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헤드라인에서 '여성'을 지워라. [문화전반]

글 입력 2018.07.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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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남자는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준다는 명목으로 친구의 딸을 유인하고 살해한 유력한 피의자이다. 센 척을 하고 자신의 전 남자친구와 만난다는 이유로 10대 청소년들은 친구를 성추행하고 무차별한 집단폭행을 저질렀다. 놀랍게도 지난 한 달간 벌어진 끔찍한 일이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 폭행 사건은 각각 ‘강진 여고생 살인사건’, ‘관악산 여고생 집단폭행 사건’으로 명칭 되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성별과 나이에 집중하는 헤드라인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쏟아지는 기사들은 끔찍한 사건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하다.



가해자보다는 피해자 여성


강진기사2.jpg

청주 헤드라인 2.jpg
 

위는 지난해 청주에서 한 시체가 발견되면서 나온 보도와 강진 살인사건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고 언론사에서 앞다투어 쏟아낸 기사의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20대, 여고생, 나체, 여성, 시신’ 같은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 헤드라인은 찾기 힘들다고 단언할 수 있다. 독자들은 제목을 통해 피해자의 나이, 성별, 시신의 상태까지 알 수 있다. 반면 가해자에 대한 정보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청주 사건에 대해 뉴스1은 ‘청주 알몸 여성 살해범 자백’이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여기서 피해자는 ‘알몸 여성’이라는 표현으로 살해범을 꾸미는 수식어구로 전락했다.


연합뉴스 제목 2.jpg

 
재작년 보도된 제목은 더욱 충격적이다. ‘경찰, 모텔 추락 20대女 동반투숙객 살인 혐의로 입건.'이라는 연합뉴스의 보도를 보면 헷갈리기까지 하다. 모텔에서 추락한 20대 여성은 피해자인가, 살인 혐의로 입건된 가해자인가? 억지로 끼워 넣은 듯한 ‘20대女’라는 표현이 오해의 소지를 준다.
 
성폭행 살인사건 보도에서 여성은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가해자보다 ‘여성’ 피해자를 부각하는 보도는 여자라서 당연히 성폭행의 위험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조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생산한다. 결국, 이 속에서 '여성'이라는 성별은 강조되고 사건의 맥락은 왜곡되기 시작한다. 여성은 대상으로 비치고 가해자들의 특징과 범행은 점차 지워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네이밍된 사건들은 그 위험성이 더욱 커진다. 강진 여고생 살인사건도, 청주 20대 女 살인사건도 결국 가해자의 존재는 지워지고 피해자만이 남았다.



사회의 진단보다는 가해자 여성


가해자 여성에 대한 보도는 어떨까. 연합뉴스에서는 작년 영아살해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 위와 같은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대략적인 사건의 흐름과 발생 장소, 가해자의 나이까지 짐작할 수 있는 제목은 앞선 사례와는 다르게 가해자 중심의 친절한 설명을 담고 있다.


연합뉴스 가해자.jpg


사실 영아살해 사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잘못된 성교육의 문제, 미혼모들에 대한 사회 시스템의 부재 등 다양한 논의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경찰의 수사 방향만을 담은 건조한 내용의 이 기사는, 모든 비난의 화살을 ‘여고생’에게 돌릴 뿐이었다.

사건 사고 보도에서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은 피해자 혹은 가해자 여성의 나이, 발견 당시 나체 상태였는지의 여부 따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성 있는 사건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진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나라의 범죄 보도는 수준 이하다. ‘남자’는 굳이 언급하지 않으면서 ‘여자’를 남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남성을 기본으로 두고 여성을 특별하게 규정하는 성 차별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가해자보다는 ‘여자’ 피해자에게, 범죄 뒤에 가려진 사회 시스템의 문제보다는 ‘여자’ 가해자에게 집중한다. 이 관행 속에서 그릇된 성 인식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뉴스 어뷰징 속 '여성'이라는 도구


여성이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제목에 ‘여성’을 두어 강조하는 이유는 뉴스 어뷰징과 연관된다. 클릭 경쟁이 치열한 인터넷 보도 환경에서 제목부터 사람들의 구미를 당길 수 있는 요소들이 필요하고 여성은 그 도구 중 하나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사건의 맥락 없이 ‘여자’라는 존재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으로 이어지고 피해자임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소비되어 2차 피해자가 되는 것. 어쩐지 익숙한 흐름이다. 범죄 기사에서 소비되는 여성의 모습은, 곧 우리 사회 속 여성의 단면이 아닐까?

기사를 쓰고 보도를 하는 사람으로서 올바른 성 인식에 대한 부재는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범죄 보도 속에서 여성의 그릇된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보도 관행은 악습이다. 악습을 끊는 시작은, 범죄 기사 제목과 헤드라인에서 ‘여성’을 지우는 것이다. 우리는 강진에서 억울하게 살해된 피해자 보다, 친구의 딸을 유인하고 살해한 피의자 50대 男에게 초점을 맞추고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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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심진주, "강진 실종 여고생 추정 시신 발견, '알몸 상태로 산 속에서…'". 뉴스타운. 2018.06.25.
이승민, "청주 20대 나체 여성 시신 신원 확인…타살 가능성 수사", 연합뉴스, 2017.09.19.
정회성, "경찰, 모텔 추락 20대女 동반투숙객 살인 혐의로 입건", 연합뉴스, 2016.01.09.
손현규, "집에서 혼자 낳은 아기 살해 후 베란다에 버린 여고생", 연합뉴스, 2017.06.05.


[조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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