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생각보다 강렬했던 음악극, '기억하지 말랬잖아'

글 입력 2016.04.24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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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대학로에 갔다. 날씨는 따듯했고 사람들은 많았다. 소극장이 줄을 잇는 이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 찬 걸 보니, 모두 무언가의 이야기를 듣고 보기 위해 나온 것 같았다.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 역시 오늘 어떤 무대를 보게 될지 입구부터 설렜다. 그냥 연극이 아니라 음악극이라 더 그랬다. 음악극 '기억하지 말랬잖아'가 하는 위치는 올래홀이었다. 위층로 올라가 자그마한 극장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보다 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연극을 미리 찾아보고 오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이 이어질지는 가닥이 잘 잡히지 않았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대체 '기억하지 말랬잖아'가 뭘 기억하지 말라는 것일지 머리를 굴리며 추측해보았지만 딱히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중에 연극이 끝나고 이 떄를 조금 후회했다. 뭘 기억하지 말라는 건지 더 고민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어야 했다. 생각보다 연극은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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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가 등장한다. 길거리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이 남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재차 사랑을 구한다. 자신과 사랑을 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한 여자가 다가온다. 사랑하겠노라고. 운명처럼 시작된 사랑은 점점 깊어진다. 남자를 보고 있으면 마치 사랑이 전부인 사람같다. 아무 이유도 필요 없이, 아무 상황에서든지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을 노래한다. 여자는 그저 남자가 로맨틱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노래하는 남자가 정작 결혼에 대한 말만 나오면 입을 꾹 다무는 것. 여자는 용기를 내어 남자에게 먼저 청혼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침묵 뿐이다. 여자와 남자는 헤어진다. 여기까지만 봤을 때에는 그저 일반적인 로맨스 코미디에 이별이라는 요소가 겸해졌다고만 생각했다.

   이 장면에 이어서 다른 여자가 등장한다. 이 여자는 전의 여자와는 정 반대의 스타일로, 처음 만난 자신에게 사랑 노래를 부르는 남자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사랑하냐고, 당신이 나에 대해 무엇을 알기에 사랑하냐고, 어떤 점을 사랑하는 거냐고 묻는다. 하지만 남자는 당연한 사랑이라 할 뿐 대답을 회피한다. 남자의 이상한 모습이 점점 부각된다. 남자는 여자와 있지 않을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처럼. 여자는 남자가 가진 아픈 과거가 있을거라 생각하고 그를 보듬으려하나 남자는 언제까지고 나사가 빠진 사람같다. 때때로 기계같다. 사랑 노래밖에 부르지 못하는 기계. 여자는 남자의 악보를 보던 중 사랑이 저주같다는 가사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남자는 다시 혼자가 된다. 어두운 무대, 고막을 긁는 효과음, 무표정한 남자. 분위기가 무서워서 계속 같이간 친구의 팔을 붙잡았다.

   사랑이 괴롭다고 할 정도면 대체 남자의 사랑 노래는 누구를 향한 노래였던 것일까?

   극이 결말부로 치달을 수록 분위기는 점점 암울해지면서 남자의 감정도 다양하고 격하게 표현된다. 남자는 환영을 본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한 여인의 모습이다.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좀 더 인간다운 반응을 할 줄 알았던 그 때의 남자는 여자와 약속을 한다. 만약 서로 만날 수 없게 된다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다케의 이야기처럼 남자가 사랑 노래를 부르며 여자를 찾아가기로. 사랑 노래를 부르며 다른 사람들과 사랑하지만 그 어떤 사람에게도 마음이 흔들리는 일 없이 여자에게로 찾아가기로. 그 이후 여자는 죽었다. 남자는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사랑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하되 사랑을 하진 않았다. 마음을 주지 않았다. 아마 이는 자기 학대에 가까운 행위였을 것이다. 환영 속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젠 힘들다고, 너와의 약속을 저버린 것 같다고. 남자가 다시 한번 사랑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연극의 막이 내린다.


   연극의 막이 내리고 극 중 보조 장치로 사용되던 작은 스크린에 '기억하지 말랬잖아' 라는 연극 제목이 떴었다. 타이밍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비로소 극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기 떄문이었다. 차라리 그 어떤 기억이나 의지 없이, 오직 모든 것을 잊고 사랑을 위한 사랑에만 매달렸다면 남자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맘 속에 에우리다케로 남은 그녀는 기억 속에 남아 현실을 재차 상기시켰다. 이 목적 없는 사랑의 굴레와 마치 저주처럼 남은 약속의 잔재를 떠올리게 했다. 모든 것의 목적은 오로지 그녀였으므로 남자는 그녀를 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한 약속을 지키려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했고, 그러려면 이 사랑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의식하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 그녀와의 기억에 얽혀 몇번이고 체에 걸러진 그의 마음은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해결책을 얻었다. 기억과 마음의 일부를 잘라서 잠가놓는다. 그래서 아마 그는 사랑만 했을 것이다. 사랑을 위한 사랑만.

   사실 남자의 자기학대적인 사랑을 이해하진 못했다. 그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여자의 죽음에 남자가 연관되어 있다거나, 원인을 제공했었더라면 남자가 그녀와의 약속에 매여 있는 모습이 좀 더 개연성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남자가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는 마음으로 약속에 목을 매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남자가 목을 매었던 것은 썩은 동아줄이었기에 제대로 끝을 맺을 수조차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그에게 남은 것은 갈 곳 잃은 약속 뿐. 과연 여자는 남자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흔적을 쫓는 것에 기쁨을 느꼈을까. 남자는 여자에게 질문을 던질 수도 없다. 계속해서 제 마음에 남아있는 그녀와만 대면한다. 끝나버린 시간 속에서 사랑과 고통과 용서가 반복된다. 앞으로 남자의 삶은 어떻게 될까? 문득 오르페스가 떠올랐다. 에우리다케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자신이 마음을 빼앗아온 수많은 여인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음을 맞이했더랬다.

   마지막에 반전처럼 펼쳐진 남자의 과거가 큰 충격이긴 했지만 중간중간 남자가 보여준 이상한 모습을 키워드로 대강 결말을 추측할 수 있었다. 로맨스 코메디의 성격이 강할 거라 생각하고 봤기에 많이 놀라긴 했다. 하지만 배우분들의 달큰한 목소리에 노래가 곁들여질 때에는 그 분위기를 잊고 노래에만 빠져들었다. 작은 콘서트를 보고 왔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특히 여자 주인공역의 오세미 배우님은 노래에서 느껴지는 전달력이 엄청나서 넋을 놓고 들었다.
 
 
   여러모로 연극의 구성이 이전에 내가 봐오던 연극과는 다른 형태라 인상깊었다. 반전 있는 이야기, 좁은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 멀티미디어의 활용, 뮤지컬처럼 노래가 곁들여졌던 콘서트같은 연극. 시간이 되면 한번 더 보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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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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