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앤으로 말할 것 같으면 [TV/드라마]

다시 보는 빨간 머리 앤
글 입력 2020.06.0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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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습관이 있다. 넷플릭스나 왓챠 플레이 같은 OTT 스트리밍 서비스를 구독하고, '보고 싶은 콘텐츠'에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까지 골고루 채워 넣는다. 일종의 쇼핑 같다. 장바구니에 살 물품을 잔뜩 넣어두고, 무얼 살까 고민하다가 엉뚱하게 세일 상품을 주문하는 것처럼 보려고 담아둔 콘텐츠는 건들지를 않고, 담아두지도 않았던 영화나 드라마를 클릭한다. 'Anne With an E'도 그렇게 본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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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with an E'는 현재 시즌 3까지 나온 드라마로, 모두가 잘 아는 <빨간 머리 앤>이 원작이다. 토끼와 거북이나 두루미와 여우 같은 이솝우화는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데 이상하게 빨간 머리 앤은 어떤 내용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빨간 머리 앤'이라는 문장과 양 갈래로 땋은 앤의 이미지가 내가 아는 앤의 전부다. 그래서 원작이랑 아주 비슷하냐는 주변의 물음에 '앤 성격이 당차서 꽤 각색한 편일걸?'이라는 모호한 답을 들려주었다. 알고 보니 시즌1은 원작과 거의 결이 같은 흐름이었다지.


나처럼 많은 이들의 기억 아주 깊은 곳에 묻혀 있을 빨간 머리 앤의 줄거리를 살짝 들려주고자 한다.

 

19세기 캐나다 동부, 섬 애번리 마을에서 '초록색 지붕 집'이라고 불리는 매슈와 마릴라 남매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들은 건강이 나빠진 매슈를 대신하여 농사일을 도와줄 남자아이 하나를 데려오기로 한다. 그런데 웬걸. 남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가 역에서 매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아이가 빨간 머리 앤. 앤은 커스버트 남매가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으로 알아 잔뜩 들떠서 마차를 몰고 가는 내내 쉴 새 없이 입을 놀린다. 풍부한 감수성과 어휘력으로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난 호수, 나무, 꽃 등에 이름을 달아준다.

 

집에 도착해서야 앤은 현실을 깨닫는다.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라고. 처음으로 자신도 가족이 생긴다는 소식에 꿈꾸는 게 아닐까 싶어 수십 번 팔을 꼬집었던 지난 시간의 의미가 사라졌다. 좌절하고 슬퍼해도 야속한 시간은 착실히 흘러 다음 날이 되었다. 앤이 떠나야 하는 날. 그런데 앤의 사정을 알게 된 마릴라가 앤에게 테스트 기간을 주겠다며 다시 데려간다. 그 후, 오해가 생겨 앤이 쫓겨나듯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정식으로 커스버트 가족이 된다. 산딸기주 한 잔과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한다. 첫 가족, 첫 학교, 첫 친구, 세상이 처음인 앤의 좌충우돌 성장기가.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랬다. 앤이 웃으면 웃고, 앤이 울면 울었다. 인물에게 동기화가 된 것처럼 감정을 그대로 따라간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앤은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려는 노력, 필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순수함, 하고 싶은 말을 하고야 마는 소신,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뛰어들 용기. 하나만 가져도 대단하다고 할 마당에 이 모든 것을 지녔으니 선입견을 품고 있던 애번리 사람들도 마음을 열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닐까? 이렇게 '앤'이라는 존재가 커스버트에, 그리고 외딴 섬 애번리에 만든 변화 몇 가지를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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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앤은 살면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거다. 보육원에서도, 커스버트 가족이 되기 전에 일했던 해먼드 집에서도. 앤을 핍박하고, 힐난하고, 헐뜯을 뿐 귀 기울인 사람은 없었다. 앤이 책을 가까이하게 된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책 속 여러 인물과 이야기 덕분에 연극의 주인공이 된 양 열연을 펼치며 혼자 놀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랬던 앤에게 '사람들'이 생겼다. 그냥 사람도 아니고, 앤에게 소속감과 애정, 관심을 줄 가족. 그 가족 중에서도 마릴라와 앤의 관계성이 유난히 좋았던 이유는 아마 마릴라의 변화가 극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거다.


마릴라는 철옹성 같다. 신경질적이고, 날카롭고, 기민한 원리원칙주의자다. 예컨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은 매슈를 구박한다거나 외출복을 아무렇게나 던져둔 앤을 지적하는 식이다. 처음에 자신도 힘쓰는 것에 자신 있다며, 농장 일하겠다던 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거절한 것도 본인의 신념(일종의 원칙)이 확고하기 때문이었다. '농장 일은 남자애만 할 수 있다. 앤은 여자애라서 집안일이면 몰라도 농장 일은 절대 시킬 수 없다.'

