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SF는 스타워즈만 있는 게 아니었다 下 [도서]

인간의 이야기, SF 이야기.
글 입력 2019.09.0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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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정말, 정말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저번 주에 외계인한테 납치를 당했는데, 이 사실을 말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도 된다며 집에 내려다 주었다. 아무도 못 믿는 걸 외계인도 아는 듯했다. 외계인은 책 한 권을 건네주곤 다시 어디론가 떠나갔다.


왜 날 잡아갔느냐는 질문에 책의 '걔들 몸은 고깃덩이래'를 읽으라고 했다. 내가 이 책으로 뭘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저번 주에 올라간 'SF는 스타워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중' 편을 보여주었다. 하! 난 그런 글을 쓴 적도 없는데! 외계인들은 인내심 넘치게 내가 글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린 뒤에 下편을 이어 적으라고 협박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구를 없애버리겠다고. 나는 이미 中편을 다 읽었기 때문에 내 눈앞의 외계인은 평화주의자이며 지금 하는 말이 허풍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이어 적겠다고 대답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어쩌면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지구를 구한 영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의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준다. 대부분 전쟁이 일어난 시점 이후인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미친 몰리에게 복숭아를', '뱀의 이빨', '조슈아 삼촌과 그루글맨', '클리어리 가에서 온 편지', '다른 종류의 어둠', '슬픔의 카드', '탄젠트', '링컨 기차', '폐품 수집', '위대한 이별' 중에서 '뱀의 이빨'과 '슬픔의 카드', '위대한 이별'을 제외한 7가지 이야기는 모두 전후나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과학이 발전한 미래가 긍정적으로 그려지기보다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모습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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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과학이 발전된 미래랑 유토피아처럼 그려졌기 때문이다. 기근도, 가난도 없이 인간은 취미 생활을 즐기며 살 수 있고 모든 궂은일은 로봇이 하는 미래. 초등학생의 시점이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중학생,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기계의 발달 때문에 오히려 궂은일을 하던 사람이 지금까지도 소리소문없이 죽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간은 과거를 기반으로 미래를 상상하기 때문에 공상 과학 소설이더라도 장래가 그리 밝진 않은 모양이다. 가난, 빈부 격차, 노동, 아동학대,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반대로 그런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고 나아가는 사람을 그리기도 한다.


짧은 식견으로 SF는 뛰어난 기계가 보조를 해주는 상황에서 외계인과 싸우거나, 혹은 기계와 싸우는 둥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처음 단편 소설을 읽었을 때는 다소 의아하기도 했다. 이게 왜 SF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펼친 지금은 알 것 같다. 과학이 발전한 시점, 지나치게 발전해서 오히려 쇠퇴해버린 시점에서 과학이 인간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고, 인간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생각하는 장르다. 물론 재미도 있다. 소설이니까.


자, 그렇다면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어떻게 녹여냈을까. 장편 소설도 아닌데 말이다. 가끔은 4장으로 끝나는 소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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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몰리에게 복숭아를'. 거대한 탑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빈익빈 부익부가 거리를 더욱 넓혀 부유한 층 사람들은 탑 위에서 매일 파티를 벌이고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먹으며 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복숭아 하나를 찾기도 힘들다. 탑을 기어오르고 내리며 물자를 이동시키는 일을 하는 주인공은 신선한 복숭아가 먹고 싶은 미친 몰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탑 위층으로 올라가 복숭아를 얻는다. 부유층 사람들은 기어오른 주인공을 꼭 벌레 보듯이 경멸하고 죽이려고 한다. 물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사람도 있지만, 호의일지 호기심일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하필 몰리의 생일은 복숭아가 나올 시기가 아니었다. 주인공이 가져다준 복숭아는 과일이 열리지 않을 시기에도 먹을 수 있도록 얼린 복숭아였다. 미친 몰리는 기뻐했을까? 전혀.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다. 소설 속 어디에도 전쟁이 일어났다거나, 빈부 격차가 커진 사회라는 둥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글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의 세계관이 어떤 이야기보다 더 확고한 걸 알 수 있다.


