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련을 남기며 살아가고, 누군가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 연극 '죽음의 집' [공연예술]

죽음의 집에서 돌아보는 생의 의미
글 입력 2020.05.2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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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에는 연극 <죽음의 집>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집에 모여든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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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호의 집에는 어쩐 이유 에서인지 죽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분명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육체가 있었고, 춤도 추고 술도 마시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들은 그럼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이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시작한다.


황상호의 집의 시간은 멈춰 있다. 그가 벽시계의 건전지를 빼버린 이후부터였을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였을 수도있다. 동욱이 상호를 방문한 시각은 11시 52분, 그가 ‘나갔다 들어온’ 시각도 11시 52분.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이 멈춰 있는 이 공간은 고여 있다는 표현이 마땅할 만큼, 기다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의 법칙을 무시한다. 그래서 죽은 이들의 만찬, 이야기, 춤까지도 가능했다. 미련만 남은 이들을 기다려주는 유일한 공간.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시간의 흐름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순간 순간의 시간을 지각하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흐른다. 그 시간 속에 우리는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을 흘려보내기도 하고, 나의 인생을 바꿔버릴 기회를 흘려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이 ‘죽음의 집’은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게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전하지 못했던 것, 해보지 못했던 것을 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미련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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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은 그 1차적인 죽음을 맞이한 이후 어리 둥절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모습이다. 문실은 살고 싶지 않다. 사는게 의미가 없어 살고 싶지 않다. 의미를 찾아 사는 것이 아니라 악착같이 얻어낸 것들을 지키기 위해 마지못해 사는 것 같다. 영권은 삶이 구속 같다. 그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어 자유롭게 살지 못했다.

 

1차적인 죽음 이후의 두 사람의 모습은 극명히 다르다. 영권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있는 행새를 하자고 한다. 앞으로는 자신이 못해봤던 것을 하고 살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한다. 문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 삶으로 돌아가도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고, 모든 걸 어떻게든 해결해주리라 믿었던 죽음은 삶과 다르지 않았다. 삶에 대한 끝을 가장 먼저 생각한 건 문실이었다.


두사람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달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권은 죽음 앞에 서서야 시간의 소중함을 인지했다. 어쩌면 더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시간을 더 의미 있게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문실은 살아있는 동안의 시간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 아등바등 했지만, 결국 빈껍데기였던 자신의 시간 앞에서 문실은 죽음으로써 모든걸 포기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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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문실이 가장 먼저 상호의 집을 ‘나갔다.’ 시간이 흐르는 바깥에 나간 문실은 죽어있는 자신의 육체를 마주한다. 놀라 다시 자신을 기다려주리라 믿었던 상호의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상호도, 동욱도, 영권마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문실이라는 존재는 잊혀 지지 않았으나, 자신을 문실로 인지하지 못하는 세사람의 모습에 문실은 비로소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결국은 떠나야 하는 존재. 세상에 기억으로 밖에 남을 수 없는 존재.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가혹한 죽음 앞에 문실은 다급히 약을 찾는다. 그 약은 의미 없는 삶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을 이어 가기 위해 꾸역꾸역 먹던 것, 문실의 삶에 대한 미련이다. 결국 문실은 인정한다. 자신은 완전히 죽었고, 떠나야 한다. 상호의 집안에 약통을 두고 문실은 떠난다. 문실의 미련만이 집에 남았다.


다음은 영권이었다. 방금 들이닥친 이상한 여자(문실이었던)에 대해 생각하던 그는 이끌리듯 상호의 집을 ‘나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땐, 마찬가지로 상호와 동욱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도 완전한 죽음을 마주한다. 그에게 완전한 죽음은 준비도 없이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제서야 두고 가야할 존재들이 마음에 맺힌다. 다시 한번 생이 주어진다면 지키고자 했던 것. 바로 자신의 아이들이었다. 동욱의 전화를 빌려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 말은 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떠나야 한다. 그는 파우치를 두고 떠난다. 동욱에게 처음 건낸 명함이 들어있는 파우치는 그가 ‘생’에서 지키고자 했던 ‘명성’이라는 미련이다.

