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갈등의 골, 그 너머엔 : 연극 < 단편소설집 >

글 입력 2016.08.1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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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골, 그 너머엔
- 연극 <단편소설집(Collected Stories)>
작 도널드 마굴리스, 연출 이곤
 

단편소설집_포스터_메인.jpg
 
 




   ‘부수고, 또 부숴야 보인다'  라는 말이 있다. 내가 규정짓거나 나를 규정짓는 어떤 것이 있다면 무의식은 갇혀있는 틀에서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상대방과 나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얽히는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존재한다. 가르침과 배움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 있는 스승과 제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연극 <단편소설집>은 바로 단편소설 작가인 루스와 그를 동경했던 학생 리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관계의 열림과 상실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그들의 견고한 사제관계는 위기를 맞게 된다.
 
 

    리사와 루스의 첫 만남은 루스의 방에서 이루어진다. 루스의 기나긴 집필 작업과 내공, 명망 있는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한 데 어우러진 방이다. 이 방에서 루스는 리사에게 작가로서의 가르침을 주며 제자에게 애정을 가지지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할 경우에는 가차 없이 질책하며 경계한다. 자신 모르게 서류를 정리해놓는가 하면 발표회에서 루스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며 자신의 의사를 말하게 된 리사와 갈등이 생긴 것이다.  이렇듯 권위있는 유명작가와 그의 문하생으로 규정된 관계는 루스에게 자신도 모르는 방어기제와 함께 그것을 지키려는 무의식을 드러내게 하였다.
 
    한낱 제자이자 조교에 머물렀던 리사의 등단과 함께, 그녀가 배움을 얻고 성숙해질수록 루스와의 갈등은 더욱 첨예하게 조성된다. 당대 영화감독 우디앨런과 그의 딸 뻘인 순이 프레빈의 열애 사실을 두고 예술가의 사적인 영역과 도덕성의 딜레마에 대해 날을 세우며 논쟁하는 모습, 루스의 신작을 보며 ‘어느 부분이 실망스러웠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리사의 모습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일방적 관계의 틀을 벗어나려는 제자, 리사를 동료작가라고는 부르지만 기존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스승의 미묘한 감정을 엿볼 수 있다.
    

 
   리사와 루스의 관계가 부서지는 클라이막스는 루스의 지나간 추억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을 리사가 펴낸 데서 시작되었다. 예술이 유(有)에서 재창조되는 것이라면, 내가 경험하지 않은 타인의 이야기가 창작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허용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 일까, 라는 물음을 던지는 대사들이 리사와 루스의 언쟁으로 쏟아져 나왔다. 리사는 스승인 루스를 애정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말을 하는 순간, 쓸 필요를 앗아간다'는 루스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스승을 대신해 그 추억을 글로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접촉하게 된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루스가 좋아할 터가 없을뿐더러, 스승의 이야기를 아무 동의 없이 자신의 소재로 착안한 무례함에 분노한 것이었다.

    가르침을 준다는 것은 기존의 생각이 언제라도 도전을 받을 준비가 필요하고,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이를 받아들이되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목의 ‘단편소설집’은 스승이자 기성세대인 루스를 대표하는 동시에 장편소설로 넘어가고자 한 리사의 도전이었다. 스승에게서 제자로, 기성세대에서 신세대로의 변화에는 필연적인 상처와 그로 인한 상실이 있기 마련이다. 사제관계의 선상에서, 앞에서 이끌어주는 스승과 뒤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제자 앞에 놓인 갈등의 골, 그리고 관계의 와해로 극은 끝을 맺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부서짐 속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며 새로운 시작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전국향, 김소진 배우, 이 두 사람이 어느 하나 밀리지 않고 무대에서 경쟁하듯 내뿜는 에너지였다. 감정의 파고 속에서 스승과 제자의 미묘한 대립각, 작가로서의 심도 있는 고찰을 옮겨낸 무대가 보고 싶다면, 또 2인극이 선사하는 감정의 깊이와 특유의 긴장감에 흠뻑 취하고 싶다면 이번 <단편소설집>의 초연 공연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심한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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