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취향, 그 애매한 이름에 대해 [사람]

글 입력 2020.04.28 16:5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취존’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다소 주류에서 빗겨갔다고 하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고 날 즐겁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게 곧 취향이고,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의미다. 남의 취향을 격하시키는 무례함을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만큼 많은 각광을 받았다.

 

2020년 현재 ‘취존’을 부탁하는 표현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느 정도 사회적 디폴트로 자리잡은 담론이 되었기 때문일까? 각종 광고 카피에서는 ‘취향템’이라는 표현으로 소유욕을 자극하고, 넷플릭스에서는 나의 취향에 딱 맞는 작품을 추천해불 수 있다며 자신한다. 이제 취향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는 성역이 된 듯한 느낌도 든다.

 

가끔은 이 취향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취향의 실체를 고민하는 것이다. 내가 자주 접해왔고,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콘텐츠들. 보통 그런 걸 취향이라고 부른다. 자주 접해서 어떤 건지 잘 알고,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매니악하게 들이판 적이 있는 분야들이다. 언제 보아도 재밌는 데다가 더 이상 이걸 좋아하지 않는 때는 오지 않을 것만 같다.


 

shaun-of-the-dead-54.jpg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사람의 취향은 대체로 가변적이어서, 오랜 시간이 흐르면 다른 걸로 갈아타게 된다. 바로 그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아차렸는데, 그토록 좋아했던 <새벽의 황당한 저주>가 더 이상 날 흥미롭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약간의 불쾌감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에드가 라이트의 작품과 사이먼 페그를 좋아하고, <몬티 파이튼>시리즈 같은 영국식 병맛 코미디는 나를 웃긴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열광하지는 않는다.

 

이런 걸 절감할 때마다 나를 구성하던 일부가 시들어버린 듯한 아쉬움을 떨쳐낼 수 없다. 때론 그냥 좋은 기억으로 남겨뒀어야 하는 취향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상실된 취향이 분명 한두 개가 아닐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퀸덤>을 보기 전까지 나와 여자 아이돌이란 취향으로 따지면 천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사이였다. 60~70년대의 록 음악과 컬트 무비, 그리고 K팝 걸그룹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몇몇 팀의 훌륭한 무대를 감상하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특히 아이돌의 뮤직비디오에 얼마나 많은 미장센이 등장하는지 알게 되면서 문화예술계에서 서로 완전히 무관한 콘텐츠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21세기 K팝 아이돌 산업에 연관된 프로덕션들은 상당한 문화적 지식을 보유한 이들일 것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들은 그런 양분을 자신들의 작품에 녹여낸다. 고전 영화를 오마주한 장면을 아이돌 뮤비에 삽입하면 그런 작품을 단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Z세대 아이돌 팬덤도 영향을 받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취향이라는 건 그렇게 고집스럽게 지켜낼 존재는 못 된다는 말이다. 나에게 있어 취향은 넓혀나가고 바뀌어나가는 것이다. 봤던 작품을 두번 보는 일이 별로 없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같은 기회라면 새로운 걸 직접 확인하고 싶다. 책을 읽을 때도 국내 문학을 한 권 끝냈으면 일반 교양서적이나 해외 고전 문학을 집어든다. 음악을 들을 때도 실패할 리 없는 롤링 스톤즈를 한 번 더 듣기보다, 이름도 생소한 신인 팝 아티스트의 곡을 들어보기도 한다. 같은 것만 반복하고 같은 시야에 갇히고 싶지 않아서 하는 내 나름의 작은 노력이다.


 

다운로드 (1).jpg

 


가끔은 왜 꼭 그래야 하냐는 의문도 든다. 얼마 못 사는 인생, 내가 당장 끌리는 것들에만 집중하면서 살 수도 있지 않나? 맞는 말이다. 난 여전히 여러 가지를 정열을 다해 좋아하며 한 번 뭔가에 빠지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다. 그런데 그렇게 새롭게 열광할 수 있는 것도 내가 넓고 다양하게 콘텐츠를 접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가끔은 내가 질색하는 로맨스 장르의 영화를 굳이 골라서 보기도 하는데, 그런 시도로 인해 건져올린 작품이 바로 <원스>, <이터널선샤인>, 그리고 <비포 선라이즈>라는 명작들이었다. 하마터면 내 선입견으로 인해 그냥 지나칠 뻔한 훌륭한 작품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동은 정말 추천할 만하다.

 

취향의 지평이 넓어진다는 즐거움 말고 다른 이유도 있다. 그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시야를 갖지 않기 위해서다. [구매] 뱃지도 없이 서평으로 악플을 남기는 사람이나, SNS에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혹평 하나만 보고 작품을 거르는 사람이나 결국엔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당연한 말이지만 부도덕한 제작자의 자본이 들어간 작품을 보이콧하지 말자는 맥락이 아니다. 다만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작품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과 남의 평가만을 믿고 넘어가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말이다. 관람자들의 마음 속에 의도적으로 도덕적 혼란을 주는 작품을 접할 때면 관람이 끝나고 나서도 던져진 질문이 내 안에 계속해서 맴돌게 된다.


이러한 훈련이 계속될 때면 이해할 수 없던 견해가 다르게 보이고, 나와는 다른 관점을 포용하는 능력이 조금은 길러진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본적으로 그 정도의 관용을 갖춘 뒤에야 사회적 합의라는 것도 가능해지는 게 아닐까. 이 마저도 전혀 먹히지 않을 만큼 상자에 갇혀있는 이들이 이끌어가고 있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 사회가 ‘취향 존중’을 넘어서 ‘취향 넓히기’ 붐이 불었으면 좋겠다. 이미 왓챠 같은 플랫폼은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방법이지만, 누구든 최대한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컬렉션을 공유하는 서비스가 더 많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취향은 감싸고 보호하기보다 자유롭게 풀어줄 때에 더 성장하는 법이니깐 말이다.



[한민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