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박쥐≫ 인간 본성을 아름답게 힐난하다 [영화]

글 입력 2018.03.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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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적대를 이루고 있는 새와 짐승의 세계에 새의 모습과 짐승의 모습을 모두 가진 박쥐가 나타난다. 새가 유리한 상황에선 자신을 새라고 칭하고, 짐승이 유리할 땐 자신을 짐승이라고 소개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시시각각 전세가 유리한 쪽에 속하고자 수차례 배신을 한 박쥐는 결국 양쪽에서 신뢰를 잃어버리고 버림받는다. 지조 없이 자신의 이득만을 취하다가는 모두의 믿음을 잃는다는 교훈의 우화이다. 여기, 일체의 사욕을 금하는 신부의 모습과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흡혈귀의 모습을 동시에 가진 박쥐가 있다.


※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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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확인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생체 실험에 참여한 신부 ‘상현’은 실험 도중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하지만,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 신격화되며 추앙받는다. 그러나, 사실 상현은 태양 빛에 스러지고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피를 토하며 죽음에 이르는 흡혈귀로 부활한 것. 그러던 중, 어렸을 적 친구였던 ‘강우’의 병을 치료하러 그의 집에 들르고 그곳에서 그의 부인 ‘태주’를 만나면서 자신의 욕망과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영화를 통해 힘 있게 뻗어 나가고, 이를 감싸는 우아한 시각적 연출과 함께 메시지는 유려하게 전달된다.
   
 영화는 금욕적이고 신실한 신부의 모습에서 원초적 본능을 따르는 짐승과도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상현의 모습을 비추며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상현의 억눌린 본능을 깨운 것은 바로 태주이며 그녀는 곧 상현의 본능을 상징한다. 상현은 태주의 발을 자신의 신발에 신기며 그녀를 자신의 세상에 들인다. 그녀를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그녀에게 잠기며 자신을 옭아매던 금기를 깨버린다. 그럼에도 모든 인간이 그렇듯 그는 자신을 계속해서 합리화하고, 태주를 탓한다.

 그러한 행태를 통렬히 비웃는 태주와의 극명한 대비는 마치 한 인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성과 감정 간의 싸움과 닮아있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이성과 감정을 구분하고 그 우열을 가리기에 열심이었으나, 사실은 이성은 이렇게나 교활하며 감정은 한없이 파괴적일 뿐이다. 상현은 태주를 삭제할 수 없고, 인간은 본능의 존재를 모른 체할 수 없다. 태주의 대사처럼 ‘부끄럼을 타지 않는’ 본능은 인간에 의해 감춰지지만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유약한 동물에 불과하다. 영화는 거리낌 없이 직선적인 전개로 인간 본성을 책망하며 관객들의 머릿속에 있는 보루를 사정없이 헤집어놓는다.
 
 서사는 직선적이나, 연출은 곡선적이다. 영화를 지배하는 우아하고 미적인 화면과 장면 묘사는 이야기를 강렬하게 밀어붙이는 영화의 화법과 대비되면서 완급조절을 탁월하게 해낸다. 만약 연출 또한 직설적인 화법을 따랐다면 이 영화에 감도는 공포감과 섬뜩한 분위기에 묻혀 내러티브는 수월하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직선과 곡선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서사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면서도 영화에 입체감을 조성한다. 가끔 등장하는 블랙 유머는 긴장된 분위기를 이완하며 균형을 맞춘다.

 상현과 태주가 서로의 피를 빨아들이는 모습을 부감으로 비추는 장면은 가히 압도적이다. 최악에 상황으로 치달은 인물이 죄책감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사랑했던 여인의 몸을 얽고 게걸스럽게 피를 탐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실소가 터질 정도로 어이가 없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인간의 모습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본능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괴이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이 장면은 모순적인 인간의 본성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칙칙하고 건조한 화면 사이로 난자하는 핏물의 붉은색에서 자신도 모르게 시각적 쾌감을 느끼게 되는 감상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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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인간의 추악함과 유약함을 날카롭게 비웃으나 동시에 그것이 인간다우며 자연스러운 것임을 이야기한다. 후반부에는 강간을 시도하며(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추악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상현이 사람들에게 돌로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처음에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던 것을 떠올리면 이 역시 죄가 없는 자만이 돌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하는 성경적 메타포를 담은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물론 영화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는가’ 라는 가치 중립적 메시지는 아니다. 영화는 이를 상기시키듯 인물의 잔혹하고 비상식적인 행각을 시종 노출한다. 그럼에도 그 광경을 목도하는 모든 관객,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은 마찬가지로 그들의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첨예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서두에 박쥐 우화를 언급했다. 이야기 속의 박쥐처럼 상현 역시 모두의 신임과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고 소멸한다. 본능으로 점철된 결과는 잔혹하다. 이처럼 인간이 외면하는 본능은 어느새 자신을 뚫고 자라나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것 하나 인정하기 싫어 모른 체하고 애써 이성과 합리로 자신을 둘러싸는 나약한 인간들에게 이 영화는 아름다운 형식을 한 비웃음과 애도를 보낸다. 우리는 불멸을 누렸으면서 고작 매일같이 찾아오는 동녘 태양에 속절없이 사라지는 그들과 거리를 둘 근거가 없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박쥐>, 보도자료


[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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