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중의 조각, 그것에 대한 언어

정서영 《공기를 두드려서》, 바라캇 컨템포러리, 2020.5.12-7.5
글 입력 2020.06.1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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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를 보기 위해 삼청로와 이어지는 청와대로 높은 경사면을 걷노라면, 과거 검문소이자 지금은 안내초소 쯤으로 기능하고 있는 구역을 자연스럽게 지나게 된다. 아니,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데에는 거짓이 있다. 나는 지금 단지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일 뿐인데 과거 이곳에서 있었던 검문의 기억때문인지 근위병처럼 굳어 서 있는 경찰 선그라스 너머의 알 수 없는 시선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중력이 곱절은 더해진 발걸음으로 이 곳을 통과하게 된다. 백지숙은 평론집 『본 것을 걸어가듯이』에다가 비슷한 경험을 썼었다.  


"무더운 여름날, 어쩌다 그런 생각이 났는지 아는 화가와 드디어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는 청와대 앞길을 따라 경복고등학교 쪽으로 걸어가 보자고 했다. (...) 두 번째 검문에서 정신이 확 들었다. 직업을 묻는 검문에 같이 간 작가가 매우 곤혹스러워하여, 내가 잔뜩 위축된 중에도 다소 과장된 어조와 동작으로 '이 사람 직업은 화가'라고 대신 말해 버렸다. 순간 기관원이 지은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 정말 화가냐, 묻더니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화가의 이미지를 찾으려는 듯 위아래를 훑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고 이상한 물건이라도 보는 듯한 눈의 호기심과 입가의 웃음이 서로 뒤틀려 기묘함마저 자아냈다." -백지숙, 「공과 사 그리고 예술가」, 『본 것을 걸어가듯이』, p.31.


그 무거운 공기가 흐르던 길에서 나는 '무슨 일로 여기를 지나냐'라고 검문관의 물음을 받으면, '(그저 무해한 시민일 뿐으로) 전시를 보러 가는 중이오.'라고 답하려고 나름의 시나리오를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별다른 질의답변 없이 갤러리가 있는 평지길에 도착했을 때 나는 드디어 본래의 목적대로 정서영(1964~) 개인전 관람을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고 할 때 나는 안내원의 설명에 따라 나의 주소지와 연락처, 이름을 종이에 먼저 적어야 했다. 코로나19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정서영의 전시를 둘러보는 관람객이 되었다.


※ 바라캇 컨템포러리는 코로나 19의 예방 및 확산 방지를 위해 사전 예약 후 관람할 수 있다고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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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서영의 개인전에는《공기를 두드려서(Knocking Air)》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월간미술』 5월호에 전시평론을 쓴 김해주는 "'두드려서'라는 단어에서 손을, 물리적 운동을, 재료들이 접합하며 만들어내는 소리와 그 과정의 묵직한 단정함을 떠올리게 된다면, '공기'는 그 운동이 만들어내는 대상의 변형 가능과 포착 불가능을 생각하게 한다'고 했다. 그의 포착대로 정서영의 조각, 혹은 설치, 혹은 활자의 음율은 '잇따라 친다'는 '두드림'의 속성과 그 행위 주체자의 예의주시한 감각이 공기중에 만드는 어떤 무형의 형태를 담지하게 한다. -그것은 단지 '분위기'로 일컫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공기 중에 조각을 하듯, 혹은 대상의 상태변화와 연관된 존재론적 명제에 천착하듯, 이번에 전시된 정서영의 작업에서 캐스팅이 많이 포착된다. 호두를 폴리우레탄 레진으로 복제한 것이라든가 알루미늄 주물로 돌이나 파이프처럼 생긴 입방체를 만든 것이라들지, 나아가서 도자기를 빚을 때 쓰는 유약으로 종이 위에 모호한 문장을 쓴 작품도 그렇다. 이들은 모두 본래의 상태를 정의하는 원재료 속성으로부터 탈피해 있거나, 부서지거나 부서진 경험을 체득해 시각화하고 있거나, 물컹한 것이 굳어지고 액체가 고체가 되는 등의 형태 변화를 인지시키는 사물이다.  


공기 중에 조각을 하듯, 혹은 대상의 상태변화와 연관된 존재론적 명제에 천착하듯, 이번에 전시된 정서영의 작업에서 캐스팅이 많이 포착된다. 호두를 폴리우레탄 레진으로 복제한 것이라든가 알루미늄 주물로 돌이나 파이프처럼 생긴 입방체를 만든 것이라들지, 나아가서 도자기를 빚을 때 쓰는 유약으로 종이 위에 모호한 문장을 쓴 작품도 그렇다. 이들은 모두 본래의 상태를 정의하는 원재료 속성으로부터 탈피해 있거나, 부서지거나 부서진 경험을 체득해 시각화하고 있거나, 물컹한 것이 굳어지고 액체가 고체가 되는 등의 형태 변화를 인지시키는 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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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를 두드려서(Knocking Air)》전시전경, 바라캇컨템포러리


 

