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찰칵'을 보고 [엄마 ver.]

“봉구씨, 우리 함께 살아가 봐요”
글 입력 2020.08.2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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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저와 엄마 둘이 함께 관람하고,

각자 리뷰를 작성해 [엄마 ver.]과 [딸 ver.]으로 나뉩니다.

딸의 리뷰가 궁금하신 분들은 해당 링크를 클릭하신 후

감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극 <찰칵>을 보고 [엄마 ver.]

“봉구씨, 우리 함께 살아가 봐요”

 


찰칵포스터_대표.jpg


 

여성 2인극, 엄마와 딸, 게다가 입양인과 생모. 제목은 또 어떤가. ‘찰칵’이라니. 아주 촌스럽거나 뻔하지 않다면 다행이겠다. 그러나 티켓을 받고 한 장짜리 브로슈어를 보니 창작극이며 더욱이 작가의 ‘떠돎’ 시리즈 3부작 완결편이란다. 살짝 기대가 생기는데 극장 안으로 들어서 무대를 바라보는 순간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비가 퍼붓는 마로니에 공원을 걸었다. 코로나 위기가 고조된 시기라 대학로는 더욱 한산했다. 몇 명이나 왔을까... 괜한 걱정도 했지만 스무 명 남짓 관객들을 보니 동지감마저 생기는 듯했다. 관객 중엔 버스를 같이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많은 사람이 예술과 문화에 목말라 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나라를 걱정한다는 사람들,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더 갈망한다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 바이러스가 침투한 도시 한쪽에서 묵묵히 연극을 올리고 그걸 보는 관객들이 있다. 무엇이 어느 쪽이 더 시급하고 필요한 것인지. 답을 아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무대는 의자 2개와 직사각형의 긴 스크린이 전부였다. 두 배우의 연기가 전부라는 자신만만함으로 느껴졌다. 스텝이 나와 공연 주의사항을 이야기하고 드디어 극이 시작되나보다 잔뜩 기대하는데 무대 뒤 중앙으로 커다란 스크린이 내려오더니 CJ 홍보영상을 틀어준다. 대충 젊은 창작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내용인데 극장 이름과 극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벽에 붙어 있는 자료들로는 충분치 않은지. 순간 김이 샜다. 연극인데. 객석의 불이 꺼졌는데. 배우의 관람 에티켓 영상도 이미 스텝이 한 얘기의 재탕이다. 기업 홍보만 하자니 쑥스러웠나.

 

스크린이 올라가고 드디어 배우의 출현. 일회용 카메라를 관객에 들이민다. 배우는 우리를 보고 우리는 배우를 본다. 이미 할 말은 많고, 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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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봉구'역의 이진경 배우.

 

 

연극은 매우 좋았다. 어머니와 딸로 설정되어 있었지만 천륜이나 모성애를 강조하는 문법은 아니었다. 입양인의 얘기라지만 ‘입양’은 소재에 불과하다. 오히려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공유하지 못한 기억과 추억을 되돌려준다고 할까. 그래서 각자의 삶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남은 삶 역시 계속되리라는 전망을 가져볼 수도 있었다.

 

일회용 카메라와 관광객 코스프레는 일차적으로는 이방인 봉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모든 인간존재에 해당되는 것이다. 일회용 아닌 사람이 누가 있으며, 이 삶이 관광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무엇 하나 바꿀 수도 없는 말심과 봉구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봉구가 마침내 탱탱볼을 던져버린다는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을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계획하고 실행하고 결과를 얻는 삶도 있지만 호수의 요괴로부터 온 생명일지라도 ‘모든 생명은 새’라는 걸 뜨겁게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면 이제부터 인생은 살만하지 않겠는가. 말심이 찍은 봉구의 사진은 그러므로 가장 빛나는 순간일 뿐만 아니라 그 예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봉구씨, 잘 살아줘요. 잘 살아남아 줘요.


두 배우의 연기도 매우 좋았다. 독일인으로 자란 봉구의 어색하지만 능란한 한국어 연기는 그 자체가 극의 한 축이었다. 언어가 같다는 것, 소통 가능한 언어라는 것의 중요성 말이다. 말심의 어색한 듯 고집스러운 성격과 봉구의 직설적인 태도 대비도 세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데 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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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작은 키에 촌스러운 외모, 딸은 큰 키에 긴 곱슬머리가 세련된 대비. 그러나 둘의 옷차림은 흰색 톤이다. 굳이 왜 옷 색깔을 맞췄을까. 그것도 흰색으로. 순수 또는 정화의 의미일까. 이 작품이 작가의 ‘떠돎’ 3부작의 완결편이라고 한다. 전작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연극이 끝나고 나오니 비가 그쳤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어떤 어미가 자식을 낳으며 ‘새’가 되길 바라지 않겠는가. 어미라면 자식이 당연히 새가 되어 훨훨 날길 바랄 것이다. 둥지에 가둔 채 날개를 잘라버릴 어미가 어디 있겠는가. 또 생각했다. 모든 어미는 자식이 ‘환한 빛’ 속에서 살길 바랄 것이다.

 

그 어떤 어미가 자식을 어둠 속에 가두려 하겠는가. 그럼에도 많은 존재가 한 번뿐인 삶을 어둠 속에서 날개 잃은 채 살다 간다. 화가 난다. 부끄럽다. 속상하다. 모든 좋은 예술이 그렇듯 이 연극 역시 나에게 질문을 남긴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 아직 ‘찰’과 ‘칵’ 사이에서.


 



[한승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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