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상 모든 '장녀들'의 이야기 [도서]

도서 『장녀들』
글 입력 2020.06.2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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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장녀들'은 그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세 명의 장녀가 발화자로서 장녀의 삶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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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은 이거였다. 발화자는 나오미, 게이코, 요리코. 그러니까 일본 여성들의 이야기인데도 꼭 한국에서 살아가는 장녀처럼 친숙했다. 게다가 캐릭터가 아닌 실존 인물 같았다. 저자 시노다 세츠코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20년간 간병한 경험이 녹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소설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지만 단순한 픽션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책의 주인공이자 발화자는 저자이기도 하고, 장녀로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딸이기도 하고, 장녀처럼 가족 내에서 책임감과 압박감을 이고 사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시선에서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형제들이 그려진다. 챕터마다 사람은 다를지언정 상황은 같았다. 몸도 마음도 병든 어머니를 돌보거나 돌본, 혹은 돌볼 사람은 오로지 장녀인 자신. 그 외 가족 구성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녀를 의심하고 훈계한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 네가 잘 대하지 못해서 그런 거야.'

 

말의 방점은 '내가 아는'에 찍혀있다. 본가에서 떨어져 나가 가정을 꾸린, 이른바 출가한 이들은 알지 못한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이다 터지고 만 것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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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들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갉아서 어머니를 보필한다. 일을 관두기도 하고, 일상을 포기하기도 하고, 사람을 놓기도 하면서. 어머니의 그림자가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돕는다. 그러나 그 애씀과 달리 평가절하 받는다.

 

앞서 말한 가족 구성원들뿐 아니라 딸에게 도움을 받는 당사자인 어머니도 딸은 당연히 그래야 한단다. 일을 관두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장기를 기증하는 건 딸이 해야 할 일이라며. 한국의 장녀로 살거나 장녀처럼 살아 온 이들은 이 상황을 과장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움을 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같다. 특히 건강하게 사고 안 치고 자라는 것으로 충분한 아들과 달리 딸은 딸의 역할은 물론 어머니의 역할도 하길 바란다. 집안일, 공부, 결혼과 효도까지도.

 

어머니의 기대와 행동의 기저에 깔린 당연함은 어머니가 시작점이 아니다. 시발점을 알 수 없는 대물림이 맞는 표현일 거다. 그래도 가정마다 원인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 방관자로 남아있던 나머지 구성원, 그중에서도 아버지. 이 이야기를 하기 전, 우선 어머니의 생활을 들여다보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시집을 간 후부터 집안일과 육아를 전담하는 무일푼 노동자가 된다. 종일 일하지만, 돈을 벌지 못한다. 오히려 돈을 써야 한다. 이 돈은 아버지가 밖에서 벌어온다. 요즘 세대는 혼자 감당할 능력이 안 되어 맞벌이한다지만, 결국 밥과 청소처럼 집안일의 큰 축은 어머니가 전담한다. 날마다 역할을 분담하여도 '이따가 청소하겠다'는 말로 미루고 미루면, 결국 참지 못하는 사람이 먼저 치운다. 미루지 않고 재깍한다고 한들 눈에 보이는 곳만 설렁설렁한 것이 느껴지면, 결국 참지 못하는 사람이 '속 편하게' 집안일을 전담한다.

 

성별에 새겨져 나오는 걸까, 집안일을 잘하는 사람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본가에서 살 때 그들의 어머니가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기에 집안일을 할 필요도 없었고, 어쩌다 방이라도 치우면 대단한 일처럼 치켜세웠기 때문에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밖에서 일하고 들어온 피곤한 자신이 굳이 나설 이유를.

 

다시 기성세대인 우리들의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간다. 돈도, 경력도 없는 채 몇십 년을 살다가 문득 깨닫는 거다. 자신이 잃어버린 자리, 사라진 일거리, 사회에서 지워진 자신의 존재. 바쁜 생활 속에서 이 사실을 깨닫기 시작해도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어머니가 멈추면 가정이 멈추고, 가정이 멈추면 사회가 멈춘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밥벌이를 벌 만큼 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때 어머니는 더욱 나이가 들고 몸이 하나둘씩 아프기 시작한다. 자신이 몇십 년간 부양한 가족에게서 보상을 받고 싶어진다. 대상은 딸, 기왕이면 비혼에 집을 떠나지 않을 장녀에게로 향한다. '나중엔 딸이 아들보다 좋아. 효도 잘하니까.' 나중, 그리고 효도. 딸의 의무는 왜 이리도 폭력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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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가하는 압박과는 별개로 이 문제의 원인은 어머니 개인이 아니다. 개개인보다 훨씬 더 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 가부장제라는 사회와 그 사회의 강자에게 잘못을 꾸짖어야 한다.

 

남자는 일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한다. 남자는 돈을 벌고 여성은 돈을 벌 시간에 아이에게 얽매인다. 경제적 능력도, 지식도, 경력도 잃은 여성은 아무리 답답해도 가정을 벗어날 수 없다. 혼자서 벌어 먹고살 자신도, 아이를 감당할 자신도 없으니까. 그래서 갈 곳이 없다. 끝없는 굴레에 갇힌 여성은 결국 병들고 만다. 걸레질로 닳아버린 무릎 관절이 골다공증을, 답답한 현실에서 짧게라도 행복감을 주는 달콤한 디저트가 당뇨와 고지혈증을, 자신이 그러했듯 이제는 딸이 자신을 보살펴야 한다는 보상심리를 만든 것이다.

 

딸은, 장녀는 '편해서' 남들에게 혹은 다른 가족에게 말하지 못하는 집안의 경제 사정을 나눌 수 있고, '공감 능력이 좋아서' 감정적인 얘기를 꺼내도 되고, 이렇게 집안 사정을 훤히 아는 데다가 '착해서' 나중에 내가 늙으면 나를 위해 살아줄 것이라는 믿음. 아니, 그래야 한다는 의무. 가부장제라는 커다란 구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피해자는 나이가 들면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 피해자를 만든다.

 

책에서 나오는 장녀들은 그나마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풀렸다. 현실이 궁금해진다. 집안이 의사거나 자신이 이사거나 유산으로 받은 집이 있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이러한 메리트 없이 장녀로 살아가는 이들은 어떻게 그 상황을 헤쳐야 할까.

 

 

기습적으로 우울한 감정이 덮쳐왔다. 자신을 결박하던 사슬에서 해방된 순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내던져진 듯한 불안을 느꼈다. 해방감이 이유 없는 죄책감으로 바뀐다.

 

P.169

 

 

의무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죄책감으로 전환되지 않도록 딸들은 딸의 역할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주입하는 의무로부터 자신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 생각 자체를 바꾸는 일이라 어려울 게 분명하다. 그래서 질문 하나를 던져 본다. 세상의 딸들, 특히 장녀들'은' 왜 희생을 효도로 강요당하는가? 효도와 강요, 자신과 타인을 구별해내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될 테다.


 


 


장녀들

長女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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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시노다 세츠코


옮긴이

안지나


펴낸이

주일우


출판사

이음


발행일

2020년 5월 29일


정가

14,800원


쪽수

340쪽


판형

135*200mm


ISBN

978-89-93166-09-5 03830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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