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추상의 직관화: 퍼커셔니스트 한문경 리사이틀

글 입력 2020.01.0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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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년 새해가 밝았다. 올 한 해는 시작부터 기분 좋은 느낌을 가득 안고 출발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년음악회를 찾아보다가 퍼커셔니스트 한문경 리사이틀을 보고 이 무대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흔하지 않은 타악기 리사이틀, 그것도 젊은 나이에 이미 교육자로서의 생활과 연주 활동을 병행할 정도로 뛰어난 연주자의 공연이라면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욕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림바 연주는 실제로 처음 듣는 기회이기도 해서 그 부분이 가장 기대됐다.

 

이러한 기대감과 동시에, 한문경 리사이틀은 여태까지 갔었던 수많은 음악회 중에서 가장 사전 준비가 어려웠던 공연이기도 했다. 주된 선율과 화음을 즐길 수 있는, 익숙한 형태의 조성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협화음만 가득한 것도 아니었지만, 음원으로만 들을 때에는 엄청난 리듬감의 에너지와 오묘하게 이어지는 음들 가운데서 길을 잃고 어느 순간 헤매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중하다가도 어느 순간 돌이켜보면 음악과 동떨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리 들어보다가 어느 시점에선 마음을 놓았던 것 같다. 원래 음악은 음원보다도 현장에서 더 많은 것을 말하곤 하니까.

 

 


 

P  R  O  G  R  A  M

 

Hyeon-min Kim (b.1966)
12 Etudes for Marimba (2013) 中
Ⅰ. Allegro leggiero
Ⅳ. Andante arioso
Ⅵ. Allegro semplice
Ⅻ. Allegro ma non troppo

 

Philippe Manoury (b.1952)
Le Livre des Claviers (1987-1988)
Ⅳ. Solo de Vibraphone

 

Joseph Pereira (b.1974)
Five Pieces for Solo Marimba (2011) *한국초연

 

Jaehyuck Choi (b.1994)
Self in Mind Ⅳ for Percussion Solo (2019) *세계초연

 

I N T E R M I S S I O N

 

Kevin Volans (b.1949)
She Who Sleeps with a Small Blanket (1985)

 

Mark Applebaum (b.1967)
Entre Funérailles Ⅱ. For Solo Vibraphone (1999) 

 

Akira Miyoshi (1933-2013)
Ripple for Solo Marimba (1999)
Ⅰ.  ... to the touch
Ⅱ. Risoluto-In Memoriam Gyorgy Ligeti
Ⅲ. Con Vibrato
Ⅳ. Slancio
Ⅴ. Sotto Voce

 


 

 

시작은 김현민의 마림바를 위한 12개의 연습곡이었다. 2013년 7월 5일, 동일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한문경의 연주로 세계초연되었던 이 작품은 에튀드답게 다양한 기교를 요구하는 곡이었다. 앙상블 오푸스의 위촉으로 작곡되어 이 작품 자체가 한문경에 헌정되었다고 프로그램 북에 나와 있었는데, 이렇게 놀라운 작품을 헌정받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자로서 이 다양한 기교와 연주 양상을 선보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게 클 지 부담감이 클 지 궁금했던 것이다. 어느 쪽이 되었건 간에, 이번 무대에서 볼 수 있었던 퍼커셔니스트 한문경의 모습은 견고했다. 말렛으로 건반을 내려치는 수많은 동작들 사이에서 집중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어 보였다.

 

이어진 필립 마누리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곡에서 퍼커셔니스트로서의 기교가 드러났다면, 두번째 선곡에서는 현대음악 특유의 추상적이고도 강렬한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드러났다. 말렛을 사용하면서도 손가락을 활용해 소리를 줄였다가 다시금 복잡하게 소리를 얽어나가는 과정은 음원으로 듣던 것보다도 놀라웠다.

