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믐,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공연예술]

글 입력 2018.09.2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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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가지는 2차 창작물의 경우, 긍정적인 쪽이든 부정적인 쪽이든 간에 보고 나면 원작을 보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작품이 몇 있다. 필자가 이번에 초대받은 연극 <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역시 그랬다. 그리고 긍정적인 의미냐 부정적인 의미냐를 묻는다면 단연 후자의 의미로 그렇다.

 

정말 어려운 극이었다. 관람하는 내내, 그리고 관람을 마치고 나서도 극에 대한 감상은 커녕 이걸 가지고 어떻게 리뷰를 작성하나 싶어 걱정만 맴돌았으니까. 시간을 다루는 극이니만큼 내용 자체도 난해하다고 생각했지만, 연출 방식 역시 이해를 돕기는 커녕 나를 수렁에 빠뜨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의문, 그 다음엔 이해하지 못하는 내 스스로가 멍청한가 싶은 자책이 뒤따랐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어떻게든 이해하고 따라가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끝까지 물음표만 남은 채 끝나버린 연극의 빈 무대를 바라볼 때는 불쾌감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연극을 이해하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원작을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동시에, 원작을 각색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원작과는 또 다른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 원작을 봐야만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조각이나 내어줄 수 있다는 것에 화가 치밀기도 했다. 지금 작성하는 감상은 원작을 보지 않은 상태의 글이므로, 극이 다루는 내용의 이해도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리라 생각된다.

 

 

고교시절 동급생을 살해한 죄로 감옥에 갔다 온 한 남자, 그리고 그의 학창 시절 연인이었던 한 여자. 남자는 < 우주 알 이야기 >라는 소설을 써 여자가 일하는 출판사로 보낸다. 여자는 소설의 내용이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을 깨닫고 그들은 15년 만에 재회한다. 남자는 자신의 죄가 세상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깨닫고,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려 이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의 대략적인 시놉시스는 위와 같다. 남자의 소설 < 우주 알 이야기 >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로, 그는 시공간 연속체인 우주 알을 품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사는 인물이다. 시공간 연속체, 시간과 공간이 끝도 없이 연결되어 있는 물질이다. 연결되어 펼쳐진 시공간은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도 모르게 광활한 우주이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미래, 이 세 가지 순간을 동시에 사는 남자에게 사실 시간에 의한 순간의 구분이란 존재하지 않고 의미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연극 또한 관객에게 시간의 실마리를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그가 수감되기 전, 우주 알을 받아들이기 전의 그의 학창시절만을 과거라고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살고, 쌓여온 패턴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버릇을 가진 객석의 관객들은 어떻게든 무대 위에 흩어진 장면의 파편을 주워 연결시키려고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무대 위에서 나타나는 장면들은 주인공이 살고 있는 현재이자, 그가 기억하는 과거이기도 하고, 될 수 있었던 미래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의 원고지 속 활자이기도 하다. 연극은 소설과 현실, 시간의 경계를 과감히 넘나들며 그동안 관객들이 익숙해져 있던 패턴을 전부 뒤섞어 놓는다. 그 속에서 어떤 장면들은 반복되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인, 남자의 살인. 그러나 반복되는 동시에, 조금씩 달라진다. 마치 우리의 기억이 조금씩 변화하듯이. 변하지만 여전히 같은 결로 존재하는 장면들은 남자의 기억이면서 현재이기도 하다. 소설을 통해서든 우주 알을 통해서든, 몇 번을 기억해도 그 길을 다시 되돌아가도 여전히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장면들은 결국 어쩌지 못하는 운명으로 그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 출발선 앞에서 남자의 시간은 수 만 갈래로 존재한다.


무대는 큰 보름달 하나와 작은 보름달 하나가 맞닿은 형태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데, 배우들은 두 개의 보름달이 맞닿은 사이를 오고 가면서 무대 위를 기어 니기도 하고, 한 쪽 다리를 질질 끌거나 뱅뱅 도는 등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무대 위의 장면들을 연결시켜 어떤 서사를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그저 하나의 장면만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모든 순간들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깨어지고 모난 흔적이 남은 시간의 파편들.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도 알 수 없는 조각들 속에서 현실인지, 아니면 현실이 될 수도 있었던 상상인지 우리는 구분할 수 없다. 가상과 현실 사이의 벌어진 틈 사이로 인물들은 일그러져 존재하고, 이것이 비틀리고 불균형한 몸짓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마치 술에 진탕 취해 흐릿한 기억 속의 움직임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시간들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히 우주 알이다. 현실로 나타난 시간, 그리고 나타날 수 있었던 가상의 시간, 그 사이 순서들이 모두 뒤섞여 우주 알 속에 연결되어 펼쳐진다. 이 점에서, 두 개의 보름달이 맞닿은 무대는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보름의 끝과 시작에 존재하는 그믐, 두 개의 보름달이 맞닿은 틈 사이로 그믐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믐이 만들어낸 균열에서 시간의 파편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 속에서 회전하는 인물들은 보름달처럼 보이는 우주 알 위를 맴도는 위성일지도 모른다.


 

마치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 자신의 부족함을 까발리는 것 같아 그렇다. 공연을 막 보고 나왔을 때의 텅 빈 백지 같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공연을 곱씹으면서 의미를 찾아 헤매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보통은 극 속 인물의 감정선이 안내자가 되어 극으로의 몰입을 돕지만, <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은 사건의 연결고리를 끊어놓고 장면의 순간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극 속으로 들어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실험적인 연출을 처음 만난 낯섦과 불쾌함이 몰입을 방해한 건 아닌지, 여러 후기들을 찾아 읽으며 곱씹을수록 새로운 감상에 아쉬운 마음을 담아 글을 마친다.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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