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야기 [문학]

이야기의 본질에 대해
글 입력 2017.03.14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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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이야기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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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는 들은 순간 몸 안에 스며들어 일부가 되기라도 한 듯 사라지지 않는다. 때때로 곱씹어지고 때마다 다른 의미들로 새로워지기도 하며 그렇게 여전하게 남는다.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한 교수님은 과제로 가장 기쁘거나 가장 감동적이거나 가장 슬프거나, 그러한 이야기 한 편을 찾아오라고 하셨다. ‘가장’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부담감에 어떤 이야기를 찾아가야 할지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가장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한 편의 글을 옮겨 적으며, 역시나 ‘이 이야기는 참 슬프다’, ‘가장 슬프다’라고 되뇌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글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정사情死’라는 짧은 글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이 글은 감히 줄거리를 요약하기엔 어떤 문장도 지우거나, 어떤 단어도 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 글 자체로 고정된 완벽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곧, 완벽한 슬픔이었다. 이 글을 완벽한 슬픔이라고 말 하는 건 이 글을 떠올릴 때마다 슬픔에 대해서 다시, 또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슬픔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도, 어떤 거창한 수사를 덧붙이는 것도 아닌 짧은 이야기가 슬픔에 대해, 그 본질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사情死’에는 분명히 ‘슬픔’이 ‘들어있었다.’
 
그런 이야기, 그런 글이 있다. 진실을 파헤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해 끊임없이 곱씹어볼 수밖에 없도록 사로잡아 버리는 글이 있다. (사로잡다, 혹은 고정시키다, 못 박다) 그런 글을 읽으면 어떤 방식으로 그 글을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정사’를 ‘슬픔에 관한 글이다’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그 이야기가 어떤 모습으로 슬픔을 담고 있는지, 그래서 슬픔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는 거처럼. 아니 어쩌면 ‘슬픔에 대한 글’이라는 것마저도 괜한 덧붙임이 될지 모른다. 

 
싫어해서 도망친 남편한테서 편지가 왔다. 2년 만에 머나먼 땅에서였다. 아이에게 고무공을 차게 하지 마라. 그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내 심장을 두들긴단 말이다. 그녀는 아홉 살 난 딸에게서 고무공을 빼앗았다. 또 남편한테서 편지가 왔다. 전에 편지와는 다른 우체국으로부터였다. 아이에게 신발을 신겨서 학교에 보내지 마라. 그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내 심장을 밟는단 말이다. 그녀는 신발 대신 털실로 짠 조리를 딸에게 주었다. 소녀는 울면서 학교에 가지 않게 되었다. 또 남편에게서 편지가 왔다. 두 번째 편지로부터 1개월 뒤였지만 그 글자에서는 갑자기 늙음이 느껴졌다. 아이에게 사기그릇에 밥을 먹게 하지 마라. 그 소리가 내 심장을 찢고 있다. 그녀는 딸이 세 살배기 아이인 거처럼 자기 젓가락으로 밥을 먹였다. 그리고 딸이 정말로 세 살배기 이고 남편이 재미있게 옆에 있었던 때를 떠올렸다. 소녀는 제 머대로 자신의 밥그릇을 꺼내왔다. 그녀는 얼른 빼앗아서 정원의 돌 위로 세차게 던졌다. 이 소리는 남편의 심장이 깨지는 소리가 아닌가. 그녀는 식탁을 정원에 내던졌다. 이 소리는. 벽에 전신을 부딪쳐 주먹으로 두드렸다. 장지문에 창처럼 달려들어 장지문을 뚫고 뒹굴어 댔다. 이 소리는. 엄마, 엄마, 엄마. 울면서 뒤쫓아 오는 딸의 뺨을 찰싹 때렸다. 아, 이 소리를 들어라. 그 소리에 메아리처럼 또 남편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새롭고 먼 땅의 우체국으로부터였다. 너희들은 일체 소리를 내지마라. 문 여닫는 것도 하지마라. 호흡도 하지마라. 너희들 집에 시계도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여, 너희들이여.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리고 일체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즉 엄마와 딸은 죽은 것이다. 그리고 이상스럽게도 그녀의 남편도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어있었다.
 
 _가와바타 야스나리 정사


평론가 신형철은 “어떤 진실은 내성적이고 연약해서 그저 그렇게 도사리기만 할 뿐”이라고 한다. 그런 진실이 거주하는 이야기는 진실을 고요하게 품을 뿐, 어떤 각주도 소란스럽다. 이야기라는 벽은 아주 얇고, 투명하게 진실을 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 벽을 깨뜨리거나 무너뜨리지 않은 채 간직하고, 이따금 들여다보며 진실을 바라본다. 아주 투명하게 보여서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진실을.
    
이야기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까. 굳이 허구의 세상을 만들고 읽고 나누는 건 왤까. 이런 이야기의 본질, 어쩌면 문학, 혹은 소설의 본질을 물을 수도 있는 이 질문은 많은 작가들과 독자들이 익히 접한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은 이야기는 진실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진실을 품은, 곱씹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에 대해 이해하기 좋은 글을 한 편 옮겨본다.
 
 
중국의 한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 곳을 떠났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기다림 중.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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