 

세 번째 곡이었던 조셉 페레이라의 솔로 마림바를 위한 5곡은 기교뿐만이 아니라 마림바로 표현할 수 있는 추상의 직관화를 아주 절묘하게 담아내었다. 한문경의 스승이기도 했던 페레이라는 LA필의 수석 팀파니스트이지만 작곡도 복수전공했기에 이렇게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이 향과 맛을 자각할 수 있는 것에 흥미를 느껴 이 작품을 작곡했다고 한다. 솔직히 프로그램 북을 보기 전까지는 이 작품에 그런 배경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오히려 이 작품에 담긴 이 변화무쌍하고도 팽팽한 긴장감에 무게를 두고 이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이 최종적으로는 연주자가 마림바의 음색과 울림 그리고 스스로의 내면의 소리를 이끌어내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퍼커셔니스트 한문경이 이번 무대에서 보여준 그 놀라운 긴장감은 그가 마림바의 소리와 내면의 소리 사이에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아왔다는 반증이 아닐까.

 

*

 

1부의 마지막 곡은 화룡점정이었다. 바로 최재혁의 Self in Mind 시리즈 중 네 번째로, 솔로 타악기를 위한 작품이었다. 이 곡은 이번 무대가 세계 초연이었다. 그리고 프로그램 북을 보니, 작곡가 최재혁이 퍼커셔니스트 한문경에게 헌정한 작품이라고 한다. 최재혁은 Self in Mind 시리즈를 통해 추상적인 내면의 소리를 담아내고자 했다고 작곡의도를 말한 바 있다. 생각과 감정이 언어로 구체화되기 전의 그 단계를, 작곡가는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Self in Mind for percussion solo는 매우 섬약한 소리로 시작했다. 여러 종류의 드럼과, 비브라폰으로 보이는 건반타악기, 심벌즈 그리고 얇은 징같은 것이 세 개 매달려있는 동양적인 타악기까지. 그 사이에 선 한문경은 아주 섬세하고도 약한 소리로 객석을 환기시켰다. 찰박찰박하는 소리. 모래를 주머니에 넣고 흔드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어서 큰 드럼이 쿵. 아주 얇게 만든 징이 달린 것 같은 동양적인 타악기를 톡 하니 쳐서 나는 세미한 소리에 이어, 심벌즈를 미세하게 긁으면서 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마치 인간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원초적인 무언가를 건드린 것처럼.

 

그리고 끝없이 갈등하는 내면처럼, 다양한 드럼들의 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비브라폰의 타건 소리와 심벌즈의 소리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던 카니발을 목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주 뜨겁고 동시에 아주 차가운 무언가가 그려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끝에서, 한문경은 수미상관으로 돌아갔다. 아주 섬약하고도 부드러운, 모래를 흔드는 것 같은 소리로. 그렇게 일련의 모든 번뇌를 끝내고 이제 이 무언가를 정리하여 실체화하려는 그 순간, 작품이 끝났다.

 

아주 놀라웠다. 인상적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좋은 작품이었다. 엄청난 여운을 가져다 줄 수 있었던 마지막 대목에서 누군가의 휴대폰 소리가 울려 몰입이 깨지지만 않았더라면 더욱 완벽했을 텐데. 작곡가 최재혁도 함께 자리하여 이 놀라운 작품이 세계 초연되는 자리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순간에 휴대폰 소리가 울려퍼진 게 너무나 아쉬웠다. 그러나 객석에서의 실수와는 별개로, 퍼커셔니스트 한문경은 정말로 압도적이었다.

 

 


 

 

1부는 시작을 마림바로 하여 끝을 다양한 타악기로 맺었다면, 2부는 반대로 다른 타악기로 시작하여 마림바로 끝을 맺는 구조였다. 그렇게 맞은 2부의 첫 곡은 케빈 볼란스의 She who sleep with a small blanket이었다. 여러 종류의 드럼과 마림바로 연주되는 이 작품은,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정확히는 네 개의 봉고와 두 개의 콩가, 한 개의 베이스드럼과 마림바를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작품의 말미에 있는 짧은 코다를 제외하고는 봉고, 콩가 그리고 베이스드럼으로 거의 대부분을 연주하는 형태의 작품이다.
 
