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별의 끝에선 추억이 자란다 [영화]

영화 <하프웨이>를 보고
글 입력 2024.02.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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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 그럼 다음 문제. ‘도중.’

슈: 도중?

히로: 응. H로 시작해.

슈: H?

히로: 응.

슈: 마지막은?

히로: Y.

슈: Y? 모르겠어.

히로: 그럼 말할게.

슈: 응.

히로: 할프웨이.

슈: 할프웨이?

히로: 기억해 둬.

슈: 응.

히로: 노트에 적어둬.

슈: (책을 보더니) 이거 하프웨이잖아.

히로: 아냐, 할프웨이야.

슈: 할프? (웃으며) 할프웨이래. 하프웨이잖아.

히로: 할프웨이라니까.

 

   

‘Halfway’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2년 전 <하프웨이>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를 보게 된 후로는 한 번도 이 단어를 잊은 적이 없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삿포로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 콘노 히로는 남자 친구인 시노자키 슈가 도쿄에 있는 와세다 대학에 지원하려고 하자 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무작정 그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오카다 마사키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보면 설레서 마음이 녹아내리다가도 키타노 키이의 맑고 동그란 눈망울이 화면에 비치면 금방이라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다. 사방으로 하염없이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정해진 각본 대신 현장에서의 순간적인 반응으로 장면을 이끌어 나가는 배우들의 모습도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 한몫한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Salyu의 노래 ‘Halfway’는 마지막 남은 퍼즐 조각처럼 영화의 빈칸을 완전히 채우고 여운을 이어간다.

 

그밖에도 좋아하는 이유가 정말 많지만, <하프웨이>가 내 마음에서 쉽게 떠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영화가 지나간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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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번도 졸업식 날 울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우리에게 체벌을 일삼고 말을 험하게 했던 담임선생님과 한때 친하게 지냈으나 같은 반이 되자 은근히 나를 따돌렸던 친구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뻤다. 모든 순서가 끝이 나고 그 누구와도 사진을 찍지 않은 채 미련 없이 학교 강당을 빠져나와 마주했던 텅 빈 모래 운동장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중학교 졸업식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식 날 사용할 졸업 영상을 학급마다 하나씩 만들어야 했는데, 이 영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친구들과 아주 큰 갈등을 겪고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린 나는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다시 초대하지 말라는 말만을 남긴 채 학급 단체 채팅방에서 나왔다. 그때 마음이 얼마나 후련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몇 달 후에 고등학교 통학 문제로 완전히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중학교 친구와는 연이 끊겼다.

 

고등학교에 가니 대학이라는 맹목적인 목표와 의미 없이 매일 반복되는 야간자율학습, 매서운 눈초리로 우리를 감시하는 선생님들, 잃어버린 자유시간과 점점 심해지는 만성 피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악명 높은 ‘고3’이 되어 하루하루 대학 입시라는 아주 큰 산을 넘다 보니 어느새 졸업은 기다릴 틈도 없이 벌써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평소라면 대강당에서 성대하게 열렸을 고등학교 졸업식은 코로나19로 인해 교실에서 온라인으로 단출하게 진행되었다. 졸업식에서 부르기 위해 전교생이 3년 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노래는 어떠한 감동도 남기지 못한 채 오래된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며 흘러나왔고, 우리는 그저 학교의 이름 앞에 ‘탈’이라는 말을 붙여 부르며 지옥 같았던 학교를 비로소 탈출한 것에 환호할 뿐이었다.

