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살아있는 이야기 세계 [문학]

글 입력 2020.06.21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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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혁의 시집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정말 ‘시집 이름을 잘 지었구나’다. 그의 시들을 읽으면 마치 동화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만큼 몰입감이 높다. 그래서 그런 걸까. 시를 다 읽고 다시 곱씹어보면 남는 건 이야기밖에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다만 이야기가 남을 뿐이다.


몰입감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시를 읽으면 마치 내가 시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 속의 이야기에 들어와 행동하고 느끼고, 그리고 시가 끝날 때 행동하고 느꼈던 것 모두 시 속에 놓고 오는 느낌이 든다. 왜 이런 걸까 하는 의문은 시집이 끝날 때까지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첫 장을 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사랑한다. 좋았다고 말하거나 좋은 것에 관해 말하거나. 나는 이야기 속에서 시작한다. 어제 꿈이 그랬다, 오늘 예감이 이랬다, 머릿속에서 우리에게 허다한 행운이 따랐다. (중략) 다시 이야기 속에서 시작한다. 꿈이 예감을 이끌었다 웃음이 숲을 흔들었다, 납작해진 언덕에서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허다한 행복을 겪었다. 모두 한 번에 쏟아진 시간이었다. 잎사귀가 공중을 덮었다. 새가 울타리 안쪽을 걸었다.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의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 「나는 이야기 속에서」부분

 

 

「나는 이야기 속에서」와 같이 이 시집은 ‘나’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그래서 이 시 다음에 나오는 시도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의 기쁨이 넘치고 있는 것이다.

 

김상혁 시인의 시는 그저 이야기를 말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독자에게까지 이야기를 해보라고 말을 건넨다. 이는「슬픔의 왕」에서 살펴볼 수 있다.

 

 

병원에 와서 자기 생각을 찾고, 자기를 찾고, 결국 타인마저 고양시키는 그들은 하나같이 슬픔의 왕들이에요 되게 망쳐버린 부분이 있고 꼭 되찾고 싶은 생활이 있습니다

 
너무 슬플 땐 무서운 게 없더라네요 아무래도 내겐 공포를 지나칠 수 있는 슬픔 같은 건 없으니까, 내가 무언가를 말해도 되는 걸까, 나의 멀쩡한 집과 가족을 어떻게 설명할까
 

의사가 미소 짓습니다. 괜찮으니 이제는 제 이야기를 해보라네요 그냥 슬픔의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중인데, 이야기 속에서 나는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는데요


-「슬픔의 왕」부분

 

 
시 속의 화자는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그것은 입 밖으로 내뱉기에 너무 거대한 이야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작고 초라한, 별로 슬프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보다 슬픈 사람을 다섯이나 알고 있다. 그 중에는 몽유병자, 주정꾼, 어린 자식을 둘이나 잃은 부인이 포함된다. 몽유병자는 잠결에 자신을 찔렀고, 주정꾼은 취해서 애인을 때렸고, 부인은 아이들이 바다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2연 까지만 해도 벌써 ‘나’의 이야기를 하기엔 ‘내’ 이야기가 너무 작고 초라하다. 그래서 화자는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서 “자식처럼 키우던 고양이를 베란다 밖으로 던진 얘기, 잘린 손이 아파서 잠을 못 잔다는 얘기, 병든 엄마가 지겨워 목을 조른 적이 있다는 얘기”등을 조용히 듣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울증, 발모벽, 공황장애, 자기 집에 두 번이나 불을 지른 사람 등의 삶이 괴로운 사람들로 넘쳐난다. 심지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의사 선생님도 화자 자신보다 슬픈 사람이다. 왜냐면 “그는 어릴 적 다섯 번 자해”를 했기에 여섯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 화자 차례가 왔다. 화자의 ‘슬픈’ 이야기를 말 할 차례가 왔다. 화자는 무언가를 말해도 되는 걸까 싶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과 달리 멀쩡한 집과 가족이 있기에, 거기서 슬픈 이야기를 찾을 수 없기에 말할 거리가 없다.

