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난에 대해 말하기, 영화 '기생충'

글 입력 2020.05.0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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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흑백판이 개봉했다. 본래 2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잠정 연기했는데, 4월 29일부터 국내 특별 상영을 시작했다. 기생충 흑백판은 기존 개봉판과 내용과 편집은 차이가 없이, 장면마다 콘트라스트와 톤을 조절해 완성했다. 흑백판 역시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고, 해외 각국에서 이미 개봉하는 등 반응이 좋다. 곧 기생충 개봉 1주년이니 영화관에서 새롭게 다시 만나는 감회도 다를 것이다. 차이점으로 포스터의 문구가 달라졌다. 기존의 포스터는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라고 쓰여 있지만, 흑백판에는 '흑과 백, 넘지 못할 선은 없다'가 쓰여있다. 둘 다 선의 존재와, 선 넘기의 욕망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작년 12월에 기생충을 처음 보았지만,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이 불편함을 하루빨리 감상문으로 남겨야겠다 다짐한 게 오 개월 전이다.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 어느새 기생충은 개봉 1주년이 되고, 흑백판으로 다시 영화관에 섰다. 흑백의 화면에서 두 가족의 대비는 더 뚜렷할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흑백판을 제작한 이유를 "히치콕의 <사이코>처럼 우리 세대의 클래식은 흑백인 경우가 많다"라며 흑백판을 만들면 기생충 역시 "클래식에 포함될 것 같은 즐거운 환상"이 든다고 말했다. 세계 영화계의 뜨거운 반응을 보아 기생충이 이 시대의 클래식이 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그러면 이 영화에 문제는 없을까. 몇 번을 봐도 영화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던 나는 내내 재현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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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계단이 자주 등장한다. 기태 가족의 집에 도착하기 위해 내려가는 계단, 박 사장 네 집의 계단, 지하실의 계단. 인물들의 이동은 오르막, 내리막 등 수직 구조 속에서 이뤄진다. <기생충>은 이 명백한 상승-하강 구조를 중첩해 인물 간 위계를 분명하게 강조한다. 영화 내 박 사장 가족은 최상층이며 가장 높은 곳/지상에 산다. (박 사장의 아이들은 2층에 산다는 점에서 박 사장 부부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 기태 가족은 중간층이며 집도 반지하 한층에 모여 산다. 세 번째 가족인 근세 부부는 최하층인데, 고립된 지하실에서 (아내 문광과) 떨어져 숨어 살며, 가장인 근세의 상태도 영 좋지 못하다. 이런 견고한 틀은 결말에서도 이어진다. 박 사장 가족은 가장 박 사장을 잃고, 기태 가족은 가장 기태와 딸 기정을 잃었다. 근세 부부는 둘 다 죽고, 문광의 죽음은 세간에 밝혀지지 않는다.

 

기태 가족은 박 사장 가족과 가까워질수록 상승 구조에 오른다. 박 사장 집에 가기 위해 그들은 경사길을 오르고, 기태는 연교의 장보기를 도우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며, 기우, 기정은 과외를 위해 박 사장 집 이층으로 올라간다. 이런 상승은 갑자기 지하실에서 등장하는 근세로 인해 올라간 만큼 순식간에 바닥으로 치닫는다. 상승은 경사면을 따라 서서히 일어나는데, 하강은 발을 헛디뎌 지하실에 굴러떨어지는 것처럼 극적이고 자극적이다.


두 가족의 대비는 비 맞으며 끝없이 내려가는 계단의 숫자, 홍수에 잠긴 집의 상태를 통해 점점 뚜렷해진다. 이런 극적 대비에 박 사장 가족은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는다. 내려가고, 비참해지면서 차이를 공고히 하는 건 기태 가족이다. 자신만만하게 계획을 세우고, 신나게 부자의 꿈을 꾸던 기태 가족은 후반부에선 도망치고 숨기 급급하다. 급기야 결말에서 기태는 자신을 지하실에 가둔다. 근세 부부가 죽은 빈 자리에 채우는 기태와, 그런 기태를 구하기 위해 기우는 사회적 성공을 이루겠다 다짐한다. 자기가 '합법적'으로 그 집의 소유주가 될 때까지, 기태는 지하실에 갇혀 있어야 할 것이다.