'뱀의 이빨'은 책 속에서 가장 독특한 이야기 중 하나다. 부모와 자녀가 합의로 이별할 수 있다. 부부가 혼인하고 이혼하고 재혼하듯이 법원에서 신청해 이별하고 새 부모님을 찾을 수 있다. 소설에 나오는 부부는 경찰로, 아이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아이를 위한 계획을 세워둔다. 자식은 개성을 억압하고 권위적이며 자식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고 착각하는 부부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들은 새 아이를 찾기 위해 클럽에 찾아간다. 클럽에서 만난 소년은 매우 잘생기고 영특하나, 부모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기에 이별 당한 아이였다.


현대 사회에서 부모의 잘못이든 자녀의 잘못이든 서로를 상처 주고 괴롭혀도 서로에게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을 계약적 관계로 만드는 발상이 참신하다. 원한다면 단기적 계약을 맺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영구적으로 가족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선 영구적인 가족을 꾸리는 일이 드문 것처럼 표현되어있다. 지금은 자연스러운 가족 제도도 현대 사회 현상, 문화의 하나일 뿐이다. 언제나 절대적인 건 없다. '뱀의 이빨'에 나오는 가족 형태는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아동 학대는 줄어들 것이고,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걸 이해해야 한다는 둥 스트레스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가족 형태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한 가지 상황을 재미있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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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글 맨'에서는 알지 못하는 상황을 마법이라고 믿어버리는 현상에 대해 잘 얘기하고 있다. 지나치게 발전된 과학은 마법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전염병이 도는, 비교적 과학이 덜 발전된 공간에서 그루글맨이라는 종족이 침입하며 일어난 일을 말한다. 적절한 반전과 힘 있는 이야기로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다른 종류의 어둠' 역시 독특한 작품 중 하나였다. 수학으로 사람들을 공격하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수학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다른 어둠을 만들어 아이들을 보호한다. 소설은 사람을 보호한다는 건 반대로 사람을 믿지 못하거나 억압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보호의 대상이라고 믿어왔던 아이들은 제 힘으로 무시무시한 수학의 공격을 이겨내고 어른들에게 인정받는다. 조너선을 지키기 위해 완전한 합의 없이 빼앗아간 세상 일부를 다시 돌려준다.


주인공 조너선은 어떤 느낌일까. 아마 수능이 끝나고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의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새로운 상황이 펼쳐질 때, 그게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고 평범한 것이더라도 아름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해 질 녘 노을처럼.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소설에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어둠에 나오는 이야기와 다를지라도, 수학은 항상 나를 공격했으니까.


'클리어리가의 편지' 소설의 시작 전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어떤 편지가 일 년 뒤에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내용은 같지만 세상이 바뀌었을 때. 정말 말 그대로의 이야기다. 일 년 전에 받았다면 평화롭고 낙천적으로 읽혔을 편지가 세상을 핵폭탄이 뒤덮은 후에는 읽는 사람들의 침울하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이야기로 바뀐다. 과거의 좋았던 기억이 현재를 발목잡기 때문이다. 편지의 존재는 지금 상황에서 좋았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지금과 그때가 다르며, 편지를 보낸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불안한 상상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렇기에 가족 대부분이 굳이 편지를 찾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클리어리가의 편지’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므로 늘 신경이 곤두서있다. 가족을 위협하러 온 외부인인 줄 알고 딸과 강아지를 죽일 뻔하기도 한다. 상황이 바뀌면 사소한 물건의 의미도 전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다소 무겁고 진지하게 풀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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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카드'는 죽음과 애도,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스승님의 죽음을 슬퍼한 주인공은 그에게 들은 이야기, 남에게 들은 그의 이야기를 모두 그림으로 남긴다. 다른 우주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와 그림을 보고 울 정도로 애절하다. 지금은 그림이 널리 퍼지다 못해 도박의 카드로 쓰이지만, 그때만 해도 그림을 본 사람은 모두 스승님을 애도하고 슬퍼했다. 스승님을 향한 애도가 지금은 도박장에서나 쓰인다는 부근에서 시간이 지나며 감정이나 예술이 어떻게 퇴색해가는지 보여준다. 주인공은 이 이야기를 들으러 온 사람에게 자신을 애도해달라고 부탁한다. 애도함으로써 영원히 기억해달라고.


