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 종이에 손을 베였다

글 입력 2020.05.16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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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정말 생각도 못 한 상황에 놓일 때가 간혹 있다. 당혹감에 이게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싶을 때 말이다. 그런 상황을 마주 할 때면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지럽게 흩뿌려진 A4 용지를 가지런하게 정리하다 갑자기 손가락이 아파서 보니 베여 있을 때 같은 경우다. 월리스의 글을 읽는 동안 나는 에세이로 내 심신을 베였다.

 


 

설탕인 줄 알고 넣었는데 소금이었으나 의외로 맛이 나쁘지 않았다


 

‘축제’와 ‘시골’이라는 단어는 듣는 우리로 하여금 활력이 넘치고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화목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절로 그리게 만든다. 서로를 때어 놓고 봐도 이토록 사람 냄새 가득한 풍경을 그려낼 물감으로 월리스는 여름날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느껴지는 습하고도 숨이 막히는 공기와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에 간혹 찾아오는 진상 손님이 선사하던 인류애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내 마음속에 그려냈다.

 


축사의 높은 열기 때문에 수많은 돼지가 모로 누워 혼미한 상태로 괴로워한다. 깨어있는 돼지들은 꿀꿀거린다. 돼지들은 낮은 울타리 안 아주 깨끗하고 큼직하게 뭉친 톱밥 위에 서 있거나 누워있다. 몇몇 거세된 돼지들은 톱밥과 제 배설물을 함께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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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시골 농가에서 키우는 가축을 돌보거나 먹이를 주면서 삭막한 도시에서 벗어나 숨이 트이는 휴식을 묘사할 것이 분명하지만 월리스는 퍽이나 감사하게도 수고스럽게 좁고도 빽빽한 도시가 선사하는 질식에서 벗어나 높은 하늘과 뻥 뚫린 시야의 농촌 속 축사에서 느낄 수 있는 숨 막힘을 구태여 알려준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대비로 보다 확실하게 불편한 그림을 생생하게 안겨주는 이런 문장력이 월리스의 글이 가진 매력이다 싶지만 이 불편함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한편으로는 이 불편함으로 인해서 더 끌리는 글로 다가온다. 이렇듯 다소 삐뚤어진 태도가 나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꽃밭에서 뛰어노는 사람을 보면 꽃밭을 밀어버리고 싶은 뒤틀린 심성이 나라는 사람의 특성이니 꽤 신빙성을 가진다. 꽃밭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피 튀는 전장이 보이지만 애써 꽃에만 시선을 고정하는 이들을 나는 참지 못한다. 그렇기에 월리스의 예상 밖의 에세이에 베인 내 마음은 상처를 입었다기보다는 체한 속을 뚫어주려 피를 뽑아내는 한 방의 침과 같다.

 


그의 2007년판 머리말이 근래의 것들과 비슷하다면 그는 자신이 찾는 에세이에 대해 아주 개괄적으로 “기술에 대한 자각, 사유의 힘을 보여주는 문학적 성취를 담은 에세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중략) 구체적인 질문은 구체적인 답을 요구하고 그러면 더 많은 질문이 발생하는 등 끝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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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하게 계산된 사고 회로에서 도출된 이 답변은 월리스의 가치관을 비롯한 모든 것을 함축한 농도 짙은 한 잔의 에스프레소처럼 내 문학적 미각 세포를 자극한다. 더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 어딘가 뒤틀린 것 같은 나에게 다가온 윌리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에 대한 찝찝함을 해결한다.


그는 이 세상과 사회가 얼마나 보이는 것과 대중적인 것에 미쳐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던 탓에 허를 찌르도록 미묘하게 뒤틀린 시야를 안겨준다. 소금 커피 같은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커피를 마시면서 짠맛을 떠올리지는 않기에 이 맛이 왜 여기서 느껴지나 싶지만 먹다 보면 점점 손이 가는 그런 맛이 있는 글이다.

 


 

인생의 멀미


 

멀미는 시각 정보와 평형감각 사이에 혼란이 생길 때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분명 내가 보는 풍경은 움직이는데 평형감각을 관장하는 내 신체의 기관들은 아니라고 하니 서로 충돌이 일어나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나에게 오는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만 터져 나간다. 신체 기관이건 사람이건 사건이건 간에 충돌과 혼란이 생기는 상황이 언제나 힘들다.

 


월리스는 세상 거의 온갖 것에 '어지러움'을 느꼈던 사람이다. '인생 멀미'를 달고 사는 통에 곧잘 창백한 얼굴이 되어 현기증을 호소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이 멀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 멀미를 유발하는 세상 속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었다. 미치광이 같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지면서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려고 하는 태도, 그러면서도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월리스가 글쓰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한 일말의 '진실'인지도 모른다.


 

‘인생 멀미’라는 네 글자는 나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배나 비행기를 타는 경우라면 내리면 그만인데 인생 멀미는 인생을 하차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답답할 지경이다. 물 위를 떠 다니는 뱃멀미를 이겨내려고 바닷속으로 뛰어들면 몸이 젖기는 해도 멀미는 안 느낄 것이기에 월리스는 세상이라는 바다로 떠난 것인가 싶다.

 

‘떠나다’는 말은 모순적인 동사다. ‘여행을 떠나다’는 문장에서는 여유와 휴식처럼 푸근한 느낌을 주면서도 ‘그 사람은 나에게서 떠났다’는 문장은 참으로 쓸쓸하고도 외로운 느낌을 가져온다. 월리스의 떠나다는 아마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 특유의 삐딱한 시선에서 애정이 담겼다는 느낌은 없었다. 세상을 떠나다 못해 떠밀어 내는 지경이 아닌가 싶을 정도니 내 기준에서는 확실하다.

 

다만 그 ‘떠나다’와 ‘떠밀다’가 묘하게 매력적이다. 지나가던 아무개 한 명이 갑자기 나에게 ‘야, 이 X신아’라는 욕설을 퍼부으면 그 얼굴에 주먹을 퍼부어 주고 싶기 마련이지만 욕쟁이 할머니라는 간판을 내건 식당에서 할머니에게 먹는 욕이나 내가 불편을 느끼던 대상을 신랄하게 찔러대는 욕지거리는 속을 후련하게 만든다.


월리스의 ‘그 사람은 나에게서 떠났다’의 ‘떠나다’는 외롭고도 차가우면서 욕쟁이 할머니의 욕과 같은 매력을 풍긴다. 제대로 해내려고 하지만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담긴 이 모순 덩어리의 문장력은 알게 모르게 다시 한번 월리스의 글을 찾게 만든다.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는 것은 부정문에 not을 첨가하여 긍정이 되게 만드는 복잡한 문장처럼 떠나는 것에서 떠나게 만들어 다시 돌아오게 만든다.


 

 

도서 정보


 

입체.jpg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이다희 옮김


288쪽


15,000원


138*214mm


출간일 2020년 4월 17일


ISBN 979-11-89932-53-4 (03840)  


분야 : 문학>에세이

 


[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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