 

이렇게 세 번의 졸업식은 지극히 평범한 하루처럼, 어쩌면 그보다도 더 못한 날처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졸업식 하나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해도 항상 싫기만 했던 학창 시절이었으니 절대 그립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다. 졸업이 아쉬웠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 년 동안 험난한 대학 생활을 겪고 2학년이 된 나는 큰 기대 없이 틀었던 이 영화를 보다가 울고 말았다. 수업이 끝난 뒤 네 명의 아이들이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뒤로하고 체육관에 모여 농구 내기를 하는데, 그들의 모습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는 별처럼 한없이 예뻐 보였다. 그러다 이제 나에게 그 시절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명백한 과거가 되었다는 사실에 갑자기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원래 나 한 사람만 없어도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던 학교는 더는 내가 오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고, 불투명한 나의 미래에 대해 진심으로 함께 고민해 주는 어른은 이제 찾기 어려워졌다. 날 구속한다고 생각했던 답답한 교복은 벗어 던지고 나니 세상이라는 가시밭에서 나를 보호해 주는 갑옷이었고, 함께 복도를 걸으며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쉼 없이 주고받던 친구들과의 대화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 새겨져 누구를 만나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으로 흔적을 남겼다.

 

지나고 보면 마냥 소중하기만 한 것들을 그때는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눈앞에 놓인 힘든 일과 미운 사람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느라 행복한 순간들로 촘촘히 채워진 나의 똑같은 하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던 나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그렇게 너무 많은 것들을 지워버리고, 잃어버리고, 놓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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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하루하루 가까워져 오는 마지막을 혼자서 천천히 준비하는 히로가 부러웠다. 슈와의 이별을 앞둔 히로는 자그마한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며 슈에게 고백받았던 강 옆의 언덕길과 그날 자신을 간호해 준 보건 선생님, 슈가 소개해 준 친구 타스쿠의 얼굴을 사진에 담는다. 친구들과 함께 비눗방울을 불고, 농구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낸다. 지금은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지만 언젠간 영영 사라질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진다. 슈가 도쿄에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헤어질 용기가 나지 않았던 히로는 한문 선생님과 상담을 하면서 그를 붙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를 찾아가 와세다 대학에 가라고 말한다. 히로 때문에 와세다를 포기했던 슈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결국 시간이 흘러 그가 삿포로를 떠나는 기차에 올라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히로는 슈의 주변을 맴돌며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그동안 와세다 대학에 지원한다는 사실을 숨긴 슈의 목을 조르는가 하면 책을 읽고 있는 슈 위로 단풍잎을 뿌리며 떨어지라는 말을 하고,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그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슈에게 와세다에 가지 말라고 떼를 쓰는 히로의 모습이 가끔 거슬릴 때도 있었지만, 히로는 괜찮은 척 연기하지 않고 자신의 아쉬운 마음을 솔직하게 마주했다. 조금 유치해 보여도 마음껏 화내고 마음껏 울면서 감정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복잡한 마음을 비워냈기에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그렇게 씩씩하게 슈를 보내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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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웨이>는 단순히 두 고등학생의 귀엽고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을 졸업을 앞둔 여학생의 사랑 이야기로 풀어낸 영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신 치토세 공항을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사라져 버린 슈는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순수했던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을 닮아있다. 보내기 싫어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삶의 지나간 모든 것들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 헤어짐의 순간에 우리의 마음은 어쩌면 히로가 그랬던 것보다 더 거대한 소용돌이를 겪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히로의 휴대전화에 남겨진 몇 장의 사진처럼 나에게도 학창 시절에 대한 기억이 조금 남아있다. 초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과 티셔츠를 맞춰 입고 에버랜드에 놀러 갔던 날, 중학교 때 밤늦게 학교에 모여 친구들과 삼겹살을 구워 먹고 담력 체험을 했던 날,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무 이유도 없이 친구들과 교실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던 날.

 

헤어짐의 순간은 항상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지나간 후였지만,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은 노력하지 않아도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미소 짓게 만든다. 그렇게 추억에 젖어 있다 보면 가끔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과연 도쿄로 떠난 슈와 삿포로에 남은 히로는 아직도 ‘하프웨이’의 뜻을 기억하고 있을까?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당신에게 묻겠다. 이 글의 첫 페이지에서 읽었던 ‘하프웨이’의 뜻을 기억하는가? 당신이 불과 몇 분 전에 읽은 내용을 금세 잊어버렸다면, 그 이유는 이 단어가 당신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히로와 슈만큼은 삶의 ‘도중’에 있는 동안 이 단어의 뜻을 오래도록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지나가도 너무 소중한 기억은 영원히 남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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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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