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말 - 연극 비B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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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전차는 어디를 향해 내달리는가
“엄마, 나는 죽고 싶어요.”
언제부턴가 생이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여기서부터예요. 선택지가 두 가지 있거든요. 허무함에 생을 놓아버릴지 아니면 생을 더 아껴줄지. 그때 제가 선택했던 건 아끼는 것도 놓아버리는 것도 아니었어요. 죽음이 너무 또렷해서 생이 희끄무레했달까. 죽음과 생 사이가 습자지 같은 엷은 막으로 구분된 것 같았는데 제 손끝은 너무 무르고 뭉툭해서 막을 갈라찢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찢기엔 너무 무서웠죠.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나-는-죽-고-싶-어-요. 어서, 레이.”
원인 모를 만성 체력 저하증으로 비(비아트리스)는 8년째 침대를 벗어날 수 없어요. 비는 간병인 레이에게 죽고 싶다는 통보를 적은 편지 대필을 부탁해요. 비는 내달려요. 죽음을 향해서.
몇 년 전, 연극 <비>의 영상을 봤을 때 생각했죠. 이게 어쩌면 뭔가 나에게 해답이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이게 무슨 극인지도 모르지만, 단지 저 문장 하나가 꽂혀 들어왔어요. 나는 죽고 싶다는 고백. 이 대사 하나가 저를 극장까지 이끌었어요.
BEA
사실 이 극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어요. 이 극이 다루고 있는 주제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물론 쉽게 말할 수 없는, 스스로 행복해질 권리와 존엄, 그리고 공감에 대해 다루고 있죠. 하지만, 그것보다는 동성애자인 레이먼드를 두고 비와 캐서린이 툭툭 던지는 아웃팅에 해당하는 말들이 무례하고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이 역시도 모두가 마음 맹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그들이 레이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걸까요? 그렇지만 이것은 레이에게 농담이 아니었어요. 농담일 수도 없고요. 농담이어서도 안 되죠. 불편해하는 레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게 정말 최선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사회적 소수자를 조롱하는 언어를 농담으로 전유하는 것은 당사자만이 가능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저를 울게 하고, 웃게 한 부분들이 있었어요. 비는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해요. 비록 그것은 비의 상상 속 모습이겠지만, 비는 분명히 춤추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어요. 비는 누구보다 삶을 향해 열망을 드러내고 삶을 욕망해요. 이 작품은 눈부시게 그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요. 그 시도는 분명히 가치 있고 아름다웠어요.
삶을 향해
맞아요. 생과 삶은 귀중하죠. 누군가는 누리지 못하는 것을 나는 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이 극을 통해 공감의 한계를 맞닥트려요. 결코 우리는 비의 고통을, 소년원에서의 레이의 고통을, 딸을 죽여야 하는 캐서린의 고통을 알 수 없을 거예요.
한때 그게 너무 슬펐어요. 누구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으리라는 것. 남의 불행보다 내 발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 이해란 결코 완결될 수 없으며, 이루어질 수도 없으리라는 것.
연극 <비>는 우리가 ‘마음 맹인’이라는 것, 공감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공감의 한계를 숨기지 않고 말해요. 당연히 공감할 수 없으리라는 작품 속 선언은, 한계의 인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비에게, 캐서린과 레이에게 다가서게 만들어요.
사실 저는 이 극에서 제가 마음 맹인이라는 사실을 통렬히 실감했어요. 엉뚱하게도, 이 극에서 저는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어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비의 선택이 삶을 향한 열망과 가장 맞닿아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내 마음은 나만이 알고 있었어요. 비의 죽고 싶다는 그 선언에서 저는 사랑을 읽고야 말았어요. 우리는 누구보다 살고 싶어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요.
레이는 타인의 아픔과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죠. 그런 레이 같은 이를 우리는 살면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의미 없지 않아요. 마음 맹인임을 인정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더라고요. 우리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각자가 찾은 해답을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나아갈 수 있어요.곁에 나란히 누워줄 수 있게 돼요.
높은 할머니 사과나무 위에 올라간 비를 하염없이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캐서린. 내려오라고 화를 내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듯이 나와 타인의 관계는 그런 게 아닐까요?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거기서 시작되는 거예요. 공감은.
연극 <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마침내 비를 가두듯 둘러싸고 있던 벽이 열리고 푸르른 들판이 뒤로 쭉 펼쳐져요. 연극 내내 시종일관 반짝이던 벽면의 귀걸이 공예품보다, 더 빛나고 탐스러운 열매가 무르익은 사과나무가 서있어요. 비는 이제 침대를 나와 마음껏 뛰어다녀요. 죽음은 비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원하던 삶을, 존재적 해방을 가져다주어요.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가 존재하는 장소를 바꾸는 것일지도 몰라요.
[박하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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