아주 빠른 속도로, 혹은 조금 숨을 고르는 듯한 속도감으로 변화를 주며 다양한 드럼들을 연주한느 퍼커셔니스트 한문경의 모습은 마치 영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똑같은 리듬감으로 몇 구간이 반복될 때마다 마치 좀전의 영상을 리와인드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타건감과 리듬감이 균일했기 때문이다. 한문경의 비르투오소적인 면모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코다에 이르러 크고 둥근 말렛으로 부드럽게 치는 타건은, 아주 희미해 거의 바람소리처럼 부드러웠다. 1부의 마지막에 이어 2부에서도 초장부터 압도되는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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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마크 아펠바움의 곡은 비브라폰으로 연주되었다. 일전까지는 속도감 있는 전개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 작품은 느긋하고 천천히, 소리 하나하나를 객석에서도 음미할 여유를 주며 진행이 된다. 비브라폰이다보니 마림바를 연주할 때와는 달리 페달링까지 해야 해서, 속도감은 덜할 지라도 연주하기에는 더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한문경은 타건 하나도, 페달링 한 번도 객석에 빠지는 부분 없이 자연스럽게 전달해주었다. 장례식이 연상되는 그 을씨년스럽고도 오싹한 분위기를 마치 환상처럼 풀어내는 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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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곡은 미요시 아키라의 솔로 마림바를 위한 리플(Ripple)이었다.이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들었을 때에는,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파문(Ripple)이 일본 정원에서 보이는 물받이 대나무 홈통(일본어로 '시시오도시')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프로그램 북을 보니, 이 작품은 훨씬 더 스케일이 큰 곡이었다. 작곡가가 지구 표면 아래의 화산과 용암 그리고 진동하는 움직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번 공연을 수미상관으로, 마림바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선곡이었던 이 작품은 정말 음원보다도 더 좋았다. 특히나 4개의 말렛으로 마림바를 내려치는 강도와 속도를 조절해나가며 다양한 소리를 표현해내는 한문경의 연주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프로그램 북의 영향이 크지만, 자연스레 땅의 움직임과 그 역동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스펙트럼이 넓은 연주였다. 마림바의 기교와 표현력까지 모두 아우르며 대미를 장식하는 완벽한 선곡 그리고 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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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무대를 마치고, 퍼커셔니스트 한문경은 객석의 뜨거운 박수를 맞아 앵콜곡을 연주했다. 바로 첫 곡이었던 김현민의 마림바를 위한 12개의 연습곡 중 10번을 연주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선곡이 정말, 너무나 좋았다. 네 개의 말렛으로 아주 부드러운 트레몰로를 끝없이 전달해주었기 때문이다. 본 무대의 마지막 작품이 파문(Ripple)이었기 때문인지, 미요시 아키라의 작품에 이어 다시금 그 일렁이는 잔물결 같은 음에 온 마음이 함께 일렁였다. 꿈결처럼 아름다운 앵콜이었다.

 

*

 

작년 하반기부터 중국에서 교편을 잡고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한 퍼커셔니스트 한문경이, 신년에 이렇게 고국에서 무대를 열어주어서 행복했다. 지금에서야 한문경의 무대를 알게 된 것이 너무나 아쉽지만, 동시에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라는 안도감까지 들었다. 신년에 들을 수 있어 더욱 아름답고 감사한 무대였다.

 

앞으로 연주와 교육을 병행해야 하는 만큼 무대에 설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겠지만, 이후에도 퍼커셔니스트 한문경의 연주를 많이 보고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추상적인 음악을 직관적으로 풀어주는 그의 연주를 들으면, 그 누구라도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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