에 미술관 교육의 역사적 흐름을 분명히 정립할 수는 없지만 예술의 힘에 관객의 경험을 맡길 것일지, 혹은 역사적 접근으로 예술가의 의도를 알아낼 것인지의 문제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때 '역사적 접근'은 어찌 보면 학교 교육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실제로 1930년대 미국의 주요 미술관의 강사들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을 이끌곤 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진보주의의 영향으로 점차 미술관 교육은 비형식적 학습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는 어린이 대상의 교육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의 교육 프로그램은 아이들의 창의적 자기표현을 활성화하기 위해 아이들의 대화와 주도 하에 진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롭고 비정형적인 교육이 모든 질문의 정답이 될 수는 없었다. 1960-70년대의 미국 미술관 교육은 '미적 감수성'에 초점을 맞춰 전시실에서의 놀이나 춤 등의 자유로운 방식으로 고안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방식이 과연 학습적 성과를 얼마나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대-2000년대에 들어서자 미술관은 관찰자가 대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생산하는 장소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미술관 교육자들에게도 관람객의 말을 듣고, 지지하고, 자극하고, 협상하는 새로운 능력이 요구되었다. (참고자료 - 리카 버넘, 엘리엇 카이키, <미술관 교육 – 관람객과 호흡하는 경험과 해석의 미술관>, 다빈치아트)

 

 

 

미술관 교육의 목적에서 대학 교육의 지향점 찾기


 

결국 미술관들이 관람객들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 확정된 미술사적 사실보다는 특수한 미적 경험이라는 점은 분명하며, 이것은 곧 예술의 주된 가치이기도 하다. 대상의 환경을 몸소 체험하고 그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이야말로 오늘날의 수많은 미술관들이 추구하는 목표 지점이다. 그리고 이때 관람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에서 당연하게도 실물의 작품은 절대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수많은 미술 전시들은 이미 온라인 플랫폼에서 라이브 투어 등의 생중계나 VR 전시, 해설 영상 등의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반면 미술관 교육은 그렇지 않다. 교육 프로그램과 달리 전시에서는 실물의 작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추측해본다. 첫 번째, 단순하게만 생각해 보면 교육 프로그램은 전시의 부대행사이기 때문에 주가 되는 전시를 가장 우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번째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본다면, 교육 프로그램에서 빠져서는 안 될 생생한 소통을 온라인상으로 그대로 옮기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전시의 경우 작품을 향한 일방적 감상이 가장 중요하다면, 교육의 경우 나와 동등한 위치의 사람들과 강사 사이의 소통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다시 글머리로 돌아가 보자. 대학의 온라인 강의가 나에게 이유 모를 부족함을 남겼던 이유 또한 미술관 교육과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술관의 교육이 현장에서의 물리적인 실체와 그로 인한 감각적 반응과 소통을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보는 것처럼, 나에게는 대학 수업이 그렇다. 아무리 화면 너머로 교수님과 학생들의 표정을 본다고 한들, 그것이 실제 강의실에서의 눈맞춤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수업의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컴퓨터 스피커와 화면을 통해 흘러나오는 강의 내용은 교수님의 육성과 강의실의 칠판과 스크린을 온전히 대신할 수 없다. 결국 수업은 나에게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강의실에서의 특정한 '경험'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학교 교육의 방식이 경험 중심의 대면 강의라고 해도, 그 내용과 목적까지도 미술관 교육의 그것과 맞대어 볼 수 있을까?

 

미술관 교육은 오랜 시간 그 정체성과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받았다. 물론 학교 교육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미술관 교육은 당연하게도 일련화되거나 의무화되지 않은 영역이었으므로 훨씬 더 자유로운 시도가 수용되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그 결과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학교 교육은 쉽게 변화하지 못했다. 이는 의무교육을 벗어나 완전히 자율적인 교육공간인 대학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물론 그 사이에서도 학생들 사이의 소통과 의견이 최우선시되는 견학이나 실습으로 진행되는 수업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수의 과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같은 방식, 즉 교수님의 지식 전달로만 이루어졌다.

 

당연히 혹자는 이에 대해 미술관 교육은 예술적 경험을 중시하는 반면 학교 교육은 지식 획득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이 의견에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술 교육에서 미술사를 어떻게 받아들여 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경험과 교육은 서로 분절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미술사는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 온 미술의 역사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그 안에서도 개인의 해석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다. 저명한 미술사학자의 주장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확정된 지식이지만, 그 역시도 한때는 개인의 의견이었을 것이므로 그러하다. 그리고 오늘날의 트렌드는 개인의 의견을 기존의 의견 위에 얹을 수 있도록 미술관이 다양한 해석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교육으로 촉진되는 개인의 경험일 뿐이다.

 

대학 교육의 목적이 오로지 정보의 습득이라면 그 수업 방식이 무엇이 되던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대학의 비전과 우리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그리고 올해 시작된 언택트 강의로 겪게 된, 수단과 지향점 사이의 괴리는 기존의 수업 방식과 그 목적마저도 되돌아보게 한다. 지금의 온라인 강의가 가져다준 비대면 소통은 물론, 기존의 수업 방식에서도 우리는 그저 만족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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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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