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畵談)] 제 3.5화(畵) : 분노, 다르게 화(化)하다.

혈투, 조롱, 고발로 화한 분노
글 입력 2018.03.2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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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공지없이
칼럼 연재가 지연되어 죄송합니다.
 
 

0. 당신을 위협하는 것

최근 두 달 동안 인턴십을 했던 기업에서 정규직 전환에 불합격됐다. 예고대로 불합격 통보는 문자로 전달됐고 나는 다시 취업준비생이 되었다. 그 때 나는 ‘분노’하지는 않았다. 저번 화에서 분노는 어떤 위협을 인식했을 때 위협을 멈추거나, 없애려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불합격 통보에 분노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나에게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내가 그 일과 회사에 애착을 가지기는 짧은 시간이었고, 느긋하게 즐기지 못한 휴식 기간이 내내 마음에 걸렸고, 최종 발표 후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합격은 나를 분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길에서 맡는 담배 연기는 나에게 분명한 위협이 된다. 매캐한 담배 연기는 나의 건강을 상하게 할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걷는 공공장소에서 흡연하는 행위는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도덕관에도 어긋난다(위협이 된다). 항상 집에서 흡연하는 부친을 겹쳐 보이게 하는 것도 분노의 원인이 된다.

이상한가? 미래의 삶이 걸린 정규직 불합격보다 담배 냄새에 분노한다는 것이? 그렇다면 당신의 분노는 ‘정상적’인가? 분노의 대상을 아는 것은 당신의 어떤 부분이 위협받지 않길 바라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번 화에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분노하고 있나?
 
 

1. 혈투 – 프란시스코 고야, 곤봉 결투
 
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Duelo a garrotazos(Fight with Cudgels),oil on canvas,1820-23.jpg
[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Duelo a garrotazos(Fight with Cudgels),
oil on canvas,1820-23]
 

진흙에 다리가 파묻힌 두 남자. 손에는 곤봉을 쥐고 맹렬히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표정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둘은 분노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서로에게 맞설 것이다. 움켜쥔 곤봉으로 상대를 후려치면서 상처 입히고, 상처 입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종국에는 어떻게 될까? 지금 저 둘의 발을 먹어가는 진흙처럼 분노가 그들을 좀먹어 갈 것이다. 분노가 낳는 분노, 폭력이 낳는 폭력, 복수가 낳는 복수에 사로잡혀 벗어날 수 없는 감정에 붙잡힐 것이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인간의 사악한 면모를 잔인한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로 유명하다. 스페인의 이 화가는 반도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의 참화’라는 동판화 연작을 82장 분량으로 그리기도 했다. ‘왜 비인간적인 장면만 그리느냐’는 하인의 질문에 화가는 이렇게 답했다.

“야만인은 되지 말자는 얘기를
영원히 남기고 싶어서”

고야는 인간의 잔인함을 그림으로 들춰내 경각심을 갖자고 이야기한다. 우리 안에도 저런 악마들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자고. 눈 앞에 있는 상대방을 향해 곤봉을 휘두를 만큼의 복수심, 열등감, 증오, 원망 등의 감정은 누구나 느낄 수 있으니 표현에 신중하자고.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전염은 쉽다. 폭력은 분노의 표현으로 흔히 사용되지만, 과연 옳은 방식인지 의문이 든다.

 
 

2. 조롱 – 켄트 헨릭슨, 천상의 계획들, 교활한 만족
 
Kent Henricksen, Celestial Schemes, Embroidery thread, silkscreen and gold leaf on fabric,2009.Jpeg
[Kent Henricksen, Celestial Schemes,
Embroidery thread, silkscreen and gold leaf on fabric,2009]

 
Kent Henricksen, Cunning Contentment,Embroidery thread, silkscreen and gold leaf on fabric,2009.jpg
[Kent Henricksen, Cunning Contentment,
Embroidery thread, silkscreen and gold leaf on fabric,2009]
 

그림의 배경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카펫에 쓸 법한 무늬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편안한 느낌은 단박에 깨진다. 중앙에 있는 두건을 쓴 사내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고문, 살해, 폭력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영물이기도 요물이기도 한 뱀이 사내를 감싸고 있고, 사내는 그림 중앙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악행을 위해 화가가 차용한 그림은 중세의 성화(聖畵)들이다.
 
