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삼색의 품격, 구찌의 일생 [패션]

피렌체부터 전 세계로
글 입력 2020.07.29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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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패션 브랜드가 존재한다. 스파 브랜드부터 명품까지 그 규모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 오늘은 명품 브랜드에 대해 다뤄볼 예정이다.

 

"명품" 뜻을 해석하면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라는 뜻과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하고 가격이 아주 비싼 상표의 이름'이라는 의미가 있다. 두 개의 의미를 나름 붙여보자면, 유명하고 가격이 비싼 상표 이름의 물건은 뛰어나거나 이름이 나있다는 말과 같다. 그만큼 유명한 것에 대해 그 품질이 비례한다는 뜻이다.

 

비싼 가격에 의한 희소성과 브랜드 네임에 대한 동경심이 누구나 그 명품을 손에 넣고 싶어 하게 만든다. 요즘이 이 심리들이 커져 명품을 구매할만한 경제력을 가지지 않았어도 저축을 하든, 빚을 내든 구매하고야 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특히나 요즘 2030세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보이는 그 명품, 구찌에 대해 오늘 이야기하고자 한다.

 

 

gucci logo.png

 

 

 

구찌의 시초, 구찌오 구찌의 손에서 태어나다.


 

구찌의 이름이 창립자 구찌오 구찌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구찌의 로고 GG도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창립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는 런던 최고급 호텔에서 일하면서 고객인 상류층 사람들의 가방에 관심을 가졌으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호텔을 그만두고 피렌체로 다시 돌아와 가죽 관련 공방 기술을 키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말의 안장 같은 가죽 용품과 가방을 만드는 가게를 차렸다. 이것이 구찌의 시작이다. 그의 장인 정신이 빛을 발했는지 귀족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더욱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에 사업을 확장해 이탈리아 쇼핑의 중심지인 로마 콘도티 거리에 매장을 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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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제나 위기는 덮쳐오는 법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가 패전국이 되었고 가죽 관련 물자가 구하기 힘들어져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구찌오 구찌의 아들인 알도 구찌는 일본 수입의 대나무와 돼지가죽에 관심을 가졌고 이를 가공해 대나무 백을 만들었다. 이것이 귀족들 사이에서 큰 열풍을 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구찌백에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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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구찌가 여전히 출시하고 있는 홀스빗 아이콘, 사각형 패턴, 더 웹이라는 녹색, 적색, 녹색 삼선 마크는 모두 구찌의 설립 초기에 구찌오 구찌가 이룬 업적들이다. 대단한 감각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구찌오 구찌는 당연하게 엄청난 명성을 얻게되었고 이에 비례해 사업 또한 밀라노부터 뉴욕까지 확장하였다. 이런 사업에 그의 아들들 알도 구찌, 바스코, 우고 그리고 전직 영화배우였던 우인 로돌포 또한 합류하여 가족 사업을 이루고 그들이 구찌를 물려받았다.

 


 

구찌오 구찌 이후, 구찌의 행방은?


 

(1) 가족의 분열

 

가족 사업이 된 구찌는 구찌오 구찌가 사망 이후 누가 소유하냐 즉, 경영권에 대한 아들끼리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결국 장손이었던 마우리치오 구찌가 그 승계를 이어받아 구찌를 키우는 데 힘썼는데 문제는 그의 동생 파울로 구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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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에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이후에 가족 간에 어떤 분쟁이 있었는지 그가 자신의 가족이 경영하는 심지어 자신이 수석 디자이너로 있던 브랜드의 이름을 따서 브랜드 '파울로 구찌'를 설립해 버린다. 당연히 이 브랜드는 질은 구찌와 비슷할지 몰라도 그 가격에서는 명품을 따라잡지 못했다.

 

심지어 구찌의 이름을 따 사람들이 브랜드에 대해 헷갈리기 시작했고 이에 명품 브랜드 구찌의 명성을 추락시켰다. 이에 파울로의 아버지는 그를 말렸지만 파울로는 자신을 말리는 아버지를 탈세 혐의로 신고해서 감옥에 보내버린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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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를 더 키우기 위해서 자신의 동생도 가문에서 사정없이 내쳐버린 마우리치오 구찌. 그의 일생 마지막 순간에도 잡음은 끊기지 않았다. 그의 부인이었던 파트리차와 그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좋지 않던 부부 사이가 이혼의 불씨가 되었고 불은 갈라섰는데 이로부터 10년 후 마우리치오 구찌는 총에 맞아 암살당하게 된다.

 

이미 그 시대에 구찌는 명품 브랜드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세계 각국에 매장을 놓고 있는 글로벌 기업인데 그 구찌의 수장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에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범인에 대한 관심도 쏟아졌는데 한동안 밝혀지지 않았다가 범인이 체포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전 부인이었던 파트리차였다.

 

이외에도 소개하지 않은 구찌 가문의 분열은 구찌를 더 몰락시키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면서 큰 이슈로 노이즈 마케팅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족 간 일어났던 불화는 크나큰 불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가족 사업의 끝, 구찌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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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치오 구찌가 경영하던 시절, 자신의 자손에게 기업을 물려줄 수는 없었는지 1994년 자신의 지분을 투자회사 인베스트콥에 매각하였다. 이 매각과 암살ㄹ 사건이 겹치면서 구찌는 엄청나게 휘청였다. 실제로 파산까지 가며 모두 구찌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각한 것이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 매각 후 CEO에 드 솔레가 앉게 되었고 드 솔레는 당시 무명 디자이너던 톰 포드를 수석 디자이너를 앉히는 파격적 행보를 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휘청이던 구찌를 살릴 유명 디자이너가 필요한 거 아니냐며 그를 의심했지만 그의 탁월한 안목은 구찌를 살아나게 하였다.

 

수석 디자이너가 된 톰 포트는 "하이힐은 더 높아질 수 없을 만큼 높게 짧은 치마는 더 짧아질 수 없을 만큼 짧게"라며 1995년 쇼에서 대담한 의상을 구찌라는 이름 아래에서 선보였다. 이것이 큰 히트를 치며 단숨에 구찌를 원상복귀 시켰다.

 

 

 

지금의 구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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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는 당연히 여느 브랜드처럼 휘청이고 상승하기를 반복하는 브랜드이다. 하지만 그 폭이 상당히 적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할 만한 사실이다. 사실 구찌가 회생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케어링 소속이 되고 알렉산더 미켈레를 수석 디자이너로 고용하면서 계속해서 최고의 명품 브랜드 명줄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 시도하는 구찌의 패션들은 매번 새롭고 파격적이라고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사실은 앞서 소개한 구찌오 구찌부터 시작한 구찌의 역사 속 아카이브에서 모티브를 따와 현대에 맞게 디자인하는 것뿐이다. 클래식을 이용한 뉴 패션을 선보이는 셈이다. 구찌 본연의 색과 디자인 그리고 그의 정신을 현대까지 이어받아 단연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구찌는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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