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안해"하지 않는 당신에게 - 아버지의 사과 편지 [도서]

글 입력 2020.09.1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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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뮬란 오피니언 기사를 작성했었다. 한 친구가 기사를 잘 읽었다고 후기를 전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신영아 그런데… ‘미투’ 때문에 샹 장군을 뺐다는 제작자의 말에 나도 공감했어. 현실은 애니메이션과 다르거든.” 꼬집어서 한 날카로운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 나 또한 그녀의 생각에 공감하고 있었다.


뉴스나 신문의 사회부 지면을 읽다보면 성폭력이 일어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언론에는 차마 다 담지 못하는 숱한 성폭력 피해도 있었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0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보면 2018년 성폭력 발생 건수가 무려 3만 1,396건이다. 2019년 여성긴급전화(1366)을 이용한 상담 건수는 35만 3,947건으로 가정폭력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성폭력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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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브 엔슬러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상을 바꾼 150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발표한 '100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녀는 현재 극작가 또는 작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극작가로서 엔슬러는 연극에서 권위가 있는 토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여성 인권에 대해 소리를 내는 그녀는, 사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한 성폭력 피해 여성이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에는 자기를 성폭행한 아버지에게 이브 엔슬러가 진심으로 듣고 싶었던 말을 담고 있다.


 

나는 다섯 살 때 너의 몸을 가졌다. 나는 너의 신뢰를 배신했다.

너는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고, 허락할 수도 없었다. 동의란 없었다.

너는 그저 사랑스러운 아이였을 뿐이다. 나는 너에게서 평범한 일상을 빼앗았다.

나는 너에게서 가족에 대한 개념을 파괴해버렸다.

너를 영원한 자기 증오와 죄의식 속에서 살게 했다.

나는 너를 착취하고 학대했다.

진정한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도록,

친밀함에 대해 폐소공포를 느끼도록 만들었지.

내가 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 본문 179~185쪽

 

 

엔슬러가 힘겹게 써내려간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진정한 사과’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 안타깝게 생각한다'와 같은 책임 회피에 급급한 태도가 아닌,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인지’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태도가 ‘진정한 사과’라고 말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를 겪었던 이브 엔슬러는 이제 ‘여성 폭력을 근절하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다. 또 세계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피해 입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당당히 그녀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용기도 북돋았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 한 장 한 장을 넘기기가 힘겨웠다. 이브 엔슬러는 얼마나 괴로운 청소년기를 보냈을까. 얼마나 수많은 밤, 눈물로 베개를 적셨을까. 그러나 오직 그녀만이 가능한 ‘아름다운 용서’라고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다. 또 그녀가 어떤 심경으로 글을 써내려갔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해보고자 했다.


그녀의 잔혹한 고백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착잡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여전히 성폭력에 대한 법은 바뀌고 있지 않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경악에 빠트린 n번방 사건은 여전히 수사가 진행 중이며, 아동 성 착취물 운영자는 1년 6개월 형이라는 어이없는 판결을 받았다. 한국 수도를 관할하던 정치인은 성폭력을 행사했다. 언제쯤 우리는 ‘권선징악’을 보게 될까?


혹여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성폭력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이브 엔슬러가 건네는 이 위로를 읽어보았으면 한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당신을 위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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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으로 살기 위해 선택한
'나를 위한 고백'
 
이브 엔슬러는 아버지에게 다섯 살 때부터 성폭력을 당했고 10대 이후에는 학대, 폭행, 가스라이팅 등 잔혹한 폭력에 시달렸다. 힘든 시간을 버텨온 그는 폭력의 희생자가 아닌 생존자가 되어 극작가로서 여성의 몸에 대해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사회운동가로서 각종 폭력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하지만 엔슬러 역시 시간이 지나도 절대 흐려지지 않는 과거의 상처로 평생을 휘청거렸다. 그는 자신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잔혹한 기억에서 한 발짝 더 벗어나기 위해, 본래 누려야 했던 온전한 삶을 되찾기 위해 두렵지만 있는 힘을 다해 고통의 기억을 꺼내놓는다.
 
