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빛이 향하는 곳 [도서]

글 입력 2020.03.06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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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라는 실재는 형상 없이 마음에 새겨지며 천천히 흐릿해져 자취를 감춘다. 그렇기에 편집과 유기 없이 그대로 보존되는 기억이란 있을 수 없고, 멋대로 과거의 조각을 분해하여 구미에 맞게 재조립하는 일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은희경 작가의 소설 『빛의 과거』는 날카롭고 정확한 문장으로 각 인물들에게 다르게 변주된 과거를 톺아보며, 시절을 찬란하게 만들었다고 믿었던 빛의 면모를 촘촘히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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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하락하는 삶을 가만히 조망하게 된 중년의 눈에 40년 전 스무 살은 각기 다르게 기억된다. 해소되지 않는 슬픔과 다가오는 고난을 어쩔 줄 몰라 했던 유경의 미숙함은 희진에게 자기도취와 회피에 익숙한 위선으로 기억되는가 하면, 유경의 눈에 넘치도록 자기 자신을 사랑하여서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아 보였던 희진은 사실 고독과 가난, 가까운 사람들에게 받은 모욕을 묵묵히 감내해 왔다고 밝힌다.


‘다름’과 ‘섞임’의 세계에 들어온 이들에게 외모, 말투, 차림새, 걸음걸이와 씀씀이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총체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드러내지 않는 결핍과 약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더듬이가 되지만 그 또한 변주된 과거처럼 정확지 않다.

작가는 과거란 그저 ‘한 개인의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1977년 여자 대학교에 다녔던 스무살 언저리를 웃도는 여성들의 삶을 과대나 과소 없이 제시한다. 최성옥의 퇴학, 송선미의 자퇴, 곽주아의 임신, 김유경의 삶의 궤적은 못내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권리를 요구하는 성옥의 목소리는 적극적으로 입막음 당하며 결국에 자리를 지키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고, 조신하고 얌전한 여성상에 부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지운 주아는 으레 그 시절의 많은 여성들이 그랬듯이 다른 이를 위한 삶을 산다. 억압당했던 당신의 삶을 먼 발치에서 체념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경의 이야기가 내 안에서 너무도 손쉽게 연상이 되어 구체적으로 아팠다. 시대를 찬란하게 만들었던 빛은 여성들을 비추지 않았다.

허락된 여성의 역할 안에서 그들은 진정 행복할 수도 자유로울 수도 없다. 소설은 자신의 모순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맡은 배역 안을 맴돌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암울한 초상을 아프게 드러낸다.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인생 망한 여자들의 이야기’로 일갈되기도 하는 이 소설은 다층적이고 섬세한 시선으로 여성들의 삶을 드러냈고, 그걸 읽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고 아픈 일이다.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 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 (245p)

 


[곽성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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