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통 위 고통 쌓기, 반복 - 레몬청 만드는 법, 핑거라임 [도서]

글 입력 2020.07.1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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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표지만 두 개다. 그중 한 면에 바코드가 있을 뿐. 책 한 권을 읽고 뒤집으면 또 새로운 책 한 권이 등장한다.

 

각 표지에는 음각으로 된 레몬과 핑거라임의 실루엣이 눈에 띈다. 코팅이 되지 않은 종이 소재로 된 표지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다가 얕게 들어간 그 실루엣을 따라 손끝을 움직이면 이상스레 마음이 편해진다. 그렇게 한참 동안 책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쓸어보고 냄새도 맡아 보았다.

 

레몬과 라임의 과육이 혀에 닿은 듯 톡 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밝은 표지를 뒤로하고 책장을 넘겼다. 여느 책과 달리 무게감이 있는 종이었다. 책을 읽다가 그 종이와 종이 한 장의 무게만큼이나 짧지만 밀도 높은 이야기가 서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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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청 만드는 법


 

처음 레몬청을 담갔을 때가 기억났다. 중학교 때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겠다며 작은 병을 여러 개 사서 레몬청을 담갔었다. 뽀드득 소리가 날 만큼 깨끗하게 씻은 레몬을 일정한 두께로 썰어 설탕과 번갈아 한 층씩 쌓아 올렸다. 내게 레몬청은 딱 그 정도였다. 때를 기다렸다가 상큼하고 달달한 맛을 보기 위한, 혹은 누군가에게 그 맛을 선물하기 위한.

 

하지만 이 짧은 이야기의 레몬청은 내 기억 속의 레몬청과는 조금 달랐다. 아주 많이 시큼했다. 너무 시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겨우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온몸을 떨었다.

 

여자가 레몬차 열 세잔을 마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자가 마신 레몬차는 달았을까 아니면 가장 맛있는 시기를 지나쳐 조금 다른 맛이었을까. 혀에 가장 먼저 느껴지는 단맛 다음 톡 쏘는 시큼함에 눈물을 찔끔 흘렸을까. 아님 그저 소리 없이 엉엉 울었을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먹밥과 콜라 따위가 진열된 좁고 기다란 카운터가 먼저 보였고, 초등학교 교실처럼 오밀조밀 놓인 식탁과 의자 뒤로 주방 입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벽은 아주 연한 연두색이었는데, 페인트가 긁힌 자국이나 거무스름한 얼룩 때문에 아픈 사람의 누렇게 뜬 얼굴 같았다. 화장실 문에는 '손을 깨끗이 씻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화장실 안은 주인아저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청소해서 늘 깨끗했다. 하얀 벽에는 에펠탑을 그린 수채화가 걸려 있었고 플라스틱 통에 담긴 물비누에서 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조곤조곤 읊어 내려가는 '나'의 이야기 속에서 주어는 대부분 그 주변과 타인이다. 거리를 두고 바라본 주변을 부드럽고 세밀하게 묘사한 것들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게 된다. 아니, 그림보다 더 현실적이고 묵직한 사진이나 영상 같은 것.

 

천천히 아주 느리게 읽었다. 그리고 여러 번 읽었다. 내가 문자로 된 이 모든 것을 다 그릴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정말 '나'가 될 때까지. 결국 작가들의 대화를 읽은 후에 이 소설의 배경인 '쟈스민'이라는 식당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검색까지 해본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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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라임


 

책을 뒤집었다. 레몬청과 다르게 핑거라임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상상은 즐겁다. 먼저 읽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그 형태를 그리고 맛을 음미했다. 레몬보다 더 강한 자극이었다. '레몬청 만드는 법'의 '나'는 순식간에 어느 환자가 되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일상적인 그런 소리들, 무시하면 그만일지 모르죠. 하지만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다른 사람들은 정말 안 거슬리는 건지. 의미 없는 소리들. 카페에서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면 모두의 목소리가 커지죠. 타인에게 질 수 없다는 안간힘. 주목받으려는 비굴함. 어떻게 들릴지 계산하고 연출한 대화. 모르는 사람까지도 다 들으라고 내지르는 말들.

 

 

얼마 전 나의 예민함에 대해 쓴 글이 생각났다. 그중에서도 청각에 대한 부분. 세상의 모든 소리는 내게 크고 작은 자극이었다. 좋은 자극보다는 정신적 피곤함을 유발하는 쪽에 훨씬 가까운 것. 보이지 않는 공격 같은 것이다. 그냥 환자의 대사 전부가 공감됐다고 하는 것이 쉽겠다. 나는 원할 때, 원하는 것만 듣고 싶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선택한 더 큰 소리를 듣기로 했다. 집에서는 가능하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게 한다. 보지도 않는 영상, 듣지도 않는 음악을 틀어놓는 일은 거의 없다. 집을 나설 때는 이어폰을 꼭 챙겨 나간다. 볼륨은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키운다. 그럼에도 그 소리를 이기고 들려오는 것들이 있는데 그땐 가능하면 그 자리를 빠르게 피해버린다.

