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무도 가질 수 없었던 꽃밭에서

연극 '누구의 꽃밭' 리뷰
글 입력 2018.01.25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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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우리는 어른으로 사회를 살아가며 다른 사람에게 내보일 수 없는 생각과 감정, 그리고 욕망을 가면 뒤에 숨긴다. 가면 쓴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은 아주 평화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이 파괴될 때, 우리의 가면도 함께 부서진다. 연극 <누구의 꽃밭>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숨길 여유가 없는, 숨길 이유조차 사라진 사람들의 욕망과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세 사람과 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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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중인 나라, 한 지붕 아래 양귀비 꽃밭을 가꾸며 사는 세 사람이 있다. 이 집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 재중과 그의 아내 주정, 그리고 남자의 정부 선애이다. 한 눈에 봐도 기묘한 이들의 관계는 폭력 속에서 유지된다. 재중은 언제든 선애와 일방적인 성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주정은 내키는대로 선애를 폭행하거나 그녀에게 폭언을 퍼부을 수 있다. 두 사람이 선애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함께 식사를 하다가, 또는 일상적인 대화를 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발생했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잦아든다.

 앞뒤 맥락 없이 관객의 눈앞에 펼쳐지는 폭력의 현장은 이미 폭력이 이들의 일상에 깊이 스며 있음을 나타낸다. 이 부조리한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전쟁이라는 특수상황 때문이다.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목숨도 부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셋은 모두 전쟁이라는 바깥의 거대한 폭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피해자이면서도 집 안에서 또 다른 폭력의 위계질서를 구축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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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중 새로운 인물 '영민'이 비를 피하러 이 집에 들른다. 그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여장을 한 열다섯 살의 소년이다. 재중의 지시로 갑작스레 이 집에 살게 된 영민은 세 사람의 기묘하면서도 안정적인 관계에 변화구를 던진다. 그는 금세 세 사람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영민을 소녀로만 알고 있는 재중은 남성성을 휘두를 수 있는 또 다른 성 착취 대상으로서 그를 욕망한다. 주정은 그로부터 빼앗긴 아들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를 꿈꾼다. 유일하게 영민이 여장남자임을 아는 선애는 그를 성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자신만의 미래를 그린다.

 세 사람은 전쟁이 끝나면 양귀비를 팔아 돈을 벌 생각에 들떠 있다. 양귀비 꽃밭은 영민과 닮은 구석이 많다. 마약이 그러하듯, 영민을 향한 욕망은 가장 희망적인 동시에 가장 불길한 것이고 찰나의 환희 끝에 닥칠 영원한 절망이다. 지금 당장은 사람을 살게 하지만 결국에는 파멸시킬 무엇이다. 아니나 다를까. 전쟁이 끝날 때쯤 꽃이 갑작스럽게 사라진다. 꽃이 사라진 걸 알게 된 순간 차곡차곡 쌓아 왔던 욕망은 무너져 버리고 폭력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소동 끝에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떠났다. 남은 한 사람은 과거에 갇혔다. 어느새 이 집의 일부가 되어버린 영민은 아무도 없는 집에 발이 묶여 버렸다. 그는 모두가 원했지만 아무도 가질 수 없던 꽃밭이었다.



욕망의 색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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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뷰에서는 이 극이 폭력의 민낯을 보여줄 것이라 썼지만 연극을 보고 나니 오히려 <누구의 꽃밭>은 폭력보다 욕망의 이야기였다.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아니 오히려 극한 상황이기 때문에 욕망은 거리낌이 없다. 영민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욕망은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숨길 게 없는 표정, 번득이는 눈빛, 고조된 목소리 등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의 모습은 다분히 동물적이다. 하지만 그 욕망은 한가지 색이 아니다. <누구의 꽃밭> 속에서 욕망은 다양한 색으로 존재한다. 호시탐탐 영민을 겁탈하려는 재중의 욕망은 역겹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함께 살자며 영민에게 달뜬 목소리로 사랑한다 외치는 선애의 욕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떠올리게 한다. 영민을 잃어버린 아들의 이름으로 부르는 주정의 욕망은 그저 안쓰럽다. 이처럼 <누구의 꽃밭>은 욕망에 어떤 가치판단을 부여하기보다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욕망 자체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자신의 욕망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을 망설이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그 존재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 사람이 품은 각각의 욕망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는 건 그 때문이다. 살아있는 한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불가능하다.



가면의 안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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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은 우리가 평소에는 알지 못하던, 생각하지 못하던 무언가를 돌아보고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는 가치를 지닌다. <누구의 꽃밭> 역시 그러했다. 극한 상황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는 그들의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며 피어나는 폭력은 가면 뒤에 꽁꽁 숨긴 우리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욕망 그 자체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자리한 욕망은 씨앗과 같다. 꽃밭에서 피어나는 건 아름다운 양귀비일수도, 치명적인 마약일수도 있다. 둘을 분명하게 분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씨앗을 품고 있는 건 우리 자신이다. 애써 숨겨 놓은 것들은 가면의 안쪽에서 우리를 똑바로 응시한다.

 <누구의 꽃밭>은 독특하게도 입장할 때 관객이 아니라 이 세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은 손님이 된 것처럼 무대 정면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갔다. 그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까. 나는 그들의 꽃밭으로 입장했으나 퇴장하지 못했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에는 불편하고 낯선 누군가와 단 둘이 남겨진 느낌이었다. 그 이질감은 꽤 오래 갈 것 같다.





공연정보


기간: 2018.1.12-1.20
*평일 오후 8시, 토일 오후 4시, 월요일 휴무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러닝타임: 80분

관람연령: 17세 이상 관람 가능

입장권: 전석 3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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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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