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한 입 파먹기 시리즈] 한국의 미, 브라질의 미 - ③ 식인주의를 실습하자

‘우리의 것으로 독재에 반대한다’
글 입력 2024.01.0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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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 브라질의 미’의 세 번째 챕터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한국적인 것을 찾는 여정부터 시작해, 브라질이 식민 지배의 역사를 ‘정신적으로’ 벗어나는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트로피컬리즘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트로피컬리즘. 한국어로 직역하면 ‘열대 주의’ 정도가 되겠네요. 네, 브라질이나 아마존 따위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 이미지가 맞습니다! 전형적인 브라질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열대적인 것들을 염두에 둔 이름입니다.

 

예술 사조치고는 조금은 유별난 이 이름은 한 설치미술 작품에서 따왔습니다. 작가의 이름은 엘리오 오이치씨까(Hélio Oiticica), 작품 이름은 ‘트로피칼리아(Tropicália)’. 트로피칼리아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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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picália, 1967. ⓒHélio Oiticica

 

 

어딘가 힐링의 공간 같기도 하고, 요즘의 ‘감성 카페’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황량하기도 하고… 신기하죠?

 

 

 

트로피컬리즘 – 식인주의를 실행하다


 

엘리오 오이치씨까는 공간 곳곳에 앵무새, 각종 식물과 같은 ‘열대적인’ 오브제를 두는 동시에, 그가운데에는 네모 반듯한 컨테이너 같이 생긴 공간을 배치했습니다. 네모난 공간 가장 안쪽에는 텔레비전이 있죠. 감상하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작품 내부에 들어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열대 동식물은 전형적인 브라질의 이미지를, 컨테이너는 브라질 파벨라의 비좁고 네모난 공간을 의미합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외부에서 바라본 브라질의 피상적인 이미지에 브라질의 고질적인 사회적 문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파벨라의 구조를 섞었다는 것입니다. 유럽 등의 국가가 브라질을 대상화하며 사용하는 허상과도 같은 이미지와 함께, 그 속에 존재하는 브라질 사회의 본질과 문제를 보여주겠다는 것이죠.

 

 

Somos negros, índios, brancos, tudo ao mesmo tempo - 

nossa cultura nada tem a ver com a européia, apesar de estar até hoje a ela submetida: só o negro e o índio não capitularam a ela.

우리는 흑인이고, 인디오인 동시에 백인이다 – 

우리의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유럽에 종속되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것은 거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흑인과 인디오만이 그곳에 투항하지 않았다.

 

- 설치미술 ‘트로피칼리아’에 관한 엘리오 오이치씨까의 작업노트 (1968)

 

 

이상과 현실의 미스매치. 그 속에서 브라질다운 것을 찾는다는 이 작품의 중요한 개념에 영감을 받은 유명한 음악인이 있습니다.

 

 


 

 

보사노바의 주역 까에따누 벨로주(Caetano Veloso)가 곡 제목에 ‘트로피칼리아’를 차용합니다.

 

 

 

우리의 것으로 독재를 반대하다


  

 

O monumento não tem porta

A entrada é uma rua antiga

기념관에는 출구가 없지

입구는 오래된 길일 뿐이지

 

 

가사는 표면적으로 보면 지극히 평범한 브라질의 풍경을 나열하지만, 그 속으로는 당시 검열을 강화하는 법을 제정한 군사 정권을 시니컬하게 비판합니다. 사실 ‘트로피칼리아’라는 제목은 작곡 이후 가장 마지막에 붙인 것입니다. 까에따누 벨로주가 훗날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평범한 듯하면서도 깊이 보면 다른 해석이 보이는 은유적인 가사가 오이치씨까의 설치 작품의 개념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판단으로 제목으로 선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격적인 트로피컬리즘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제 열대주의는 더 이상 예술 작품들의 모임만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적극적으로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이 되어 갔습니다. 이후 까에따누 벨로주와 질베르투 지우가 정권에 반하는 메시지를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기까지, 약 1년 정도 되는 시간동안 문화예술계에서 트로피컬리즘은 불타올랐습니다.

 

트로피칼리즘은 특히 음악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브라질의 정치적 상황에 반대하는 일종의 시위, 운동에 음악인이 주축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음유시인이 뛰어난 은유로 더 나은 브라질을 만들고자 각자의 이야기를 펼쳤습니다.

 

 

 

예술로 세상을 나아지게 하자


 

브라질은 명확한 선언,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시선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현재 브라질 대중문화에도 그 흔적을 종종 느낄 수 있습니다. 시리즈의 앞에서 설명했던 아니타의 ‘근원 찾기’ 역시 이런 비슷한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죠. 여전히 브라질은 브라질다운 것에 목마릅니다. 젊은 세대들도 브라질만의 시각을 새로 창조해 내는 것에 관심이 많죠.

 

한국다운 것이 막연하게 알 수 없는 뿌리, 그리고 외부의 것과 얼기설기 혼재되어 있는 미학이라고 하면, 브라질의 것은 창조적이고 융합적이면서 뿌리가 있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다고 할 순 없겠죠. 어떨 때는 브라질다운 것을 찾기 위한 브라질 예술인들의 열망이 한국다운 것을 찾는 한국인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한국다운 것은 무엇인가요? 한국의 ‘트로피컬리즘’은 어떤 것일까요?

 

 

* 브라질 한 입 파먹기 시리즈 네 번째 에피소드 - ‘한국의 미, 브라질의 미’ 끝.

 

 

류나윤_컬쳐리스트.jpg

 

 

[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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