 

자신이 정의한 기준으로 집안을 꾸리는 마릴라에게 앤은 커다란 변수였다. 그렇게 다니고 싶어 하던 학교에 갑자기 가지 않고, 앤을 깎아내린 마릴라의 친구 레이철에게 똑같은 말로 갚아주고, 해서는 안 될 말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앤. 앤에게는 마릴라가 사회에서, 가문에서 배운 기준이 하나도 없었다. 앤은 그저 앤이었다. 전혀 사회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기에 마릴라와 오해가 생기거나 다투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싸움은 항상 나쁜 결과만 만들지 않는다. 더 나은 변화를 위한 시행착오 과정이기도 하다.


마릴라는 앤이 없었다면 참석 권유도 받지 못했을 '젊은 어머니의 모임'에 참여한다. 이 모임은 여자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의 모임으로, 어떻게 아이를 교육할지 각자의 생각을 나눈다. 과거 '농장 일은 무조건 남자의 몫'이라던 마릴라가 이 이야기들을 잘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위축되거나 불만을 느끼지 않을까 했던 것과 달리 그들의 이야기들을 깊이 공감하며 받아들였다. 레이철의 핀잔에도 굴하지 않던 마릴라. 마릴라를 둘러싼 벽 하나가 부서진 것 같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신앙심 깊은 마릴라가 앤의 잘못을 나무라기 위해 목사를 부른다. 의사 선생님도 아닌 목사를 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도가 높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데 찾아온 목사는 '여자아이는 학교에 다니지 말고, 좋은 집에 시집가기 위한 신부 수업을 들어야 한다'며 앤을 가르치려고 한다. 마릴라는 혼란을 느꼈다. 자신의 신념 같은 강한 확신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었을 거다.


마릴라의 결론은 이러했다. 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두자. 학교에 가고 싶다면 가고,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면 배우고, 뭐가 됐든 하고 싶은 일을 하길 바란 것이다. 의젓하게 굴어도 앤은 결국 어리숙한 십 대였다. 마릴라처럼 흔들리던 앤도 그 말에 갈피를 잡는다. 이번엔 앤에게 튼튼한 벽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 강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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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은 레이철과 마릴라의 관계도 부드럽게 바꾸어 놓았다. 레이첼이 경멸하는 '젊은 어머니들의 모임'을 마릴라가 대변하면서, 분위기가 삭막해졌다. 때마침 앤이 학교에서 돌아와 조잘조잘 빠르게 말을 던졌다. 두 분은 오래전부터 친구로 지내서 지금까지 사이좋은 게 너무 보기 좋다고. 부럽다고. 할 말을 늘여놓고 재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앤. 1층에 남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 멋쩍게 웃었다. 일순 대화의 흐름이 살얼음이 깨진 여느 봄날처럼 따스해졌다. 서로가 다른 관점을 가졌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러면서도 각자의 관점을 존중해주며.


앤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이거일 테다. 각자의 다름을 서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 다름이 해침과 전혀 관계없는 말임을 깨닫게 하는 것. 애번리 주민들은 '앤'이라는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아이를 친구 혹은 다정한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저마다 성장한다.


앤의 집에 머물기가 싫어서 엉엉 울어대며 떼쓰던 루비. 심지어 앤이 목숨 걸고 나서서 루비의 집에 큰 도움을 주었음에도 철부지처럼 울기만 했다. 제발 저 애 집에만 보내지 말라며. 그런데 앤의 풍부한 어휘력과 상상력 덕분에 이야기를 짓는 즐거움을 느껴 보고, 앤이 자연스럽게 이끄는 흐름 덕분에 자신이 좋아하는 길버트를 만날 핑계도 생겼다. 일주일 만에 루비는 앤에게 마음을 연다. 첫날과는 달리 순식간에 지나간 일주일이 아쉽다고, 너를 학교에서 보면 좋겠다는 잠꼬대 같은 말. 그 말에 학교에 영영 가지 않겠다던 앤의 마음도 녹아내린다. 이제는 친구가 두 명이나 생겼으니 무엇이 두려울까?


애번리 사람들에게 앤이 낯설었듯 앤도 애번리 사람들이 낯설었다. 다만 과거와는 다른 변화가 생길 거라는 기대와 약간의 압박감에 가려져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 앤이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주변이 다시 앤에게 영향을 미친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고, 주기도 전에 받기도 하는 관계의 즐거움을 앤이 오래도록 느꼈으면 한다. 많이 웃고, 많이 울고, 많이 성장할 앤의 앞으로가 기대된다. 여운을 느끼려고 시즌1 끝에서 멈추었었다. 이 글과 함께 시즌1을 보내며, 이어질 앤의 여정을 따라가 보련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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