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말 - 연극 비BEA

우리는 누구보다 살고 싶어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요.
글 입력 2024.03.01 14:3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욕망이라는 전차는 어디를 향해 내달리는가



“엄마, 나는 죽고 싶어요.”

 

 

24 비Bea_비&캐서린_김주연&방은진.JPG

 

 

언제부턴가 생이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여기서부터예요. 선택지가 두 가지 있거든요. 허무함에 생을 놓아버릴지 아니면 생을 더 아껴줄지. 그때 제가 선택했던 건 아끼는 것도 놓아버리는 것도 아니었어요. 죽음이 너무 또렷해서 생이 희끄무레했달까. 죽음과 생 사이가 습자지 같은 엷은 막으로 구분된 것 같았는데 제 손끝은 너무 무르고 뭉툭해서 막을 갈라찢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찢기엔 너무 무서웠죠.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나-는-죽-고-싶-어-요. 어서, 레이.”


원인 모를 만성 체력 저하증으로 비(비아트리스)는 8년째 침대를 벗어날 수 없어요. 비는 간병인 레이에게 죽고 싶다는 통보를 적은 편지 대필을 부탁해요. 비는 내달려요. 죽음을 향해서. 


몇 년 전, 연극 <비>의 영상을 봤을 때 생각했죠. 이게 어쩌면 뭔가 나에게 해답이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이게 무슨 극인지도 모르지만, 단지 저 문장 하나가 꽂혀 들어왔어요. 나는 죽고 싶다는 고백. 이 대사 하나가 저를 극장까지 이끌었어요. 

 

 

 

BEA



사실 이 극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어요. 이 극이 다루고 있는 주제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물론 쉽게 말할 수 없는, 스스로 행복해질 권리와 존엄, 그리고 공감에 대해 다루고 있죠. 하지만, 그것보다는 동성애자인 레이먼드를 두고 비와 캐서린이 툭툭 던지는 아웃팅에 해당하는 말들이 무례하고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이 역시도 모두가 마음 맹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그들이 레이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걸까요? 그렇지만 이것은 레이에게 농담이 아니었어요. 농담일 수도 없고요. 농담이어서도 안 되죠. 불편해하는 레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게 정말 최선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사회적 소수자를 조롱하는 언어를 농담으로 전유하는 것은 당사자만이 가능하지 않나 싶었어요.

 

 

Bea_poster_b.jpg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저를 울게 하고, 웃게 한 부분들이 있었어요. 비는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해요. 비록 그것은 비의 상상 속 모습이겠지만, 비는 분명히 춤추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어요. 비는 누구보다 삶을 향해 열망을 드러내고 삶을 욕망해요. 이 작품은 눈부시게 그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요. 그 시도는 분명히 가치 있고 아름다웠어요.

 

 

 

삶을 향해



맞아요. 생과 삶은 귀중하죠. 누군가는 누리지 못하는 것을 나는 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이 극을 통해 공감의 한계를 맞닥트려요. 결코 우리는 비의 고통을, 소년원에서의 레이의 고통을, 딸을 죽여야 하는 캐서린의 고통을 알 수 없을 거예요.


한때 그게 너무 슬펐어요. 누구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으리라는 것. 남의 불행보다 내 발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 이해란 결코 완결될 수 없으며, 이루어질 수도 없으리라는 것.


연극 <비>는 우리가 ‘마음 맹인’이라는 것, 공감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공감의 한계를 숨기지 않고 말해요. 당연히 공감할 수 없으리라는 작품 속 선언은, 한계의 인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비에게, 캐서린과 레이에게 다가서게 만들어요.


사실 저는 이 극에서 제가 마음 맹인이라는 사실을 통렬히 실감했어요. 엉뚱하게도, 이 극에서 저는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어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비의 선택이 삶을 향한 열망과 가장 맞닿아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내 마음은 나만이 알고 있었어요. 비의 죽고 싶다는 그 선언에서 저는 사랑을 읽고야 말았어요. 우리는 누구보다 살고 싶어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요.


레이는 타인의 아픔과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죠. 그런 레이 같은 이를 우리는 살면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의미 없지 않아요. 마음 맹인임을 인정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더라고요. 우리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각자가 찾은 해답을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나아갈 수 있어요.곁에 나란히 누워줄 수 있게 돼요.


높은 할머니 사과나무 위에 올라간 비를 하염없이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캐서린. 내려오라고 화를 내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듯이 나와 타인의 관계는 그런 게 아닐까요?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거기서 시작되는 거예요. 공감은.


연극 <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마침내 비를 가두듯 둘러싸고 있던 벽이 열리고 푸르른 들판이 뒤로 쭉 펼쳐져요. 연극 내내 시종일관 반짝이던 벽면의 귀걸이 공예품보다, 더 빛나고 탐스러운 열매가 무르익은 사과나무가 서있어요. 비는 이제 침대를 나와 마음껏 뛰어다녀요. 죽음은 비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원하던 삶을, 존재적 해방을 가져다주어요.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가 존재하는 장소를 바꾸는 것일지도 몰라요.

 

 

 

태그.jpg

 

 

[박하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1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