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과 내가 영웅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10.27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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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비이성과 우연이 출몰하는 공간이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 튀어나와 인간을 당혹케 한다. 인간은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여 그것의 기원을 찾는다. 맥락과 논리로 분석하려 든다. 나는 종종 거기에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미 벌어졌기에 원인을 규명하고 이름을 붙인다. 지나가 버린 과거에서나 원인을 찾고 이름을 붙이는 시도가 가능하다. 비슷한 부류가 다음에 발생하지 않기 위한 차단의 조치겠지만, 방지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혹은 또 다른 것들이 발생한다. 나는 놀란다. 당신은 당황한다. 누군가는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원인을 규명하려 시도한다.


서사는 개연성이 성립돼야 하는 공간이다. 창작자에게 개연성은 지켜야 할 의무다. 말이 돼야 한다. 허구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의 비현실성마저 내포하는 허구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우연적 전개는 창작자의 게으름이다. 당연하게도, 관계와 흐름을 우연으로 치부하는 전개에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말이 돼? 라는 반문과 함께. 독자나 관객은 왜 개연성에 천착할까. 현실은 이해 가능의 영역이라는 착시 때문이다. 현실에서, 당혹스러운 것들이 튀어나와 놀라는 순간은 그때뿐이다. 그것이 내 일상과 무관하고, 무관할 거라는 감각이 있다. 뉴스에 놀라는 건 먼발치에서 희귀동물을 관찰할 때 드는 감정과 유사하다. 실감이 없다. 내가 발 딛고 선 현실 세계는 오직 인과가 작동하는 세계여서다. 같은 현실이어도 다른 현실이라 받아들인다. 자기 사위의 현실은 이해 가능한 인과로 이뤄졌다는 착시는 서사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것 역시 이해 가능해야 한다.

 

대중은 영웅 서사를 열광적으로 소비한다. 마블은 어벤져스 한편으로 2조의 수익을 냈다. 개연성의 잣대로 보면 영웅 서사는 말도 안 되는 서사의 전형이다. 애당초 현실에 영웅이 있을 리 없다. 잘생기고 능력 좋고 선한 의지로 충만하고 주먹질 한 번에 사람 얼굴을 뭉갤 수 있는 초월적 성향의 개인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다.


그럼 ‘왜’냐는 질문이 부유한다. 개연성을 중시하면서 왜 영웅 서사를 소비하는가. 현실에서 또한 영웅의 출몰을 바라는 마음? 그럴지도 모르겠다. 악행을 저지르고도 정당한 징벌이 집행되지 않는 세상임은 누구나 안다. 분노가 누적된다. 목소리가 튀어나오는데 정작 그 목소리만큼의 실천이 이뤄지는 세상이 아니란 것도 누구나 안다. 그래서 언제나 분노가 고여 있고 정당한 정의를 성취하는 영웅 서사의 히어로에게 심취하는 걸까.