모든 신화는 숭배로부터 시작한다. 세상이 어떻게 탄생하고 하루를 어떻게 보낼 수 있는지 당시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신의 내린 축복이라 생각하며 숭배한다. 신은 모든 것을 숭배하면서 탄생하고, 신과 신이 관계를 맺으며 신화가 쓰인다. 반대로, 전설은 그리움에서 탄생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영웅이 얼마나 대단했고 무슨 일을 했는지 늘어놓는 것은 영웅의 행적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감탄하고 경외롭게 생각하면서 그 이야기를 반복하며 전설이 생겨난다. 애도는 전설과 비슷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해 계속 말하고 슬퍼하고 기린다. 주인공은 애도가 구전되어 영원히 사람들이 스승님을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는 종종 나와 헤어져 관계없는 사람이나 세상을 떠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기억 속에서 반복해서 그 사람의 삶을 지속시키고 타인에게 말해줌으로써 기억한다. ‘슬픔의 카드’에 나오는 애도의 방식과 똑같이. ‘슬픔의 카드’에서 주인공은 청자를 지구에서 온 사람처럼 표현한다. 다른 외계인은 만난 적도 없고 지식도 없어 잘 모르겠으나, 지구인은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애도하기 때문에 도움을 청한 걸지도 모르겠다.


'탄젠트'는 '태양 아래를 걷다.’ 와 마찬가지로 정밀하고 과학적인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3차원과 4차원에 관한 고찰이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굉장히 현실적이다.


3차원의 사람이 2차원에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2차원에서 보기엔 층층의 단면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코의 끝 부분부터 시작해서 얼굴 전체, 그리고 뒤통수의 면이 차례대로 늘어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아래의 영상에서 3차원 고래를 만들기 위해  우선2차원의 여러 단면을 만드는데, 2차원에서는 3차원의 등장이 저런 여러 단면처럼 보일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4차원이 3차원에 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소설은 이 부분을 건드린다.





이 소설은 과학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실제로 있었던 일과 가상의 일을 적절하게 잘 섞는다. 소설 속에 나오는 캐릭터 중 몇 명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을 데려온다. 그 때문에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혼란스러워, 정말로 4차원의 존재가 지구를 방문한 적이 있는 것 같다.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 실제로 살았던 삶을 멀리서 엿본 기분이다. 이야기는 절대 현실성이 없는데도 그렇다. 그럴듯한 현실을 만든다는 점에서 가장 소설 같은 소설이고, 그럴듯한 과학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SF 같은 작품이다.


'링컨 기차'는 대체 역사 소설이다. 만일 링컨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노예제도와 추방에 얽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희망찬 이야기는 아니다.


17살 클라라이는 군인들이 줄지어 서 있는 와중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올라타야만 한다. 가지 않겠다고 거부하거나 도망치면 군인이 쏴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차를 타는 도중에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치여 숨진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클라라이는 어떤 사람이 도와줘 도망친다. 그들은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이고, 클라라이는 노예의 주인이었다. 그들은 노예를 부리는 사람이라고 굶어 죽는 상황을 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클라라이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소설을 읽고 나면 노예 제도에 대해 학습할 수도 없이 자란 어린아이를 죄인으로 보아야 하는지, 인권에 관해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고 해도 같은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는 자를 이해하거나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노예의 주인이 고작해야 20살도 안 된 아이라면, 그 생각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자신을 왜 구해주었느냐는 클라라이의 질문에 사람들은 악에 악으로 맞서선 안 된다고 말한다. 난 악마가 아니에요! 클라라이가 말하지만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이 이야기의 뒤 내용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이 성당의 탑 위까지 찰 정도로 수몰되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과거는 모두 물 밑에 존재한다면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폐품 수집’ 이야기다. 소설 속 현재는 16살 이전에는 일하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이 대부분이 어린 시절부터 일하고 돈을 벌러 다닌다.