정서영이 <노란색, 그것>, <검붉은색, 그것>(2020)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보더라도 이 사물은 공기중의 동작과 일체의 유물론적 사건을 포착하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이 두 개의 조각은 일종의 기념비다. 이 조각의 주변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그것이 머무는 시간동안만 기념한다.' 그런데 정서영이 기념하는 것이란 역사적 거대서사의 기록이 아니라, '가방 속 열쇠를 찾다가 무작위로 관계없는 물건들을 잡게 되는' 찰나의 포착이다. 또는 과거 작업에 등장했던 모나미 볼펜 따위를 신작에 재등장시킴으로 작업 맥락을 이어가며 유사 사물을 통해 기억을 기념하는 정도로 보인다.-그 기억마저도 미술언어에 국한될 수도 있다.- 이들은 이번 전시에서 말 그대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 드로잉 작업 10점 가운데, '네 벽으로 둘러쳐진 이 정원에는 가시가 돋친 보라색 꽃을 피우는 키 큰 키 큰 식물들이', '우주로 날아갈 때는 코를 빼놓고 간다'라 쓴 글의 모호함처럼 명쾌한 해석과 결론의 정형을 피하려는 듯 빈약하고 허술한 미감으로 놓여져 있다. 실제로 임근준은 2013년 두산아트센터가 기획한 정서영과의 대담, <내일을 향한 답문 한국의 현대미술가에게 묻고 듣는다>에서 작가의 2005년 독일에서의 전시 《모닥불을 거기 내려놓으시오(Leave the campfire there)(FREUDENFEUER EINFACH HINSTELLEN)》에서 보여줬던 작업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심의회의에서 '완성도 부족'으로 기각된 사례를 농담삼아 드러내기도 했다. 애당초 박제가 불가능한 모닥불을 파란색 플라스틱 모형으로 캐스팅 재현했던 당시나 커버가 조금씩 비워져 제 기능을 못하는 쇼케이스를 제작한 이번 해의 작업이나 정서영이 추구하는 미학적 위치는 기존 범례를 애써 외면하는 데서 오는 쾌감을 머금고 있다고 보아진다. 물론 이 자체를 작업의 목적으로 하지 않으나 정서영이 포착한 일반적으로 포착되기 어려운, 고정되고 완결된 상태로 함유하기 어려운 존재의 증언을 위하여서는 이탈하고 파괴된, 동시에 하찮아 보이는 것의 전유가 빈번하게 수반되어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이 난해하고 진지한 시구와 같은 조각의 파편이 매우 친숙하며 유머러스한 소재로 변형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공기를 두드리는 것처럼 무위한 추론이자 공상, 그리고 사색이자 사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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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를 두드려서(Knocking Air)》 전시전경, 바라캇컨템포러리


 

3.
 

정서영의 작업이 시에 곧잘 비유되는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시인이고, 그녀가 90년대 독일 유학한 작가로서 개념미술 사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데에서 기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조심스럽게, 그녀가 작업에서 써온 여성적 언어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다만 우리 미술사에서 아직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고 나 역시 난해하게 여기는 페미니즘 미술과는 구분해야겠다.

 

정서영이 작업으로 발굴해온 유약한 소재적 특성과 그것이 함유하는 메타포, 시공감각의 정동, 그 것을 어찌됐든 독해하여 관람하게 되는 관람자의 입장에서 떠오르는 형상은 시적 언어를 닮아있다. 상징체계로써 개념을 시각적으로 물화하여 자각하는 데 이어 해석·번역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때문에 소시르의 기호체계에 기대 있으면서도, 특유의 섬세하고 조심스러우며 반복된 음율과 같은 작업의 특징은 별개의 수사로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이를 특히 동시대 여성성의 단일한 표상이라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라도, 일단은 여성적 언어라는 수사로 이를 가시화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정서영이 작업의 화자로서 일관되게 수행해온 비주류 서사, 이를테면 비현실과 오해, 부조리와 비이성을 기술하는 노력에 가닿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적 말하기'가 가능한 여건의 구현, 또 그를 이루는 상황 조건의 특징이 일련의 주류로 말할 수 있는 범위 외곽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 사회가 구사하는 언어의 장과 그것이 요구하는 언어적 특질은, 정서영이 직접화법을 우회하여 물질의 전형적 기능성을 탈피하고, 현상적 시간을 정지하는 대신 사고와 사유의 시간을 늘림으로써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종의 것이다. 만약 정서영의 언어 반대편에 선 어법이 사회 주류가 차지하는 권력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체제의 암묵적 동의로 하여금 단단한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면, 여성적 언어는 사변적 아름다움을 수식하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려를 조금 더하자면, 예술가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지원은 물론이고 비평에 있어서도 여성적 언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이들은 사회의 검문·검색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는 실제로 면접이나 포럼 행사에서 마치 전통을 따르듯 규격화하는 언어의 쓰임 속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백지숙의 글에서 다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본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복잡한 서울을 전혀 감지할 수 없는 청와대 앞의 비현실성은 서로 휘감겨 있는 상반된 기류 탓이었다. (...)아마도 거기서 통용되는 언어는 이를테면 국민교육헌장같이 어떤 상상이나 반문 또는 이의 제기도 우스워지는 꽉 짜인 틀을 갖고 있을 것이다." 백지숙, 「공과 사 그리고 예술가」『본 것을 걸어가듯이』, p.32.

 

미리 밝혔듯이 언어에 부과한 젠더와 그 이분법적 구분은 그것이 실제로 지칭하는 화자의 성이 아니라, 언어에 감지된 권력과 그것의 편향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정서영의 《공기를 두드려서(Knocking Air)》에는 유독 부서진 호두알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호두가 깨지기 위해 두드려졌던 공기라는 상징체에 젠더 특징을 부여하자면, 나는 그것을 여성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두드림의 대상으로 현실 이탈감 후에서야 새삼스레 현실에서 자각되는 무거운 존재감이다. 그 존재가 조각되는 순간을 관람해 여기 언어로 쓴다.

 

  

[오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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