 

외부 소음 차단용으로 듣는 노래들은 사실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들으면 귀가 아파지고 머리가 울리는 그런 노래들이다. 그럼에도 그런 노래를 듣기를 선택하는 건 자잘하게 들려오는 셀 수 없는 소음과 다르게 적어도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일 소리의 묵직함은 자잘하고 가벼워서 이리저리 휘날리는 소음들을 막아낸다.

 

환자에게 핑거라임은 나에게 이어폰 그 이상의 것이었나보다. 말하는 법을 잊을 정도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해 주는 귀마개와 바꿀 정도이니 말이다.


 

하긴 까놓고 보면 세상에 임시방편 아닌 것이 없고 악순환 아닌 일도 없다. 직접적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서 대증 요법으로 일관하는 질병이 얼마나 많은지는 의사들만 안다. 상담만 해도 근본 원인을 뿌리 뽑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상담 자체가 장기적으로 얼마나 근본적인 효과가 있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인간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 삶의 방식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고 해도 그걸 바꾸는 게 반드시 옳은 길일까?

 

 

그가 다시 말할 수 있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앞선 소설의 레몬청처럼 고통 위에 옅은 단맛 다시 그 위에 고통 쌓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어제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잊히면 그걸로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한 잔 더, 하나 더


 

신선하고 가벼워 보이는 책 표지와 달리 글은 무거웠다. 견디기 힘든 무거움이 아닌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혀주는 안정적인 무게였다. 책을 읽다 보면 일러스트 또한 눈에 띈다. 리드펜으로 그린 불안하게 비뚤어진 선은 모여서 형태를 만들고, 그 은유적인 일러스트는 글을 한층 더 생생하게 만든다.

 

이 책에는 영어 버전의 소설도 함께 담겨 있는데, 이는 한글 버전과 느낌이 조금 다르다. 묘사의 방식이나 정도가 다르니 비슷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신선하고 좋았다.

 

책의 촉감, 디자인, 일러스트, 글까지 전부 매력적인 책이었다. 책을 덮은 후에도 문득 생각이 나는 그런 책이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또 기회가 된다면 김록인 작가의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다.

 

 

"줄곧 레몬이나 라임을 소재로 무언가를 쓰고 싶었습니다. 너무 시어서 괴로운데 동시에 맛있기도 하고, 그런 오묘함이 인생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속이 텅 비어버린 하루에 하나둘 질문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시작이 레몬청과 핑거라임이라는 건 꽤 낯선 상황이다. '레몬청 만드는 법'의 여자처럼, '핑거라임'의 환자처럼 한 잔 더 마시고 싶고 하나 더 맛보고 싶은 책이 생겼다.

 

너무 많이 맛보면 무뎌질지도 모른다. 그럼 더 강한 자극을, 고통을 찾을 것이다. 그래도 그 고통이 마냥 아프지만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깊이 음미하면 미묘한 단맛도 있지 않겠는가.

 

 

*

레몬청 만드는 법, 핑거라임
- 나는 레몬 조각에 이를 깊이 박았다 -


지은이
김록인 글, 노경무 그림

출판사 : 바다는기다란섬

분야
한국소설

규격
118*177mm, 양장본

쪽 수 : 112쪽

발행일
2020년 06월 30일

정가 : 11,000원

ISBN
979-11-961389-2-9 (0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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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글쓴이_ 김록인
 
레몬-라임을 좋아해서 해마다 제주 레몬이 나는 겨울, 제주 라임이 나는 초가을을 기다린다. 소설을 많이 읽고 조금씩 쓴다. 꼭 필요한 말만 남기고 군더더기를 없애기 시작하자 글이 점점 짧아졌다. <레몬청 만드는 법 / 핑거라임> 이후 동물 실험에 관한 짧은 소설을 작은 책으로 낼 예정이다.
 
 
그린이_ 노경무
 
자신을 돌보기 위한 방법으로 그림을 선택했다. 그림책 <불에서 나온 사람>과 만화 <불안을 걷다>는 아픈 몸을 살아 내는 이야기다. 여행을 좋아해 틈틈이 쓰고 그려 여행 에세이 <남해여행자>를 내기도 했다. 현재 애니메이션을 공부 중이다.
 



[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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