이런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기도한다. 남들에게 말하기 힘들 만큼 사소하거나 ‘쪽팔리는’ 기도지만, 모든 사람이 묵인하기 때문에 지속한다. 기도하는 사람을 비웃을 것처럼 보이는 디버에게만 누구도 여전히 기도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아포칼립스 시대에도 믿음은 있다. 신이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안내해주실 거라는 믿음, 작은 죄를 지었지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믿음. 이런 믿음을 소설 속에서는 기도로 표현한다. 또 다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라면 당연히 내게는 말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사람을 향한 믿음이다. 가끔은 믿음을 위해 믿음을 저버리는 일도 발생한다. 디버는 그들이 모두 과거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과거에 유행했던, 지루한 게임을 계속 반복하고, 기도하고, 물 밑에 가라앉은 추억에 잠기곤 하는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삶은 계속 이어져야 하는데, 그들은 삶이 꼭 물 아래 같이 잠긴 것처럼 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우리는 삶이 잠긴 적도 없으면서, 가끔은 꼭 잠긴 사람들처럼 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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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이별'은 지구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몇 안 되는 이야기 중에 하나이다. 완벽하게 긍정적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이 세계에는 신인류와 구 인류가 나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자주 어울리지도 않는다. 손자와 할아버지가 같이 박물관에 가는 일이 굉장히 신기하고 놀랍게 보인다. 사실 신기하고 놀라워하는 일이 독특하다고 말하긴 힘들다. 현재에도 세대 차이가 발생하고, 아주 어린 아이가 아닌 이상 손주와 할아버지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니 말이다. 구 인류는 신인류가 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신인류도 구 인류가 될 수 있지만 할아버지도 손자도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본래 누구도 굳이 자신에게 익숙한 문화나 세대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기 마련이다. 둘은 그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내는 대신, 인정해주고 원하는 길을 가도록 놔둔다. 그렇게 구 인류 할아버지와 신인류 손자는 위대하게 이별한다.


SF 소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제외한다면 다른 소설의 줄거리와 굳이 다를 것도 없다. 앞서 말했듯 SF 소설은 과학의 발전이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얼마나 화려한지, 혹은 그러한 상상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보여주거나 입증하기 위한 장르가 아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과거에도 빈부 격차나 가족, 인권과 도덕, 추억, 과거, 세대 차이, 돈과 권력 등의 이유로 갈등했고 현재에도 갈등하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도 변치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과학이 얼마나 발전했든 세월이 얼마나 변했든 SF소설에서조차 그런 것들은 변하지 않고 나올 것이다. 반대로 ‘클리어리가에서 온 편지’처럼 시간이 변하면 바뀌는 것들이 있다. 상황이 가져다주는 평화나 행복, 안전 등이 그렇다. 이러한 것은 특정한 상황을 말하는 소설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주로 나온다.


SF 장르에 대해선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하나도 모르던 사람이 감히 두 장르, 총 18가지의 이야기에 대해 말해보았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SF 장르란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조심스럽게 결정지어본다. 어느 장르가 안 그러겠냐만은. SF 장르는 과학적 상상이 얼마나 굉장한지 나열하기 위한 장르가 아니었다. 그럴 거면 과학 저술지를 살피는 게 더 낫지 않은가. SF 장르는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좀 더 극대화하기 위해,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과학적 장치를 가져오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궁극적인 목적은 상상에 있다. 외계인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화성에서 야구를 한다면? 수학으로 공격을 당한다면? 핵폭발 이후에 과거에 받았던 편지를 읽는다면? SF 장르의 가장 큰 재미는 이러한 그럴듯한 생각을 그린다는 점이다.


SF 장르의 시작이 그럴듯한 상상이라고 해서, 中편을 내가 외계인인 척 썼다거나, 下편 가장 위 문단의 이야기가 재미를 돋우기 위한 상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도 믿지 못하겠지만, 정말 그렇겠지만 나는 외계인을 만나고 왔다 왔다. 하필 황당하게 글을 읽고 후기를 쓰라고 할 게 뭐야. 아무도 믿지 못할 텐데. 당신이 지금 이 문장을 읽으며 웃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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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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