 

보는 내내 의아했던 건 위치가 변하는 시선의 불균등함이다. 왜 지상의 기준이 박 사장 집이고, 가난을 말하려면 시선을 밑으로 내리는 걸까? 우리 시대에 빈부격차는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현상이다. 간극이 양방향으로 벌어지며 불평등이 심화한다.


그런데 <기생충>은 격차를 부자(박 사장 가족)에 '미치지 못하는' 기태 가족을 부각하면서 표현한다. 또한, 격차가 벌어지는 모습은 박 사장 가족은 지상에 고정하고, 기태 가족의 상황을 더 비참하게(가난하게) 만들면서 보여준다. 밑바닥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만, 바라보는 시선은 낮지 않다. 지상에서 시작한 카메라는 지하의 기태 가족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관망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하기엔 높낮이는 주관적이다. 박 사장 가족의 여유는 박 사장의 부가 아니라, 그들이 부를 이용해 고용한 이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박 사장의 집은 햇빛 잘 드는 토지뿐 아니라, 그 집을 위해 노동하는 이들이 떠받치고 있는, 땅보다도 높은 위치에 있다. 하지만 지상-반지하-지하로 이어지는 하강 구조에선, 박 사장이 땅, 즉 바람직한 정상성의 기준으로 표상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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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기태 가족을 통해 가난이 무엇인지 말하려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들의 감정선과 그 전제가 맞는지 한참 고심했다. 기태 가족이 가난하기 때문에 갖는 감정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자기 삶을 소모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박탈감을 느낀다. 자신들도 돈만 있으면 이런 삶, 이런 품위를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데 상황이 따라주질 않는 것이다. 정황을 보아도 사업 실패, 수능 4수, 미대 입시 준비 등의 언급이 나오는 거로 보아 기태네 가족이 항상 이런 위치(궁핍한 생활)에 있던 게 아니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운 나쁘게 밑바닥에 굴러떨어진 기태 가족은 '다시 한번' 여유로웠던 삶을 누리고자 상승을 욕망하지만, 자신의 범죄와 근세 부부로 인해 더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지는 서사이다.

 

하지만 기태 가족이 느끼는 것처럼 이들의 위치는 바닥에 있지 않다. 물적 자원이 아니더라도, 이들에게는 비가시적인 재산이 존재한다. 부잣집이라는 사다리를 올라갈 기회가 있고, 사모님을 속일만한 그럴듯한 교양을 흉내 낼 수 있으며, 가족 전원 백수가 일시적으로나마 가능한 사람들이다. 가족 구성원이 다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기태 가족의 감정 중에서 내게 가장 괴리감이 들었던 건 이들의 선망이었다. 충숙은 "부자니까 착한 거야"라고 말하며 자기에겐 없는 여유를 부러워한다. 자신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청결, 지위를 기태 가족은 감탄하고 그에 못 미치는 자신들을 부끄러워한다. 박 사장이 기태를 무관심하게 묘사하는 것과 달리, 기태 가족은 하나같이 부자인 박 사장 가족을 꿈꾸고 탐낸다. 게다가 자기들을 스스로 바퀴벌레라고 칭하는 걸 보며 이 영화의 시각이 어디를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나는 내 경험과, 돈 때문에 고생하는 무수한 사람을 가까이서 본 바 돈은 없을지언정 이런 식으로 자기 처지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벌레가 아니고, 대개 죽어라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돈 때문에 심신이 고달프면 자신의 노동을 사는 사회와 구매자들에 대한 분노, 불만, 냉소가 생기지, 선망이 생기진 않는다.

 

이 세상에 진정 가난한 자가 따로 있고, 그런 사람들만 가난을 보여줄 수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약자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이 영화에서 빈자가 부자를 바라보는 감정은 일방적이고, 유순하다. 왜 누구도 박 사장을 조롱하고, 무시하고, 그의 발언에 화내지 않을까? 조롱과 반감, 무시는 하위 계층이 가진 힘이자 특징 중 하나인데 말이다. 감정이 한 방향인 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계층 간 대립에 대해 함구한다. 대신 계층 간 서열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대립이 제대로 보이려면 양쪽 다 칼을 쥐어야 하고, 선망만큼이나 같은 양으로 내재한 분노도 보여줘야 한다.

