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묘한 삶의 맛 -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 [영화]

글 입력 2024.03.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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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으로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 이청준, <벌레이야기>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를 감상하고 떠오른 이청준 소설의 한 대목이다. 사람으로서 가야 하는 길,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 그 길목에 클레오가 있다. 인간이기에 걸을 수 있었던 그녀의 걸음과 시선에 주목하여 여러 번 영화를 관람했다.

 

 


'껍데기'로의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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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는 분주한 파리 풍경 안에서 살아가는 클레오의 90분을 조명한다. 클레오는 타로로 점쳐진 죽음을 통해 ‘실체 없는 불안’에 휩싸인 채로 그 첫 번째 걸음을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울을 보며 말한다. "아름답다면, 난 다른 이들보다 살아있는 거야." 노골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녀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 안에서 클레오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려 노력한다.


대상화되는 자신을 위안 삼으며, 시선을 받는 자의 위치에서 얻을 수 있는 위안을 누리고, 그 아름다운 신체 안에 존재하는 혼자만의 어두움은 숨긴 채로, 클레오는 죽음이라는 불안을 잊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껍데기’로의 도피는 쉽지 않다.

 

 

 

참을 수 없는 감정에서 시작된,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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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로의 도피도 잠시, 어느 순간 클레오는 자기 안의 어둠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는 그 눈은 아주 진솔하다. ‘아름다움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로 잔인한 겨울 속에 버려진 나는 빈껍데기일 뿐이에요. 당신 없이는, 당신 없이는 절망에 갇힌 채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자기 안의 어둠을 노래를 통해 직면해버린 클레오는 화려한 흰색 드레스 잠옷과 가발을 벗어 던지고 거리로 나선다.


어두운 검정 드레스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미신을 신봉하던 몇 시간 전의 클레오는 오히려 미신을 걸친 채로 거리에 등장한다. 이제 아무렴 어쩔 것이냐는 체념의 얼굴. 피할 수 없는 자기 안의 어둠을 마주해 버린 클레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체념의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고, 돌연 모두에게 화를 내며 소리치고, 무턱대고 집 밖을 뛰쳐나간다. 그 불안정은 체념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빈껍데기에 주목했던 사람들에게 분노했고, 그로부터 위로받던 자신에게 분노했다.


타인으로부터 시작되어 클레오에게 다다른 시선은, 결국 클레오 본인이 본인을 가두는 속박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주는 의미가 무겁게 느껴진다. 대상화될 수밖에 없던 인간이 결국 자신이 대상화됨을 지지하고, 최악의 순간 그곳을 안전지대라고 생각하여 그곳으로 회피하게 되는, 그런 파멸적인 행동에 마음이 쓰였다. 그녀의 분노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사실로써 회피할 수 없는 자기 안의 어둠에 절망하면서도 그녀는 모두에게 화가 난다. 분노, 절망, 억울함과 같은 감정들은 온데 뒤엉켜 클레오를 휘감는다.


클레오가 피할 수 없는 건, 사실로써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비롯된 존재론적 고민이다. 죽음을 받아 들고 생을 돌아보며 하는 주마등과 같은 자기 성찰에서 인간은 아마, 그저 도망치듯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사실로 존재하는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적 행위인 ‘걷기’는 클레오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참을 수 없는 나의 존재에 대해, 피할 수 없는 나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저 걸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행위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감정에서 시작된 그녀의 두 번째 걸음은 불안정 그 자체이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 '진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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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걸음에서 만난 사람들은 분주한 파리의 풍경 안에 존재하는 불특정 다수이다. 절망적인 클레오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낯선 이들의 대화, 거리 위의 괴인들, 노골적인 시선들. ‘껍데기’로서 시선 받는 입장에 있던 클레오는 이제 거리 위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준다.


이 순간 클레오의 시선은 이제껏 껍데기로 존재하던 자신에게 다가오던 노골적 시선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주한 거리 위의 분주한 풍경은 클레오에겐 그저 바라봄의 대상이다. 카페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클레오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 같기도 하다.


나의 괴로움을 참을 수 없어 뛰쳐나온 세상 위에서 마주한 것들은 나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 시선을 받는 자였던 클레오는 이제 주위에 시선을 준다. 카메라 또한 그녀로부터 시작된 시선을 포착한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클레오의 시선, 클레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시선이 교차된다.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그 자리에서, 클레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우리와도 함께 같은 시간 위에 존재하고 있다.