그것만으론 지금의 히어로 신드롬을 온전히 설명 할수 없다. 루이 알튀셰는 주체 구성론을 설파했다.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구성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대중문화에서 유효하게 작동한다. 개인이 영화나 광고를 접할 때 카메라의 특정 시선과 자기의 시선을 동일시한다. 그럼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가 공고히 전파된다는 것이다. 가령 백인 남성 중심의 영화에 여성과 소수인종이 열광하는 까닭은 “그들 자신이 영화 주인공의 백인 남성적 시선에 동화돼 백인 남성적 주체를 가지기 때문이다.”주체 구성론에 따르면 우리는 영웅서사를 소비함으로써 영웅의 시선을 내재화한다. 내재화된 영웅 주체는 현실 또한 서사처럼 권선징악이 집행되리란 착시를 자아낸다. 이 착시의 기운을 지속해서 체감하고 싶기에 영웅 서사를 소비한다는 맥락은 지금의 열광적 영웅 서사 유행을 온당하게 설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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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성전>을 지금 읽으면 촌스럽다. 용왕의 아들이나 인간의 몸을 빌어 출생한 소생은 평범한 인간과 차원이 다르다. 태어난 지 몇 해 되지 않아 문무에 능통하다. 부모가 죽고 거리를 떠돌지만,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승상에 의해 거리의 삶에서 구제된다. 이승상은 소생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려 한다. 왕부인과 이승상의 아들의 반응이 오히려 상식적으로 여겨졌다. 신분이나 정체를 보장할 수단이 없는 소생은 그들에겐 떠돌이 거지에 불과하다. 떠돌이 거지를 집안 딸과 혼사 지으려는 이승상을 이해 못 함이 당연하다. 집안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는 이승상은 독재자고 마냥 이승상의 의견을 따르는 소생은 비열하다. 영웅도 영웅다운 면모가 보여야 영웅이다. 그러나 소대성전은 소생이 영웅이고 주인공이어서 선악 구도를 빠르게 설정한다. 이승상이 죽고 왕부인과 아들은 소생을 죽이려 한다. 눈엣가시 같다고 죽이려 드는 왕부인과 아들은 절대적 악으로 상정된다. 비열했던 소생은 순결한 희생자 혹은 다시 시련을 마주한 영웅 정도로 재편된다. 그들이 보낸 자객을 죽이고 이승상 집에서 나온 소생은 조력자에 의해 구원받고 문무를 연마한다. 조력자 또한 눈 마주침 정도만으로 소생의 진가를 알아낸다. 또 몇 해가 지나 나라가 오랑캐의 침입에 위태로워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소생은 전장에 나간다. 그동안 연마한 문무와 도술로 오랑캐를 무찌르고 나라를 구한다.


소생은 거리낌 없이 국가를 위해 출전했다. 그는 스스로 묻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으니 이 위기를 해결해야 함을 당위적으로 감각한다. 그는 스스로가 타인과 다른 존재임을 안다. 스스로가 영웅임을 안다. 영웅은 당연히 국가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그래서 영웅이다. 알튀셰의 주체 구성론으로 <소대성전>을 보면 독자는 영웅인 소생의 시점에 동화되며 영웅의 논리를 장착한다. 당대 역시 오랑캐가 판치는 시대였으니 오랑캐를 무찌르는 소생은 독자에게 권선징악의 집행자다. 현실에서 구현되기 어려운 권선징악을 소생의 시점으로 감각한다. 동시에 거기 깔린 지배 이데올로기도 체화한다. 나라의 백성은 맹목적 충성심으로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를 각오를 해야 한다는.


<소대성전>은 다양한 이본이 있을 만큼 대중의 기호에 부합하는 서사였다. 그 기호는 그저 권선징악을 감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발로, 정도로 뭉뚱그려질 수 있을까. 알튀셰의 주체구성론은 대중의 다양한 취향을 지나치게 획일화한다. 그리고 대중의 수준을 과소평가한다.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모든 대중이 주인공의 시점에 동화되지 않는다. <소대성전>을 읽고 국가에 충성하는 소생 같은 인간이 돼야겠다, 고 느낀 인간이 몇이나 될까.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 하는 현실을 잊기 위해 <소대성전>을 독서한 인간이 다수일 거라는 예상은 무리한 예상이 아니다. 그것이 활자 혹은 영상을 통해 인위적으로 가공된 것임을 아는 상당수의 민중이 있었다. 그의 이론에서 대중은 허구와 현실의 괴리를 파악하지 못하여 피동적이다.


