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선에 걸리다 심연까지 닿아버렸던 이에 대한 기억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시선에서 기억에 이르기까지
글 입력 2020.03.3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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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분석하는 과정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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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들의 초상>은 두 여인이 시선 속에서 주고 받은 사랑에대한 기억을 그린 퀴어영화이다.  단순히 두 여성의 사랑을 담은 영화라기엔 다소 무거운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감독 셀린 시아마는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들을 그려낸 영화'라고 이 영화를 표현했다.


영화의 배경인 18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는 여성에게 삶의 지휘권을 주지 않았다. 여성들의 삶은 정형화 되어 있었고 규정된 삶을 벗어나는 것은 용납받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 시대에 규정된 삶 밖에 존재하던 여성 예술가들은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 아래 삶을 살아가던 여성들의 용기와 그녀들의 진실된 사랑을 담아냈다. 기존의 주축을 이루던 남성들의 시선은 아예 배제하고, 관람객과 영화를 보는 이들이 순전히 120분동안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여성만의 공간을 제공하였다.

 

 

 

대상화된 여인들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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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글자 뒤에 뉘어진 그림자에는 착취당한 많은 여성들이 서있다. 엘로이즈 집에 걸려있는 그의 어머니의 초상화는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 속 다소곳한 자세와 달리 가슴 패인 드레스 그리고 화사하고 아름답지만 어딘가 단정한 표정의 대조는 '성적인 어필이 되면서도 조신한 여성'의 모습을 담고있다. 이는 순전히 남성의 시각으로 그려진 여성에 대한 판타지이다.
 
엘로이즈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아가길 거부한다. 그녀는 알고 있다. 아무리 거부해도 언젠가 결국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마리안느에게 딸의 초상화 작업을 의뢰한다. 단, 조건이 있다면 엘로이즈가 포즈 취하기를 거부하기에 그녀를 관찰해 초상화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5일간의 시간 동안 산책친구를 가장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관찰한다. 멀찍이 그녀와의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엘로이즈의 눈, 코 그리고 귀의 연골까지 찬찬히 응시하며 작품을 완성시킨다.
 


"피부색은 빛을 받아도 뺨은 돋보이게 칠한다. 더 두드러지게"



마리안느가 완성한 그림은 마치 엘로이즈의 어머니의 초상화 같다. 조신한 자세에 웃음을 머금었지만 어딘가 섹시해보이는 엘로이즈가 있다. 초상화속 엘로이즈가 과연 엘로이즈 본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리안느의 시선속에 엘로이즈의 웃음이 담긴적은 없었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묻는다.
 


"나예요? 당신이 본 내 모습은 이랬나요?"
"그게 다는 아니에요"
"그림에는 규칙과 관습 이념이 있어요."
"생명력은 없나요? 존재감도?"
"존재감이란 그저 진실되지 않은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렇지않아요. 어떤 감정들은 아주 깊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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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가 그린 초상화에 영혼은 깃들지 않았다. 그저 아름답고 사회가 부여하는 여성의 이미지에 걸 맞은 한 여자만이 앉아 있을 뿐이다. 자신의 작품에 영혼이 깃들지 않았다는 말에 어느 예술가가 분개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마리안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그 지점부터 그녀는 사실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초상화의 주인은 엘로이즈가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자신의 규칙,관습,이념 체계하에 만들어진 엉터리였음을.

 
다시 그린 그림은 일방적인 시선이 아닌 서로의 시선을 담아 완성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응시하며 알게된 그녀의 습관들을 나열하며 그녀를 간파했다는 듯이 말한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곧 마리안느를 자신의 위치에 서게 함으로써 이 상황을 뒤집는다.
 


"당신이 나를 볼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화가가 모델을 일방적으로 바라보았던 기존의 관계에서 벗어나 쌍방의 시선 속에서 서로의 관계가 재정립된다. 화가에게 단순히 영감을 주던 인물에서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조력자가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서로의 시선을 담는 초상화만이 영혼을 불어 넣을 수 믿는다. 서로의 시선을 담는 것이야 말로 평등한 관계속에서 진실된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때문이다.
 
 
 
신분을 뛰어넘은 여성들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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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지 않은 임신으로 낙태를 결심한 소피를 돕기위해 세 여성은 연대한다. 18세기 프랑스는 계급사회로 귀족과 하녀라는 계급간 차이가 그녀들 사이에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세상에서는 계급 이전에 여성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아픔과 슬픔이 있다. 생리와 임신 그리고 낙태는 비단 여성들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생리통에 힘겨워 하는 마리안느를 위해 소피는 자신의 배를 따듯하게 할 수 있는 약초더미를 천에 감싸준다.  임신한 소피를 위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같이 밥을 차리기도 하고, 소피의 선택을 그림으로 담아 아름답게 기록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소피가 낙태술을 받으러 가는 날, 그녀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동행해준다.

 
여성들의 연대 기저에는 위로와 격려가 깔려있다. 여성으로서의 살아갈 삶이 평탄치 않다는 것을 알고있기에 그녀들은 '공조'의 시선을 보낸다.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도와주겠다고 말이다. 이 연대에 남성의 시선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오로지 여성들의 시선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르페우스 신화 속 영원한 사랑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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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이 바뀌고 엘로이즈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읽고 있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이들에게 있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이 곧 추억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인간의 불안감과 의심속에서 자신의 아내를 잃은 한 남성의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독사에 물린 아내를 살리러 지하세계까지 찾아간 그는 하데스에게 단 하나의 조건을 받고 그녀를 지상으로 데리고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조건은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의 앞에 앞장서서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쉬워보였지만 그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지상의 문턱에서 뒤를 돌아보게 되었고 그녀는 다시 죽게된다.

 

 

"그는 사랑하는 그녀를 선택하기보다는 그녀와의 추억을 선택한거야. 연인으로서의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음유시인(예술가)으로서의 선택을 한거지. "

 

"아마 에우리디케가 돌아보라고 말했을거야."

 


소피는 오르페우스의 선택을 비난하며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조금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아름다웠던 사랑의 추억을 기억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고 에우리디케 또한 기억속에 담아두길 원했을 것이라는거다. 얼마 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한 때 신화 속 두사람이 사랑했던 것처럼 열렬히 사랑한다. 서로의 모습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속에 꾹 눌러담으며 함께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짧았던 그들의 사랑은 초상화가 완성됨과 동시에 마무리된다. 더 이상 엘로이즈를 보지 못한다는 절망감 때문일까. 마지막으로 안고 있던 엘로이즈를 뿌리치고 도망가버리는 마리안느. 엘로이즈는 그녀에게 뒤돌아보라고 말한다. 환상 속 엘로이즈의 모습이 그대로 서있다가 문소리와 함께 어둠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그녀들은 그 순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되어 찬란했던 사랑의 기억들을 남긴다.

 

*


최근들어 많아지고 있지만, 몇년 전까지만해도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는 찾기 힘들었다. 시대를 향유하던 영화는 곧 그 시대의 사회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얼마전까지만해도 현실 뿐 아니라 영화 안에서도 여성들만이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은 참 적었다. 미디어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 서사는 대개 사랑타령으로 제한되었다. 여성들에게 있어 연애와 결혼이 곧 삶의 이유인 것처럼, 사랑을 찾기 위해선 자아실현의 욕구는 저 어딘가에 묻어놓는 인간으로 그려놓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단순한 소울메이트 찾기 영화가 아니다. 삶에 제한에 대해 고군분투했던 여성들의 삶과 이들의 연대에 대한 기록이다. 2시간이라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여성을 위해 여성의 시각으로 그린 여성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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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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