그림의 내용이 폭력적임에도 확연하게 공포스럽지 않은 이유는 켄트 헨릭슨의 방식 때문이다.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하고 그 위에 디지털 자수를 놓아 액자 틀을 삼았다. 폭력적 내용을 자수라는 목가적인 방식으로 재현해낸 그림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종교를 비틀어 비판하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믿음을 위한 믿음을 요구한다. 고대의 규칙은 종교 율법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현대의 상식으로는 야만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율법들이 종교 안에서는 신에 대한 순종으로 번역된다. 포교를 빙자한 역사 속의 종교 전쟁들과 미개하다는 이유로 짓밟힌 토속 신앙들의 예는 다양하다. 그림 안에서 두건을 쓴 사내는 과연 누구인가? 신인가? 신을 믿는 사람들인가? 종교의 역설을 역설적으로 조롱하는 화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3. 고발 – 이재훈, Unmonument "이것이 현실입니까"
 
이재훈 - unmonument 이것이 현실입니까, 2008.JPG
[이재훈 , Unmonument - 이것이 현실입니까, 프레스코, 2008]
 

위풍당당하게 깃발을 날리는 사람이 있다. ‘정복자(征服者)’라는 글씨에 가려 눈이 보이지 않는다. 정복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밟고 있는지 알고있기는 한 것일까? 빨간 망토와 대비되는 파란 두건을 두른 뒷모습은 아마 2인자인가 보다. 그 밑으로 계속 이어지는 짓밟힌 이들 모두가 책을 들고 있다. ‘검’ ‘상’ ‘하면(된다)’ ‘참 잘했어요’ 등 결과만을 요구하던 학교의 모습 역시 낡은 채로 깔려있다. 이 모든 것이 모여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상아탑(象牙塔)’이다. 패배자들이 이룬 탑. 그리고 그 탑에서 내려오면? ‘백수(白手)가 된다.
 
이재훈이라는 작가가 ‘Unmonument’라고 일컫듯 대학은 더 이상 기념할 만한 것이 아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같은 공부만을 강요하는 시대에 아이들은 공부의 이유를 고민해 볼 시간 조차 없이 책에 매달려야 한다. 점수를 받아야하기 때문에, 대학에 가야하기 때문에, 정복자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공부 말고 다른 길은 인정하지 않는 부모와 사회 아래에서 눈을 가린 채 공부만 한다. 학생들은 과연 교과 공부 때문에 현실을 희생해야만 하는 나이인가? 그렇게 희생한 그들의 미래가 찬란하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인가? 작가는 소리 높여 고발한다. “이것이 현실입니까?”
 
 
 

4. 분노
 
혈투, 조롱, 고발로 화한 분노 중에 어떤 분노의 표현에 가장 익숙한가? 나는 조롱의 분노에 가장 익숙하다. 저번 화에서 언급했듯 내가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는 상대방을 상처 입히기 위한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켄트 헨릭슨의 조롱처럼 여유롭고 재치있는 조롱이 아니다. 경멸, 냉소, 앙금과 같은 지저분한 감정을 담아 상대방을 더럽히는 것이다. 잘못된 표현 방식임을 알면서도 고치는 게 쉽지가 않다.
 
 
 
웹툰 속 커플의 싸움이 커지는 이유는 화를 내는 방식이 다르고, 그 차이를 몰랐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분노의 표현을 알고, 이해하고, 교점을 찾음으로 관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분노의 표현 방식이 중요한 이유는 부정적으로 드러나기 가장 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관계를 해칠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았나? 신체적, 정신적, 금전적인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화를 내지는 않았나?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지는 않았나? 화를 내야할 때 표현 못하지는 않았나?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내 분노를 적절히 전달하면서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해 봐야겠다.
 
 



[참고 문헌]
검은 미술관, 이유리, 아트북스, 2011
 
 
[다음 화 예고 - 제 4 화(畵) : 두려움, OO으로 화(化)하다.]
 

[김마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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