 

마지막에 기태의 살인이 분노 비슷한 걸 드러내지만, 이는 쌓인 분노에 의한 고의가 아닌 우발적 살인이고, 기태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데다가, 이 행동으로 인해 기태는 징벌적 결말을 맞이하니 이 행동이 권력자를 향한 약자의 분노를 보여줬다고 하긴 힘들다. 오히려 이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박 사장의 발목을 잡으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연쇄는 영화 속에서 계층 간 피해와 가해의 구조를 확실히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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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격차는 권력의 차이로 인한 착취와 배제가 문제라는 점에서 인종 차별, 여성 멸시와 일맥상통하는 불평등 문제다. 경제적 착취 없는 차별은 없다. 생물학적 차이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그 기형적인 착취가 불평등에 기초한다는 점이 자주 잊힐 뿐이다. 백인 주인집을 위해 노동하면서도 그런 인물이 되기를 선망하고, 그 과정에서 같은 하위 계층인 다른 흑인과 칼부림을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기만이지 않은가.


권력자가 착취하는 대상이 권력자의 부류에 속하고 싶어 안달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괴상한지 나만 느끼는 걸까?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평은 내게 가난의 궁상맞음과, 그 가난을 멸시하는 우리의 시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가난은 기태 가족의 비극성을 강조하고, 자신의 불행, 못남에 대한 원인으로 기능한다. 가난은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을 냄새나게 하는, 모멸감이 들게 하는 흠결이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흠결에 코를 쥐어 잡는 박 사장은 기태에게 살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가난은 정말 흠결일까? 가난은 반지하의 냄새이고, 홍수에 모든 걸 잃는 것이며, 계획 없이 우발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무력하게 있는 것일까? 여성이 자신의 여성성은 흠결이라 생각하고, 흑인이 자신의 검은 피부로 인한 박탈이 괴로워 백인을 죽이고 지하실에 자신을 가두는 이야기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니 박수를 보내야 할까? 계층의 불평등 문제가 이런 식의 약자성과 크게 다른 맥락에 있을까? 여성은 남성보다 가난하고, 흑인은 백인보다 가난하다. 빈부는 권력의 문제다. 다만 유동적이고, 심신이 지쳐있기 때문에 굳이 빈곤층으로 자신을 정체화하지 않고 살 뿐이다.


가난이 무엇인지 말하려면, 기회의 부재, 경제적 결핍으로 인한 외로움, 육체의 고단함과 분노의 경험 역시 말해야 한다. 하지만 기태 가족은 자신의 흠결이 부끄러운 나머지 지하실에 자신을 가두고, 상류층의 언어를 얻고자 다짐한다. 그나마 가장 하류층인 근세 부부는 죽은 데다가 죽기전까지 박 사장에게 깍듯이 충성한다. 가난한 사람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직접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인물은 없다. 작가는 관찰자의 시선 너머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사회적 불평등의 관계를 다루면서도 이런 발 빼기 식의 중립을 유지하는 게, 얼마만큼 공정할까?

 