<소대성전>은 재미있어서 소비됐다. 그뿐이다. 취향과 기호를 분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재미있다, 는 문장 하나로 눙침이 가능하다. 알튀셰는 대중문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만 규정한다. 우리는 대중문화를 소비하기 전에 어떤 대중문화를 소비할지 선택한다. 선택은 즐길만한 이야기인가가 먼저 고려된 이후 이뤄진다. 우리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의 완결을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일 뿐이다. 1996년 경제학자 아서 드 바니와 데이비드 윌스가 1980년대 영화 300편이 어떻게, 또 왜 흥행했는지 분석했다. 결론은 ‘별 패턴이 없다’는 거였다. 데릭 톰슨이 집필한 <히트 메이커스>에서 대중문화 메가 히트작의 흥행을 분석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인용했다. 이 연구도 그 중 하나다. <히트메이커스>가 내린 결론 역시 아서 드 바니와 데이비드의 연구와 동일하다. 데릭 톰슨은 “문화시장은 카오스 그 자체”라 말한다.


그럼 지금의 히어로 신드롬은 일견 이해 가능하다. 신드롬의 이유는 없다. 재미있으니까. 그게 전부다. 대중에게 선택받기 위한 수많은 서사가 있다. 대중은 거기서 재미있어 보이는 걸 가름해내면 된다.


수많은 영웅 이야기가 활개 치는 와중에 대중의 주목을 받는 건 영웅 서사의 전형을 답습하지 않는 이야기다. 마블은 영웅들의 세계관이 이어져 있다는 전제를 최초로, 또 완벽하게 보여줬다. <데드풀>은 영웅 같지 않은 영웅이다. 그는 구강 히어로라 호명된다. <다크 나이트>의 영웅과 악당은 철학적으로 사유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웅이야기는 <로건>이다. 세계를 구하고 인류를 구원했던 울버린의 말년이 얼마나 초라한지 보여준다. 그는 통증에 시달린다. 시종 술에 절어 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리무진 기사로 일한다. 영웅은 특별한 부류지만 그래봤자 현실에 발 딛고 서 있기에 인간과 마찬가지다. <로건>은 유난히 울버린의 주름과 상처를 드러내는 장면이 많다. <로건>이 특별한 건 누구나 무기력할 수 있음을 환기했다는 점이다. 마블과 <데드풀>과 <다크 나이트>와 <로건>은 전형적 영웅 이야기와 달라서 생존할 수 있었다. 지금의 영웅 서사는 기존 영웅 서사와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흥행을 유도한다.


<소대성전>이 촌스럽다고 느낀 건 전형적이어서다. 소생은 태생적으로 선한 의지를 부여받는다. 뭐가 옳고 그른지 당위적으로 느낀다. 술 먹고 흙바닥에서 나뒹구는 털북숭이 영웅도 본 마당에 소생 같은 영웅이 재미있다고 느껴질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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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브레이커블>은 전형적 영웅 서사를 비튼 최초 격의 영화다. <식스 센스>를 감독했던 M 나이트 샤말란이 연출했다. 2000년에 개봉했다. 전반적으로 호평이었지만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도 많았다. 흥행은 성공적이라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데이빗 던은 필라델피아 행 열차 사고에서 생존한다.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해 131명이 사망했는데 그는 타박상도 없었다. 그는 뉴스에 오르내린다. 데이빗에게 프라이스란 이가 방문한다. 프라이스는 선천적으로 약한 육체를 가졌다. 흠집 정도의 상처에 뼈가 부러지고 넘어지면 휠체어를 타야 한다. 나 같은 인간이 세상에 있듯이 나와 대척점에 있는 만화의 히어로 같은 인간도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을 신앙처럼 믿는 이다. 데이빗은 헛소리냐 반문하지만 그를 만나는 횟수가 잦아진다. 데이빗은 경비업체의 직원이고 감각만으로 얼마나 위험한 인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데이빗의 감각이 정확함을 목격한 프라이스는 데이빗이 자기가 믿던 그런 부류의 인간이라 확신한다. 프라이스는 설득한다. 당신은 공간을 지키고 사람을 구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 당신은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건 육감이나 짐작 따위와 차원이 다르다, 당신은 모두가 사망한 대형사고에서 살아남았다. 이것들이 당신이 영웅임을 증언한다.


