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리송한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면. (3) 표절과 예술의 한끗 [시각예술]

표절의 작가라 불리는 리처드 프린스와 그의 대표작 말보루 맨을 소개한다.
글 입력 2020.04.25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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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보며 많은 이들이 '저건 나도 하겠다.' '요즘은 뭐든 미술이냐'와 같은 반응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미술이란 무엇인지, 현대미술이란 무엇인지,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관객이 의무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나면 현대미술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에 대해 그리 쉬이 평가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 필자는 앞서 두 차례에 걸쳐 현대미술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글을 작성했고 그간의 이야기를 아주 간략히 요약하자면 현대미술은 형식과 내용의 일치화이며 작가의 의식 형태가 곧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로는 여전히 아리송할 것이기에 현존하는 현대미술 작가인 리처드 프린스와 언제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그의 대표작을 소개하고 현대미술의 측면에서 이를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는 누구인가?


 

리처드 프린스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상경했다. 그가 뉴욕에 와서 가장 먼저 취업한 곳은 어느 잡지사였는데 학력이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편집실에서 이미지들을 스크랩하는 것뿐이었다. 스크랩 일은, 다른 잡지들의 이미지들을 오려서 유사한 것끼리 분류하는 작업이었는데 리처드 프린스는 이 일을 하다가 이미지들 사이의 공통점을,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었을 때 작동하며 의미를 지니는가를 스스로 깨닫고 돌연 미술가가 되었다.


배우지 않고 홀로 깨달았기 때문일까 그의 작품을 볼 때면 온전한 미술가라고 부르기엔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충실히 드러내고 있기에 우린 그를 현대 미술가라고 지칭하게 되는데, 그 석연찮음 때문에 지적재산권, 표절의 문제가 끊임없이 그의 꼬리표로 따라다니며 예술과 모방을 넘나드는, 표절과 거짓말의 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Marlboro & Marlboro man


 

말보루맨.jpg

 


오른쪽 사진이 바로 리처드 프린스의 대표작이자 전시와 동시에 저작권법 소송에 휘말리게 되면서 그를 일약 Rephotography 스타 작가로 만들어준 '말보루 맨' 이다.


말보루 맨은 왼편에 보이는 기존 타 잡지의 말보루 광고를 확대해서 그대로 찍은 작품인데, 사진의 원작자는 리처드 프린스를 상대로 지적재산권 침해와 관련해 소송을 걸었고 승소하여 리처드 프린스는 벌금을 물어준 이력이 있다. 우리가 말보루 맨을 통해 논의할 수 있는 주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저작권 위반이란 무엇이며 리처드 프린스는 저작권을 위반했는가? 둘째로, 리처드 프린스가 기존의 사진을 다시 찍었다면 그 사진은 어떠한 가치를 갖는가? 이다.

 

두 주제는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기에 사실상 질문은 두 개지만 답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표절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작가의 의식 형태를 먼저 이해해야 하고 작가의 의식 형태가 담긴 말보루 맨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원작인 광고가 먼저 설명되어야 하기에 순서대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Marlboro - 과거와 당시의 카우보이


 

말보루 광고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하고 단순하게도 담배를 팔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담배가 아닌 말보루 담배를 팔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결과, 카우보이 이미지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왜 카우보이 이미지를 통해 말보루 담배를 사게 되는 걸까? 아마 말보루 담배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이 카우보이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어떤 멋있음'과 상통했기에 말보루 담배를 사고 피우는 것이 의미 있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럼, 카우보이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광고가 촬영된 시기가 1980년대인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당시의 카우보이는 어떤 존재였을까? 1980년대의 카우보이는 텍사스 깡촌에서 주말이면 펍에서 술을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거나 산골 오두막에서 혼자 말을 타는 다소 찌질한 모습의 인간상이었다. 그 당시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007가방을 들고 다니며 금융업에 종사하는 뉴욕 월가의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 1980년대의 카우보이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도태된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보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우보이 이미지로 광고를 했고 광고 속 카우보이는 현실과는 달리 당당하고 기품 있는 자태를 보여주었다.