볼수록 의아한 점은 계층의 위계-서열은 판결을 내리듯 명백하게 보여주면서, 계층 간의 관계, 특히 엄연히 존재하는 착취의 구조는 비가시적인 영역에 넘겨버린다는 것이다. 취업 시의 이력과 문서는 사기일지 모르나, 기태 가족은 확실히 계약한 수준의 노동을 박 사장에게 제공했다. 영화 <기생충>의 제목이 중의적 의미를 품고 있다 한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충숙의 '바퀴벌레' 발언처럼 누가 기생충인지 영화는 중점으로 보여주는 계층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 사장 가족이 기태 가족에게 어떻게 기생하는지는 암시되지 않는다. 정당한 대가(돈)를 지불하는 돌봄 노동은 기생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다. 돈으로 사람을 고용해 청결, 안전, 교육, 교양 모든 걸 얻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상성-예의의 기준을 착취 대상에게까지 상정해 선을 지키라 명령하는 게 얼마나 강제적인지에 대한 고찰은 보이지 않는다. 고용에 대한 돈을 지불했다면 이 정도는 정당하다는 시선은 보이는데, 박 사장 가족은 영화 내에서 확실히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빈부격차는 양방향 아닌가. 왜 기괴함은 하위층만의 것인가.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마냥 선한 사람도 마냥 악한 사람도 없다"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약자(빈자)는 선하고 강자(부자)는 악하다는 언더도그마를 잘 비틀었다는 평을 보며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영화는 누가 선한지는 말하지 않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그에 의한 징벌적 결말은 확실하다. 기태는 근세가 없는 지하실에 스스로 들어가 갇힌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선악의 문제였던가? 이건 불공정함의 문제다. 왜 같은 시간을 일하고도 받는 돈은 그렇게 차이가 나는가. 같은 상황에서 내가 다른 계층이었다면 느끼지 않았을 감정을 왜 나는 느껴야 하는가. 왜 우리는 같은 인간인데 삶의 가능성과 기회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의 문제인데, 이게 도덕적 옳고 그름에 따라 이들의 윤리성을 보여주는 식의 재현과 일맥상통하는지 의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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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차에 따른 박탈을 다루면서도,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자를 향한 증오, 조롱,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풍자는 왜 나오지 않을까? 시선은 말했다시피 위에서 아래로 향할 뿐인데, 그러면서도 중점은 주인공의 가난이다. 그 가난도 상투적이고 노골적인 것. 반지하, 냄새, 벌레 같은 소재로 표현된다. 이런 요소 역시 가난이지만, 가난에는 그보다 더 많은 맥락이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희생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돈이 있었다면 절대 내주지 않았을 것들을 돈을 벌기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다. 그건 가정의 화목, 아이들의 교육, 예의범절, 사랑, 명예,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자존심, 건강 같은 것들이다.


<기생충>이 시작할 땐 박 사장뿐 아니라 기태 가족도 이런 요소의 대부분을 아직 갖고 있다. 행운이다. 영화 후반부에 기태 가족은 저 중 대부분을 잃지만, 이는 경제적 궁핍 때문이 아닌, 영화 전개상 그들이 저지른 실수와 욕심 때문이다. 그러고도 기우는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부자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결정을 통해 현실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이들의 ‘애처로움’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한다. 내게는 이 애처로움이 불쌍함의 다른 말처럼 느껴진다. 유순한 기태와 근세 가족은 계층 사다리에서 아무리 발로 차여도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이 구조에 반발심을 갖지 않는다.

  

약자라고 꼭 선하고 옳은 위치에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권력 차이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를 쓸 때, 어떤 대상을 우습게 하기 위해선, 그만한 섬세함이 필요하지 않은가? <기생충>의 풍자 대상은 일방적이지는 않지만, 중점적으로 빈민층이며, 이들이 가난이라는 명목 아래 안일하게 살아가려는/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습을 꼬집는다. 이 안일함을 비판하면서도 이들의 애처로움을 강조한다는 게 웃기지는 않고, 언짢다. 권력 관계가 분명한 상태에서 약자를 풍자하는 건 조롱이 아닌가? 이들은 부당한 재현에 반박할 권력이 없다. 영화는 누구를 희화화하고 있나, 광대처럼 뛰어다니고 지저분해지고, 자신의 맨몸을 전시하는 대상은 어느 계층의 사람인가. 이 냉소가 과연 양방향인가.

 

객관적으로 현실을 정확하게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런 식의 재현을 택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적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창작자건 관객이건 모두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재현한다. 완벽한 중립, 기계적 중립은 있을 수 없는 이유다. 그러면 이 영화의 시선은 가난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재현하는가.

 

이런 질문을 하면서도 가난이 무엇인지 나조차 알 수 없어 사전의 정의를 찾아보았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여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 있다.' 가난은 돈이 부족해 생기는 괴로움이다. 이 시급한 존재의 괴로움. 여기에 박탈감, 선망이 들어갈 틈이 얼마나 있을까.

 

영화는 가난을 영화의 자극성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정작 카메라의 시선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해 몸과 마음이 괴롭'지 않았음이 보인다. 이 모순을 코미디라 생각하고 웃어줘야 하나. 한번 웃고 나면 가난에 대해 더 나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때도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좋아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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