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8월에 만난 책들 -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외 [도서]

3권의 장편 소설과 1권의 에세이, 그리고 1권의 인문서
글 입력 2020.09.0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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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머물렀던 8월이 지나갔습니다. 8월에 읽은 책들 중, 그나마 시간을 견디며 무언가라도 적어낼 수 있었던 몇 권의 책에 대해 짧게 적어봅니다. 9월에는 우리가 더 잘 만났으면 합니다.

 

 

 

존 윌리엄스 - 스토너 (2020, 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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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관통하는 경험의 본질에 대해.

 

스토너. 윌리엄 스토너. 여기에는 무채색처럼 희뿌옇지만 너무도 자명한 삶의 진실이 움트는 과정이 담겨있다. 책을 읽기 전에 관련하여 들은 내용은 부모와의 농사를 위해 지역의 농대에 진학한 한 남자가 문학의 신비를 맞닥뜨리면서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객관적이고 단순한 과정은 책의 도입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문학을 만났다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결국 그가 조금이나마 기대했던 삶의 모습은 대부분 문학이라는 자장 안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경솔하게 선택한 목표에 도달하기에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고, 자신이 버린 세계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부모가 잃어버린 것을 슬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나자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을 통해 알게 되는 직관적인 깨달음 같은 것.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경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이 우리의 기대치를 결정한 것처럼 (…)

 

 

 

박상영 -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2020,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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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바라보며,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시작했던 행위라고 생각했던 글쓰기가, 실은 나 자신을 향해 나 있던 길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거였다.

 

그때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단순히 세상에 없는 어떤 픽션들을 창조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던 어떤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구했던 것 같다.

 


불만 같기도, 푸념 같기도 한 작가의 말들. 뒤로 갈수록 작가의 ‘작가적’ 고민과 현재 그가 지닌 잠정 결론들을 눈여겨보게 됐다.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라는 잘 지켜지지 않는 작가의 바람처럼 이야기는 매일 생겨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의 의지가 온전히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살아간다는 것은 권태가 아니라 오히려 희망에 가까운 것 아닐지 박상영은 말한다.

 

 

 

김병운 -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2020,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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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는 후회와 다짐의 시간들이 있다. 솔직해지기 두렵지만, 나를 제대로 마주하기 두렵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용기 내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에게 허심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배우 공상표를 어딘가 모난 사람,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 내가 나인 게 고통스럽고 그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상황은 배우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는 일이다. 나이기를 위한 고민과 시도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다투고 그 의지를 시험에 들게 하는 상황이 있다. 나조차도 내 편이 아닌 무지향의 시간이 더더욱 고통에 빠져들게 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결국 조금이나마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그리니까 진짜에 가깝게 감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믿음이 소설을 읽으며 마음속에 움튼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세상에 내놓은 자신의 흔적이고, 이제 공상표, 아니 강은성은 아는 사람만 아는 세계에서 우리의 세계에 자신을 내놓는다.

 

 

슬퍼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어떤 슬픔은 그렇더라고요.

 

때로는 마주 보고 있을 때보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뭐든 말하기가 편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박솔뫼 - 인터내셔널의 밤 (2018,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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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은 박솔뫼 작가의 책. 합정 알라딘에서 책을 구경하다 반가운 마음에 (절반은) 충동적으로 은모든 작가의 『안락』과 함께 구매했다.


일본에 사는 친구의 결혼식에 가는 한솔은 어째 도망치는 것 같은 모습처럼 보인다. 몇 번은 가본 길인데도... 어쩌면 나미와의 마주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색하게 말을 트고 사소한 부탁을 나누게 되면서 둘을 이어주는 작은 선 하나가 생긴다.


바뀌어가는 몸과 흘러가는 마음. 돌리기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는 삶의 선택이 우리를 조금 더 알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그 과정을 나는 왠지 극복해야 할 것이라 부르고 싶진 않다. 그건 단지 어딘가로 흘러가는 거라고, 우리의 선택이 키를 잡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린 그냥 흐른다고 한솔은 생각한다. 가끔 하는 자맥질이 존재 증명일 뿐이다.

 

한솔의 수술, 나미가 자신이 머물던 교단에서 도망쳐 나온 게 그것이다. 흐르는 물 역시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 표류하는 흔들림 속에서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도 적당한 온도로 매겨져 있다.

 

 

우리는 어른이 되고 뭔가 빼먹은 얼굴이 돼서 만난다. 그건 못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나는 내가 혼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혼자 서 있을 때가 있지만.


스탠리 카벨은 낡은 사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색한 웃음의 취약성 안에서, 모자의 기울기 안에서, 발이 향하는 방식 안에서, 신발 안에 먼지나 혹은 신발의 희망적인 광택 안에서, 아기의 고개가 놓인 팔꿈치의 안쪽에서 필연적인 죽음에 대한 인식은 함께 살아있다. 심지어 쾌활하게. 이 인식을 위한 더 좋은 장소는 없다."

 

 

 

몸문화연구소 - 권태_지루함의 아나토미 (2013,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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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에 대한 여러 연구자의 시선을 살펴본다.

 

초반의 이성민 「권태와 청춘」과 이종주 「지루함의 철학」은 비교적 난이도가 있는 글이었다. 권태를 단순히 싫증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각 글마다 특정한 뉘앙스를 상정하여 접근한다. 이를테면 「근대의 증상으로서 지루함」의 김종갑은 권태라는 용어를 대신해 ‘지루함’을 사용하고, 황혜진의 「사대부의 권태, 그 문명 비판적 의미」에서 황혜진은 ‘권태’를 사전적·일상적 의미로 규정하고 ‘게으름’, ‘싫증’을 함께 사용했다.

 

여러 흥미로운 얘기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지루함의 철학」은 가장 긴 시간을 들여 읽었으며 동시에 가장 깊고 근본적인 접근이었다. 심지어 미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심심찮게 있음에도 지루함을 철학적 논의선상에서 조명한 내용이 다른 글을 읽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지루함을 일종의 병리 현상으로 바라본 스토아학파나 신에 대한 믿음의 부재가 공허의 원인이라는 파스칼과 키르케고르... 이후부터는 좀 더 다양하고 복합적인 ‘지루함’에 대한 논의가 나온다.

 

여전히 잘 정리되지는 않지만 조금 시도해보자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자연학적으로 지루함에 접근한다. 데카르트는 주지주의적 관점, 스피노자는 주의주의적 관점으로 정서를 바라본다. (스피노자는 지루함을 특정하여 해설하지는 않았다.)

 

경이를 일종의 상상으로 본 스피노자는 지루함이 상상 의지를 결핍적이고 편집광적으로 만든다고 했다.

 

하이데거는 주정주의적 관점으로 권태를 결국 ‘일깨워지는 것’, 실존론적 존재의 과정이라 여긴다. 세가지 지루함의 양상에서 ‘참다운 앎’에 대한 정초로 나아간다.

 

 

이런 깊은 지루함을 거스르지 않고, 그것의 기분잡음에 자신이 두루 조율되도록 내맡김으로써, 그 깊은 지루함으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귀담아듣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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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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