 

 

 

타인과의 대화로 열리는 또 다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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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의 세 번째 걸음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은 그 전의 걸음에서 지나친 타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클레오와 가까운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다. 클레오가 거리를 뛰쳐나온 후 만나게 되는 친구 도로시는 클레오와는 다른 인물이다.


미신을 믿지 않고, 신체가 전부라고 여기지 않으며, 벌거벗은 자기 모습보다 벌거벗은 자기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이 느끼는 어떤 것에 주목하는 사람. 자기 안의 사고보다 자기 밖의 사고가 더 익숙한 사람. 자기 안의 사고에 갇혀 있던 클레오가 도로시를 만나며 자기 밖의 사고를 하는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 나에겐 전부였던 ‘껍데기’를 그저 ‘껍데기’로만 바라보는 사람. 클레오는 도로시를 통해 자기 밖의 사고가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거리의 타인인 앙투안. 앙투안은 아주 낯선 타인임에도 클레 오와의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다. 도로시와의 만남 이후, 공허한 마음으로 공원을 걷던 클레오는 앙투안을 만나게 된다.


평소라면 말도 섞지 않았을 사람이지만, 이렇게 공허한 마음으로는 무엇이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클레오가 앙투안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 이 부분은 어떤 측면에서 운명적으로 느껴진다. 서로가 서로밖에 없는 텅 빈 공원, 내가 나의 고독에 괴로워할 때에 마주하게 된 사람. 복귀라는 현실을 앞두고 클레오를 마주하게 된 앙투안의 마음도 클레오 와 비슷한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클레오가 마주하는 사람의 범위를 점점 좁혀간다. 그렇게 내밀한 감정을 유도하게 하고, 다양한 시선과 가치관을 마주하게 한다.

 

 

 

위로와 비슷한 맛의 안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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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한 아름 가지고 나선 그 거리 위에서, 클레오는 그저 걸으며 세상과 어떤 것들을 교환한다. 교환하고 공존한다. 불안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은 세상과 만나는 그 과정에서 옅어진다. 여기서 인상 깊었던 것은, 이전까지 클레오로 향하던 시선/혹은 클레오가 바라보는 대상에 주목했던 카메라가 클레오가 무언가를 바라보는 그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버스 밖 풍경이 계속해서 움직이듯, 클레오의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인다. 변화하는 세상과 그 안에 존재하는 변화하는 클레오. 클레오는 결코 지나가는 풍경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그대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포착할 수도 없고, 그저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는 클레오의 시선이 마음에 아주 오래 남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위로와 비슷한 맛의 안도감이 든다. 그렇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맛이다. 정확히 그게 어떤 감정인지, 그것을 어떻게 명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상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클레오가 자신의 ‘껍데기’를 인식하고 느끼는 복합적인 불쾌의 감정,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가도 다시 매달리게 되는 것들, 거리에서 마주치는 나와는 아주 다르기도 비슷하기도 한 타인들.... 그것들은 정확히 ‘어떤 것’이라고 언어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클레오의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감정처럼, 나 또한 그녀의 행위를 통해 ‘어떤’ 위로를 받았다. 그것은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행적을 리얼타임으로 진행하여 나와 그녀, 그리고 모두가 이 시간 안에 공존한다는 점일 수도 있겠고, 그녀의 90분을 보고 있으면 나도 그 안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며, 시간이라는 흐름 안에서 교환되는 시선의 연속이 세상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 같은 믿음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운명이라는 압도적인 사실과는 다르게 내가 할 수 있는 의지적인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예를 들어, 걷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안도감인지, 위로인지 모르겠는 그 맛. 그 모호한 맛은 영화의 저변에 깔린 삶의 단면과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클레오의 마지막 대사는 이것을 깨달은 한 인간의 선언 같다. 영화 후반부, 의사로부터 병의 진단을 받은 클레오의 얼굴은 평온하다. 이제 아무렴 질병 같은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녀가 보낸 90분의 시간은 그녀가 살아온 영화 이전의 시간과는 밀도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90분이라는 시간 안에서 얻게 된 어떤 것, 클레오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에게만 매몰될 수도, 타인에게만 맡겨질 수도 없는 인간인 우리는, 사실이 아닌 과정의 겹으로써 삶을 만들 수 있다.


영화가 끝난 후 우리에게 남아있는 30분은 무엇일까. 운명과 의지, 사실과 의미, 결국엔 존재와 행복에 관한 이야기까지 생각해볼 수 있었던 90분이었다.

 

 

[차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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