 

왜? - 대다수의 사람에게 있어서 카우보이란 것은 실제 카우보이가 아닌 이미지로 가지고 있는 카우보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 또한 카우보이를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카우보이에 대한 이미지는 모두 갖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 바로 서부개척시대의 카우보이 영화를 많이 접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서부개척 영화에서의 카우보이는 주로 보안관 혹은 사람을 지켜주는 정의의 사도로 등장하고 굉장히 마초적인 방식으로, 총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곤 한다. 이는 일종의 히어로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캡틴 아메리카, 스파이더맨 등과 같은 오늘날의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들과는 구분된다. 오늘날의 히어로들은 히어로가 히어로의 위치에 있음으로써 히어로가 되지만 카우보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카우보이 영화의 결말은 대부분 지는 석양을 배경으로 싸움에서 한쪽 팔을 잃거나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며 혼자 외로이 석양 속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의 히어로적 행적을 누구도 찬양해주는 이가 없어 외로운 늑대처럼 혼자 묵묵하고도 담담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떠한 감정을 유도할까?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했다는 것과 뭔가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폼을 잡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우아해 보일까? 쉬운 예를 들자면, 애인과 함께 걷다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당신이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고 잡아주는 상황에서 '어때, 내가 문 열어줘서 좋았니?' 하는 애인이 멋있어 보일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가는 애인이 멋있어 보일까?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카우보이도 그렇기에 매력적이다. 팔을 하나 잃었어도, 다리를 절어도 당당하고 담담하기에 멋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멋있음은 궁극적으로 내 존재를 나 스스로 긍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카우보이 영화에서 대부분의 카우보이는 홀로 움직이는데 혼자라는 것은 외로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카우보이는 외로움을 정면으로 맞서 자신의 천성인 양 행동하기에 외로움이 마치 적극적인 고독처럼 보이고 자신감처럼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멋있어 보이는 인간이 고독을 씹을 때 연상되는 것이 바로 담배이다. 고독은 씁쓸함과 함께 하는데 말보루 담배의 맛이 주는 씁쓸함과 고독을 연결했기 때문에 이러한 광고가 가능해진 것이다.

 

여기까지가 기존 광고의 영역이었다. 그렇다면 리처드 프린스가 이를 다시 찍었을 땐 무엇을 찍고자 한 것일까?


 

 

Richard Prince - 환상과 의식의 괴리


 

우리는 다시 한번 그 시점을 기억해야 한다. 리처드 프린스가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1980년대, 당시라는 것이다. 카우보이가 멋있는 시대가 아님에도 카우보이로 광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서부 영화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에게 카우보이가 멋있는 이미지로 인식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환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현실이 아닌 '허구'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보루의 카우보이 광고가 가능했던 이유는 현실과 의식 사이의 뒤틀린 괴리 때문이었고 리처드 프린스는 이를 발견했기 때문에 작품이 된 것이다.

 

리처드 프린스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우리는 '환상은 환상일 뿐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환상은 환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우리는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현실을 살아간다고, 진실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현실이 아닌 머릿속에 있는 환상을 원동력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이 또한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현실을 마주하고 나와 현실과의 관계를 정립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의무가 있지만 전도된 세계와 몽상 속에 살면서 행위도 그러한 방식으로 생겨나기에 우리의 삶은 진실과 멀며 삶이 얼마나 허망한 허무에 기초하고 있는지 삶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리처드 프린스는 지적재산권을 침해하였는가?


 

처음 카우보이를 촬영했던 원작자는 카우보이를 찍기 위해 앵글을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리처드 프린스는 카우보이를 표절하기 위해 앵글을 잡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식을 찍은 것일 뿐.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지적재산권 침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이것이 지적재산권 침해라면 사진작가는 그 무엇도 찍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촬영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은 누구에게든 지적 재산권이 있는 것일 테니.

 

비록 판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원작자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예술을 공부하고 향유하는 우리 관객은 이에 대해 다시금 담론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강안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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