 

죽는다는 것은 이렇듯 준비를 했더라도, 하지 못했더라도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운 일이다. 죽음 이후의 행동으로는 더 이상 기억되지 못한다. 생전의 미련을 죽은 이후에 이루었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기억해주지 못한다. 어쩌면 완전한 죽음은 목숨을 잃는 순간이 아니라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생을 이어가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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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상호와 동욱은 혼란스럽다. 상호를 두고 ‘죽지 않은 상태의’ 동욱은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 돌아온 그는 이 말도 안되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그제서야 제대로 마주보게 됐다. 바깥의 시간은 영권과 문실을 기다려주지 않았고, 자신의 친구 상호도 언젠가는 저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 애써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상호에게 죽음의 집에 계속 있을 것을 권한다. 적어도 시간이 멈춘, 미련만이 남은 공간이라도 이 곳에 있으면 그가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상호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은 새로운 삶이 아니라, 새롭지 않더라도 그저 삶을 이어 가고 싶다. 하고 싶은 대로 못해도, 내맘대로가 아니어도, 살아가고 싶다. 영권과 문실처럼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닌 그에게는 삶을 끝낼 준비가 좀처럼 쉽지 않다. 동욱은 이 집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행새를 하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호는 말한다. “그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 그들의 1차적인 죽음은 삶도 아닌 죽음도 아닌 그 가운데, 생사의 중간이었다. 미련을 털고 죽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할 수 있는 곳. 상호의 미련은 술에 담겨있다. 그가 그리스에서 사와서 동욱과 마시려고 했던 술. 상호는 죽고나서 외로웠고, 가장 먼저 생각 난건 동욱 과의 연관이었다.


그의 미련은 술에 담겨있지만, 진정한 미련은 동욱이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욱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그의 집에 불러들일 수 있었다. 결국 상호는 집을 떠난다. 그의 미련인 술 한모금을 남기고. 영권의 미련없이 술을 모두 먹고 오라는 말은 지키지 못했다. 그는 동욱이라는 미련 또한 집에 남겨놓고 나간다.

 

*

 

다시 돌아온 상호를 동욱은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동욱에게 미안하다. 미련 밖에 없는, 고여 있는 상호의 집에 살아있는 동욱을 붙잡아 둔 것이 미안하다. 그는 상호가 다시 죽음의 집을 찾을 때까지도 몇날 몇일을 그 집안에 있었다.  어쩌면 삶이란 그렇다. 죽은 이들은 미련 없이 떠나도, 그들이 남긴 미련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때로 너무 아프다.


그럼에도 살아가야하는 이유가 있다면, 누군가는 그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속에서는 죽은이들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상호는 묻는다. 언제까지 계실건가요? 언제까지 미련 속에 갇혀 살 것이냐고 들린다. 마지막 술 한모금을 ‘황상호’ 앞으로 달아놓은 그는 떠난다. “사는게 너무한 것 같아요.”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동욱은 그 후 일어선다. 황상호의 미련이었던 술 한모금을 마시고, 그의 미련을 삼킨다. 벽시계는 다시 걸어두었다. 다시 상호의 집에도 시간이 흐를 것이다. 그는 바깥을 향해 나간다. 삶의 향해 나간다. 상호의 미련을 삼키고, 그럼에도, 살아간다. 기억 속에서 살아갈 상호를 위해서, 그리고 훗날 자신을 기억해줄 누군가를 위해서.

 

 


죽음에 대하여



이 연극은 그날 온통 내 하루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무거운 여운을 남겼다. 사실 그 여운이 너무 무거워 처음에는 너무 가혹한 시나리오 라는 생각을 했다. 동욱이 상호의 미련을 삼키고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나 또한 언젠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미련을 삼키고 그들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 기억 속에서 밖에 존재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지고 살아야 하는 삶이 무서웠던 것 같다.

 

그보다 더 이 연극이 버거웠던 이유는 죽음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시간이 어떻게든 해결해주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 이후의 장면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이 생에서의 마지막은 결국 죽음이고, 그것에 이르러서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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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선택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죽음에 대해서는 그 시기를 택할 수는 있지만, 죽음 자체를 선택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는 싫어도 살아야 하고 싫어도 죽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은 살아야 한다면, 또 죽어야 한다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미련 없이 사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 않을까. 모든 미련을 다 풀진 못해도 적어도 죽는 순간의 미련의 무게가 무겁지 않도록. 그리하여, 나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무거운 미련을 삼키고 살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삶은 마지막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한다. 그 끝이 없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없다면 영원히 이어지는 삶속에서 그 무엇도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고, 그 무엇도 가치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언젠가 끝이 나야 하고, 그것이 이어지는 동안 절박해야 한다. 살아가는 모든 시간을 정성을 다해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조금씩 보따리 가득한 미련을 해결해가며 살아야 한다. 죽음의 순간이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져 죽음의 집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으려면 말이다.

 

여태까지는 생각도 하기 싫었던 죽음이라는 순간이 내게 다가온다면, 나는 죽음의 집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일 동안 원없이 책을 읽고 편지를 쓰고 못다한 이야기를 한 다음 최대한 가벼운 미련을 남기고 떠나고 싶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며 살아가줄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나를 기억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내가 너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너무 오래 그 집에서 고통을 삼키지는 말아줘. 대신 그 시간을 너를 기억할 다른 이들을 위해 미련 없이 살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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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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