데이빗보다 경이로운 건 프라이스였다. 세상엔 분명 영웅이 있다, 는 이데올로기를 성전의 교리처럼 체화한 그는 데이빗이 정말 영웅인가 의심해도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오차가 있을 가능성은 염려하지 않는다. 육체의 장애를 타고난 그는 멀쩡한 인간에게 평생 경멸의 대상이었다. 약자여서, 어떤 이도 믿어주지 않고 여태껏 증명된 적 없는 사상을 전도사처럼 떠들어서 경멸받았을 거다. 그것이 몇 십 년 누적되면 인간은 보통 포기하거나 체념한다. 프라이스는 모욕의 역사에도 굴하지 않는다. 자문하지 않는다. 그는 기어이 데이빗을 납득시킨다.


데이빗은 아침에 눈을 뜨면 스스로가 마모돼 가는듯하다고 느낀다. 그 상실감 때문에 가족과도 소홀해졌다. 그는 프라이스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의 순간을 기억해낸다. 그는 차 충돌 사고로 미식축구 생활을 포기했지만 아내를 만났다. 그는 사실 충돌로 인해 다치지 않았다. 운동선수 생활은 몸의 해악으로 귀결될 거란 아내를 위해 거짓말했다. 그는 운동은 유한하지만 사랑은 무한할 거라 믿었다.


데이빗은 태생적으로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 의지가 실천되기 위한 수단으로 단단한 육체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피해 본 인간을 구하고 악인을 징벌한다. 그는 영웅이 된다.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 인정한 순간에야 그는 예전의 상실감을 떨친다.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언브레이커블>은 자신의 기원을 찾는 전형적 영웅 이야기처럼 보인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따위의 대사 한마디로 영웅의 선한 의지를 단숨에 규정하지 않음은 인상적이다. 가족과 프라이스와의 드라마를 통해 유유히 따라간다. <언브레이커블>은 데이빗이 ‘어떻게’ 영웅이 되는가에 천착하는 영화다. 그것이 전형적 영웅 이야기의 외견을 갖는 건 선한의지를 가진 영웅이 있다, 는 영웅 서사의 전형적 전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브레이커블>은 결말지점에서 영웅서사의 전형성을 선회한다.


데이빗은 프라이스에게 고맙다고 전하러 간다. 프라이스는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말한다. 드디어 당신 같은 인간을 찾았다, 내가 어떤 인간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며 웃는다. 열차 이탈 사고를 일으킨 건 프라이스였다. 열차 사고 이전에 대규모 인명 사고를 일으킨 것 역시 프라이스였다. 그는 당신으로 인해 나의 존재의의를 자각했다고 말한다.


프라이스가 왜 영웅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신봉했는지가 그제야 파악된다. 그는 유리 선생이라 불렸다.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육체였다. 그는 장애인 혐오의 시선에 평생 시달렸다. 자신의 육체를 무용한 것이라 폄하했다. 그러나 그가 인명사고를 유발한 건 자기 모욕의 역사를 징벌하기 위한 복수심 같은 게 아니다. 그는 ‘존재의의’를 말한다. 약한 육체는 사유할 시간을 늘려줬다. 그는 자신에 대해 사고했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에서 제 몫을 한다. 제 역할을 한다. 그럼 이 육체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역할은 악행을 자처하여 자신을 은폐하고 있는 영웅이 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해야 함이다. 그의 사유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언브레이커블>은 영웅 서사의 고정된 전제에 반문한다. 선한 의지를 갖는 영웅의 출몰이 자연스러운 거라면 왜 그 반대는 없냐는 물음이다. 영웅이 자명한 감각으로 선함을 수행하는 것처럼 악당 역시 당위적으로 악행을 벌인다. 영웅이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다면 그건 악당도 마찬가지다. <언브레이커블>은 영웅의 기원을 찾는 동시에 악당의 존재의의를 말하는 영화다. 데이빗의 서사인 동시에 프라이스의 서사다. 그래서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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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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