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메모장을 공개합니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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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아이텔, Interior with Crown (King), 인테리어와 왕관 (왕)
2017, Oil on canvas, 캔버스에 유채, 60x70cm
메모장은 은밀한 구석이 있다. 특히나 요즘같이 어떤 기록이든 들키지 않게 꼭 잠가 두는 핸드폰 속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어딘가에 적어둔 것들을 남에게 들켜 얼굴이 새빨개졌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특별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미처 머리와 입이 대신해줄 수 없는 것들을 깨작깨작 적었다.
한번 더 생각해보면, 머리와 입이 한 편이었고 마음과 손이 한 편이었다. 그러니 대부분 손으로 마음을 적은 메모장을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클 수밖에. 대단한 마음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이런 메모라도. “내일 좀만 더 화이팅” 나름 은밀한 메모였다.
샤프(연필)과 종이를 고등학교와 동시에 거의 졸업하고, 노트북과 핸드폰 자판이 더 익숙해진 지금은 대부분의 메모를 저장해두고 있다. 쓴다기 보다, 정말 저장해두는 편이다. 기록한 날짜 순 대로 차곡 차곡 쌓인 메모가 많아서 이제는 분류도 해둔다. 그렇게 나의 메모는 차츰차츰 변모했다. 나름 공적이라고 할까, 그런 성격이 내 메모에 생겼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할 일을 적어둔 메모장이 있다면 예전엔 할 일을 끝내고 난 후 그 옆에 작게 스스로에게 하는 사적인 말들을 적었다. ‘수고했어ㅠㅠ’, ‘오늘은 좀…’, 가끔은 꽉 쥔 주먹 두개를 그려 놓기도 하며 날 응원해보기도 하였다. 지금은 편하게 체크리스트 기능을 활용해 적고, 체크하고, 모두 끝낸 후 말끔히 지운다.어느 날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하자. 그럴 때면 예전의 난 메모장에 하염없이 ???를 남발하며 대체 이게 무슨 마음인지 스스로 묻거나, 정말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흐름 따라 무언갈 막 적어 봤을테지만, 이젠 이런 경우가 정말 드물어졌다. 핸드폰 자판으로 물음표를 늘어놓는 들 액정화면을 두드리는 일에 그칠 뿐이다. backspace바가 있는 한 말도 안되는 소리는 바로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빈 메모장이 그 날의 마음을 대변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여전히 메모를 하고 있다’인데, 지금의 나는 어떤 메모를 하고 있을 지, 아래 분류해 둔 카테고리와 함께 살펴보자.팀 아이텔, 왕관(왕) Crown(King), 2017, 나무에 알루디본드, 22x22 cm
00월의 단상
0105단상
빳빳한 청년이 버스를 탔다. 장시간 목을 빳빳히 세웠던지 이미 경직되어보였고, 덩달아 그가 입은 셔츠와 정장 자켓, 코트까지 모두 빳빳해보였다. 모두 새 것으로 추정되는 옷차림에 그의 신발까지 시선이 닿았는데, 그마저도 새 것으로 빳빳해보였다. 아 참, 들고있던 우산까지도 주름 하나 없이 공장에서 나온 모양 그대로가 잘 잡혀있었다.
빳빳하다.. 아직은 위화감 가득한 그 모습을 계속 보기가 뭐해서 내 차림새를 보았다. 빳빳하다의 효과적인 반대말이 무엇이 있을까. 늘어져있다? 풀어졌다? 과연 나는 신입인 그보다는 편한 모양새였다.
무엇이 좋을까, 더 나을까
다만 그의 빳빳한 뒤통수를 보며 그런 생각은 해보았다. 저 힘들어간 상체에는 어디 내놓지 못한 자부심이 일단 있겠지. 그리고 퇴근길에서마저 내려놓지 못한 긴장도 있겠지.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나도 저런 빳빳함 - 신입생 때의 그 모습을 다시 갖춰보고 싶다하는 부러움도 들었다.
0120단상
거리의 악사는 시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 멈춰서서 듣지 않으면 영원히 모를 아름다운 운율. 작지만 강하게 퍼져나가는 목소리. 그래서 마침내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하는 일.
<00월의 단상> 메모는 월 별로 구성 되어있다. 사실 이 카테고리는 생성된 지 얼마 안되었는데, 가끔 꽂힌 장면이나 사람이나 생각들에 대해서 골똘히 집중하다가도 쉽게 흐려지는 것을 대비해서 만들어두었다.
인터뷰
문화라는 영어 단어 ‘컬처’(culture)가 ‘경작하다’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인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다. 독특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재미있게 일하고, 성과를 내고, 고객에게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내면 그게 문화다.” (배달의 민족 김봉진)
- 대중을 상대하는 사람으로 말과 글의 논리성은 어떻게 만들어내죠?
“솔직하게 던져요. 논리적 구성은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표현하면 저절로 따라오는 것 같아요. 없는 논리를 쌓기보다 느낌의 타당성을 찾아가는 방식이죠. 비록 유난스럽고 부정적인 해석에 놓이더라도, 판단받는게 두려워 솔직한 표현을 멈추진 않습니다.” (배우 유아인)
<인터뷰>란도 있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 중에 무얼 좋아하냐 물으면 듣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듣는 것이라면 더 좋다. 한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낸 공고한 생각들을 인터뷰에서 듣고, 메모하는 것 같다.
표현
“쉬는 것도 용기야” – 휴학 고민 중, 친구의 말
“나한테 다른 노래들은 그냥 얼음 녹은 음료수 같다” – 유튜브 옛날 노래영상 속 댓글
<표현>에는 짧은 한 문장부터 거의 한 페이지 가량의 긴 이야기까지의 다양한 메모들이 있다. 무심결에 툭 던진 누군가의 말이나, 댓글, 책 속의 한 문장 등 출처는 다양하다. 무언가 표현하려 했지만 그 표현에 그 무언가가 묻힌 듯 할 때, 그러니까 그 표현해낸 형상이 더 대단할 때, 이렇게 옮겨 적어놓는다.
*
이렇게 메모 몇 가지를 공개해보았다. 이젠 더 이상 부끄러울 일 없이 스스로 공개할 수 있는 나의 메모는 무얼 의미할까. 여전히 나의 메모장은 은밀하다. 아니, 이제는 내밀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권소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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