드디어 의사가 화자를 향해 미소 짓는다. 화자보고 이야기 해보라고 한다. 당신은 말 할 수 있는가. 「슬픔의 왕」은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하다. 잔인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나’도 슬프지만 나보다 더 슬픈 ‘그들’ 때문에 내 슬픔이 작고 초라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도저도 못한 이야기를 내뱉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시가 요즘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시는 어쩌면 나와 같은 글 쓰는 사람들, 나의 세대와 같은 글 쓰는 청년들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4·19세대, 386 세대와 달리 우리 세대를 두고 상처 없는 세대가 무슨 문학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앞 세대가 아프기 때문에 글을 썼다면, 우리 세대는 아프기 위해 글을 쓴다. 상처를 해부학적으로 냉철하게 현미경으로 분석할 수 있는 거리가 생긴다. ‘나는 아프다’고 하기 보다는 ‘왜 아프냐’고 해야 문학의 꼴을 갖춘다. 글쓰기가 더 힘들어진 것이다.


- 김경욱,「상처 없는 세대는 아프기 위해 글을 쓴다」, 조선일보, 2005년 9월 27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대는 8,90년대도 모르고, 더욱이나 기존의 문학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세대의 언어는 팽팽한 긴장과 호기심, 통렬한 아픔으로 가득 차있다. 우리 세대는 우리만의 삶과 욕망,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어느 누구의 지도도 없이 겁도 없이 절망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다. 그러니 입을 열라고「슬픔의 왕」의 화자에게,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 세대에 아픔이 없다고 개인의 아픔까지 없는 건 아니니까.
 

 

 

이것은 새로운 세계 채집통 속 죽도록 날뛰는 곤충을 보며 꼬마는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영혼은 있다고 믿으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믿으면 어디에도 없는 세계 커서 실컷 사랑을 했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중략)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어떤 미래는 구원받고 어떤 미래는 큰일을 당한다 하지만 보고 먹고 사랑하고 믿거나 믿지 않고 그렇게 사람은, 사람은 제자리에 있다.


 

- 「이것은 새로운 세계」부분

 

 
김상혁의 시를 읽으면서 이 시의 모든 것이 사실은 그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세계로 우리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 즉, 독자는 그가 채집한 벌레이고 그는 지금 채집통 속에 있는 독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이것은 새로운 세계」에서처럼 “채집통 속 죽도록 날뛰는 곤충을 보며 꼬마는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나의 생각이 맞다면, 김상혁의 세계는 정말이지 어지럽다. 너무 현실 같고, 그렇기에 때때로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왜냐면 그의 세계는 “영혼은 있다고 믿으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믿으면 어디에도 없는 세계”, “짐승은 괜찮고 인간은 안 되고 태아에 대해선 논란이 있는 세계”,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돼지와 양이 섞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에도 사람은 항상 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그의 세계에 대한 묘사를 찾으려면 끝도 없을 것 같다. 사실 찾으려는 것도 웃기는 행동이다. 왜냐면 모든 시가 그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이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는 마치 현실 같다. 현실이다. 그래서 더욱 몰입감이 높으며, 모든 독자들이 주인공 자리에 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세계에는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규칙은 아래 시에서 알 수 있다.

 

 
한 팔에 두꺼운 외투를 건 채 우리의 여름이 오싹해지길 기원합시다. 한밤중 헤드라이트 앞으로 튀어나온 무스의 높고 아름다운 뿔이 도로변으로 굴러떨어질 때, 산줄기를 따라 쭉 내려가는 별이 너무 차갑고 뾰족할 때, 시간이 개념 없이 흘러버렸을 때 분노와 회한으로 침묵하지 맙시다.
 

경향성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 혹은 오래된 사랑을 설명하는 이런 말 앞에 지갑을 열지 맙시다. (중략) 여행지에서 남겨온 동전을 난로 위에 올려두기 위해 겨울을 기다립시다. 순환하지 않는 계절. 여름은 겨울로 늙어가고, 다음 여름엔 더 늙어버린 모습으로, 두 팔로 석유통을 힘겹게 안아들고서


- 「시간을 재다」부분
 

 

생각해보면 독자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힘은 이야기가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말이 되기도 하고, 그렇기에 애매한 이야기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의 ‘애매함’이 어쩌면 김상혁 시의 매력이 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는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 속의 삶과 경험이 다음 시에서 반복된다. 지우고 보여주고, 또 지우고 또 삶을 보여주는 방식이 흥미롭다. 마치 “세계여행의 꿈을 간직한 채로” 환전소 앞에 선 기분이다. 아직 세계여행을 해보지 않았기에 더욱 설레는 환전소 앞. 시 속의 세계는 그런 세계이다.

 

 

[김승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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