엔슬러는 가해자인 아버지가 딸인 자신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는 일을 '상상'함으로써 수십 년 동안 묻어둔 진실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왜 사과 편지일까? 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목소리로 책을 썼을까? 이미 사망한 가해자를 불러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책을 둘러싼 질문들 앞에 엔슬러는 말한다. "그는 결코 내게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상상해야만 한다. 상상 속에서라면 경계를 넘어 꿈을 꿀 수 있고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 현실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 이 편지는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나의 의지와 그에 필요한 말을 아버지에게 부여하고 사과의 언어로 표현하게 해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만들려는 노력이다."(15~17쪽) 엔슬러는 가해자이자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소환하여 그가 자신을 어떻게 유린했는지 낱낱이 밝힌다. 그리고 왜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의 삶 전체를 되짚어보고, 피해를 겪을 당시 자신의 감정이 어땠는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현실과는 다른 결과" 즉, 가해자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명백히 밝히고 인정하며 진심으로 꺼내는 사과를 받는 일은 이브 엔슬러가 선택한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피해자가 가해 사실을 고발하고 고통을 드러내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먼저 읽고 해제를 쓴 은유 작가는 말한다. "나는 글쓰기 수업에서 말하곤 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나 커다란 고통일수록 버전을 달리해서 써보라고. 다른 시점, 다른 입장, 다른 시제, 다른 장르로 같은 경험을 다뤄보면 그 사건의 본질은 선명해지고 고통은 옅어질 수 있다. 이 책은 씻을 수 없는 상처의 기록이라서가 아니라 '기록할 수 없는 상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하다."(206쪽) 은유 작가의 말처럼 엔슬러는 가감 없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며 사건의 본질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이후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세상에 내놓은 이브 엔슬러는 자신의 이름을 '브이V'로 바꾸며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을 선언했다. 역자 후기에서 김은령 <럭셔리> 편집장은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아버지의 잔혹한 기억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나게 되었고 원망도 회한도 분노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물려준 성과 이름으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97쪽)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이브 엔슬러가 진심으로 듣고 싶었던 말을 담아낸다. "나는 다섯 살 때 너의 몸을 가졌다. 나는 너의 신뢰를 배신했다. 너는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고, 허락할 수도 없었다. 동의란 없었다. 너는 그저 사랑스러운 아이였을 뿐이다. 나는 너에게서 평범한 일상을 빼앗았다. 나는 너에게서 가족에 대한 개념을 파괴해버렸다. 너를 영원한 자기 증오와 죄의식 속에서 살게 했다. 나는 너를 착취하고 학대했다. 진정한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도록, 친밀함에 대해 폐소공포를 느끼도록 만들었지. 내가 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179~185쪽)
 
엔슬러가 온 힘을 다해 써내려간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진정한 사과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 안타깝게 생각한다' 같이 책임 회피에 급급한 형식적인 태도가 아닌,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인지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일련의 단계를 거치는 태도가 진정한 사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엔슬러는 2019년 'TED우먼' 강연에서 가해자의 사과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미 세상을 떠난 가해자를 상상하여 쓴 사과 편지를 통해 자신은 무엇을 얻었는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그가 죽기를 바랐고, 감옥에 가길 원했다. 그가 변하길,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과하기를 바랐다. 사과는 기억하는 것이다. 사과는 일어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걸 얘기하는 것이다. 사과는 우리가 대면한 지금의 문제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시간을 이겨낸 성폭력 생존자 이브 엔슬러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폭력을 근절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세계를 누비며 성폭력 희생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왔다. 그리고 그들이 치유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피해자가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고 있다. 그런 그는 《아버지의 사과 편지》라는 절절한 고백을 통해 희망한다. 여성들에게 상처를 입혀온 남성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사과하기를. 상처와 함께 살아가며 여전히 사과를 기다리고 있는 여성들이 진심 어린 사과를 받기를. 이 고통스러운 폭력을 끝내는 세상이 오기를.
 


 

아버지의 사과 편지
- 딸아 미안하다. 그건 강간이었다. -
 

지은이 : 이브 엔슬러
 
옮긴이 : 김은령

출판사 : 심심

분야
외국 에세이 / 여성학

규격
133*193

쪽 수 : 208쪽

발행일
2020년 08월 14일

정가 : 15,000원

ISBN
979-11-5675-835-8 (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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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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