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병든 육체에서 떨어뜨린 아름다운 푸른 음표 - 연극 '쇼팽 블루노트'

글 입력 2024.01.04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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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클래식을 정말 좋아한다. 클래식은 음악가도, 번호도, 주제나 멜로디도 쉽게 파악할 수 없지만 다른 음악에서 찾을 수 없는 감동을 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피아노다. 피아노는 실제로 들었을 때 가장 좋다. 숨 쉬는 따뜻한 물질이 가장 차가운 악기라는 생명력 없는 물질을 만나 부딪치는 순간, 인간의 손가락이 정확히 악보의 음을 묘사하기 위해 그 강도와 위치를 찍어 내리는 그 찰나의 순간, 소리는 그 순간만 존재하지만 연속해서 연주되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그토록 짧고 쉽게 사라지는 것이라면 왜 이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가? 그토록 쉽게 깨지는 화음을 왜 저기 앉은 자는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음악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음악가는 실제로 아무것도 먹이지 않고 있는데, 왜 이리 듣는 사람의 마음을 채워 넣는가?

 

음악은 인간의 삶을 닮았다. 쉽게 깨지고 사라지는 인간의 육체와, 그런데도 끝없이 제련하여 화음을 만들어내는 사회,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생명력. 그래서 음악은 잠깐 존재하고 흩어짐에도, 아무것도 먹이지 못함에도 아름다우며 인간의 삶을 이어 나가게 만든다.

 

클래식이 인간의 삶과 닮았다면, 그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한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이러한 연유에서 산울림 극장의 '편지 콘서트'는 기획되었다. 음악가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끌어오고, 그가 작곡했던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짧게 연주한다. 한 음악가의 삶과 작품은 새로운 맥락 속에서 생생한 화음으로 재탄생된다. 그래서 많은 관람객이 친절한 설명보다 강렬한 경험으로 클래식의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이 편지 콘서트 중 하나인 '쇼팽, 블루노트'는 내가 가진 피아노의 이미지를 정확히 표현한 연극이었다. 여러 사람에게 음악은 다른 이미지로 다가오겠지만, 나의 피아노는 연극에서 묘사한 쇼팽의 피아노와 많은 부분 닮아있었다.

 

안내서의 표지이기도 하고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 '피아노에 기대있는 쇼팽'의 이미지는 쇼팽의 피아노가 무엇이었을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나는 그가 피아노에 기대 누워있는 것을 보면서, 조르주 상드의 품에 안겨있는 쇼팽을 상상했다. 좀 더 원초적인 이미지로 돌아간다면,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아이처럼 보였다.

 

연극 '쇼팽, 블루노트'는 조루즈 상드와 쇼팽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초반부에는 쇼팽의 병약한 몸과 천재성, 타지 생활로 인한 고립을 중심으로, 중반부부터는 상드와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후반부에는 상드와의 이별 이후의 외로운 죽음이 제시된다. 작품에서 쇼팽은 계속해서 불길한 기침을 하고, 그를 돌보는 상드의 희생적 사랑과 그 안에서 꽃피는 음악을 표현한다. 상드가 떠나자, 쇼팽은 자신을 돌봐줄 연상의 여인과 교제하고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

 

내가 표지와 마지막 장면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연극은 쇼팽 영감의 원천을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영혼은 어머니와 같은 사랑에서 기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든 흩어질 것 같은 연약한 육체와 영혼을 끌어안고 위로한 것은 피아노뿐이었다. 피아노에는 그를 지지했던 폴란드인의 인정과 아픈 쇼팽 옆에서 헌신한 조르주 상드와의 기억이 녹아들어 있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상드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비 오는 날에 피아노를 쳐댔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가 상상이 간다. 아이는 어머니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병약한 쇼팽이 믿고 의지할 것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조르주 상드뿐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드가 떠난 후에, 쇼팽이 슬픈 죽음을 맞이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마지막 순간 피아노에 안겨있듯 기댄 쇼팽의 피아노에서 상드의 온기가 남아있다고 상상한 관람객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상드의 표현대로 하늘이 보내 준 고결한 시간은 음악을 작곡했던 피아노의 시인 쇼팽.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가 써 내려갔을 음표들은 이 세상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한 몸을 가진 사람이 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찾아낸 가장 아름다운 것을 건져 올린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거기에는 분명 조국 폴란드도, 그의 가족도, 상드도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글에서 묘사한 감상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이토록 쉽게 부서질 육체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상드의 죽음을 상상하며 눈물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쇼팽의 블루노트도 채워진다. 그야말로 연약한 인간의 육체에서만 만들어내고 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음표, 블루 노트다.

 

이처럼 아름답고 깔끔한 서사뿐만 아니라, '편지 콘서트'의 전통처럼 이어져 온 연출 장치들도 쇼팽의 이야기에 드라마상을 더한다.연극은 최소한의 단위로 작품을 꾸려나간다. 무대는 중간에는 피아노, 양쪽에는 의자를 놓아 구성하였다. 양 의자에 쇼팽과 상드가 자리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상드 역할의 배우는 해설자의 역할도 맡는다.

 

작품은 작품에 관한 간략한 설명, 쇼팽과 상드의 이야기, 연주를 교차하면서 전개한다. 연주는 피아노를 중간에 두고 최소한의 조명으로 피아니스트를 집중시킨다. 이러한 전개는 편지 콘서트 시리즈의 암묵적 약속으로, 중간중간 삽입된 연주 분야는 연극의 맥락을 흩트려 놓지 않을 정도로 짧게 구성하였다.

 

이 작품이 '연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연주 분야'의 기능은 상당히 흥미롭다. 앞뒤에 쇼팽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연주 자체가 하나의 언어가 된다. 연주가 아닌 쇼팽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연극 분야'에서는 일반적인 연극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절제되어 표현된다. 쇼팽과 상드의 이야기는 현실의 대화와 정동처럼 과장되지 않은 정도로 표현된다.

 

그런데도 이 작품 전체에는 상당히 많은 정서가 흐르는 이유는, 연주 분야가 이 둘 사이에 흘렀던 마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작은 소극장에서 강하지 않은 빛을 받으며 전체에 울리는 피아노 소리는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한 표현이 된다. 나는 '브람스 편지 콘서트'에서도 비슷한 평을 남겼었는데, 편지 콘서트의 연주는 단순한 퍼포먼스를 뛰어넘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연극이야말로 클래식의 대중화를 이끌 방법이라는 확신이 든다.

 

내가 브람스의 편지 콘서트를 본 것이 2017년인데, 2023년의 마지막 달에 이 작품을 보았으니 거의 6년이 지난 셈이다. 작은 소극장의 장점을 살린 작품 시리즈의 기획 자체도 좋았지만, 몇 년 전과 비교해 개선된 점들도 눈에 띈다. 하나를 꼽아보라고 하면, 연주회처럼 연주될 곡을 제공하고 날마다 다른 피아니스트를 초대하는 부분이 좋았다.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작품이었고, 연말에 부모님 결혼 기념으로 표도 구매했다. 쇼팽의 블루노트는 여전히 남아, 우리 심장에도 그 축축한 흔적을 두드리듯 남기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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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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