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보도지침

글 입력 2016.04.0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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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애국심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애국의식이 무엇을 목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주입되는지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레 애국 시민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오히려 애국심이 무지한 대중을 세뇌하는, 비이성적이고 억압적인 감정으로 생각될 때도 많다.

 <보도지침>은 그러한 생각에 제동을 거는 연극이다. <보도지침>은 고문을 감수하면서까지 주인공들이 지키고자 했던 조국과,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애국’을 이야기한다. 각종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뜨거운 서사 속에서 드라마틱한 배경음악을 깔고 태극기와 함께 펄럭이는 쇼윈도 애국심과는 다르고,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이야기다.

 극 중반에 잡지 편집장 김중배는 연극 동아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가능하다면 모든 이들을 돕고 싶습니다. 유대인, 비유대인, 흑인, 백인이던 간에. 모든 인류가 그렇듯, 우리 모두는 서로 돕기를 원합니다. 남의 불행을 딛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이 행복한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중략)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인간이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한 자유는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 투쟁합시다. 모두에게는 일할 기회를, 젊은이에게 미래를, 노인들에게는 안정을 제공할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싸웁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 나오는,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연설의 일부다. 김중배는 ‘방해 받지 않는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 즉 소중하기 그지없는 독백을 할애하여 세상에 고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애국이고, 그가 느끼는 사명감이다.

 김중배의 애국은 곧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그는 하루 수 십 시간 침침한 등 아래서 노동을 하고 병에 걸리면 병원비도 없이 쫓겨나고 마는 이들의 삶을 눈물겨워한다. 그래서 그는 ‘그래도 나는 먹고 살만 해’라며 이들의 삶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그에게는 그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을 수 있고 억압당하는 사람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소망이 있다. 김중배의 세상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 국가인 것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겠다는 다짐이 이들의 애국가다. 그래서 그들은 권위에 맞서 진리를 지키는 내용의 금서를 연극으로 올리고 고문을 받을 때, 애국가를 부른다. 

 그러한 ‘애국’ 위에서 <보도지침>은 언론의 책무를 이야기한다. 극은 처음에 김주혁, 김정배가 보도지침이 인쇄된 종이 뭉치를 무대에 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이후에도 시시때때로 무대에 종이가 뿌려진다. 종이뭉치는 판결문이기도 하고, 잡지 <독백>이기도 하며, 과거 주인공들이 몸담았던 연극부의 극본이기도 하다. 각각의 ‘말’을 담은 종이뭉치들은 극 내내 무대 여기저기에 뿌려져 있다. 배우들은 대사를 하며 그 종이를 하나씩 줍기도 하고, 살포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면전에 들이대기도 한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종이뭉치는 언론인의 역할에 대한 상징성을 부여받는다. 언론인은 사회 속에서 아우성치는 여러 말들 중 ‘말해져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별하는 책무를 맡는다. 공론화되어야 할 것, 이야기되어야 할 것, 그리고 언론을 통해서만이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사회의 눈앞에 내어놓는 게 언론이다. 무대에 뿌려진 종이들은 사회 안의 여러 목소리다. 그리고 언론인은 그 중 몇 개를 ‘주워서’ 자신의 목소리로 읽어낸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사람을 위한 이야기다. 이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이야기다. 이는  억압받은 자들이 목이 졸려 외치지 못했던 목소리이며,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해 숨겨지고 은폐된 목소리다. 단순히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팔릴 이야기를 쓰는 것,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 모두 언론의 목표가 아니다. 언론의 눈은 사람에 있어야 한다. 사람을 보는 언론이 애국 언론이며, 언론이 사람을 볼 수 있도록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 애국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보도지침'이 이야기하는 언론인의 책무 내지 자유는 어디까지나 ‘애국’의 범주 안으로 제한된다. 그리고 극중 이야기되는 애국은 반공, 반 사회주의라는 범주로 다시 한 번 제한된다. 연극은 김주혁과 김중배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언론의 자유를 정당화시킨다. 물론 극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할 때 서사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현 대통령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보도지침'은 분명히 현 시대를 염두에 두면서 쓰인 극이다. 즉 <보도지침>은 시대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으므로, 극에서 사회주의를 부정함으로써 언론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것은 단순히 시대적 한계라는 이유로 참작되기 어렵다. 또 서사에서 필요 이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직접적으로 명시 및 부각된다. 

 따라서 연극은 극단적 반공주의 프레임과 이에 기반한 억압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공산주의,’ ‘빨갱이’라는 딱지 붙이기를 통해 수많은 목소리를 틀어막고 있다. 여당은 노년층이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극단적 공포를 부추겨 표를 받고, 정부의 치부를 까발리거나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빨갛다’는 딱지를 붙여 마녀사냥을 한다. 김수영 시인이 ‘김일성 만세’가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도지침>에서 그러한 딱지 붙이기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언론이다. 바로 그 언론이, 연극에서는 “나 빨강 아니야!”라는 변명으로 그물망을 빠져 나간다. 그물망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지는 못한 셈이다. 이러한 그물망에 대한 방관은 연극 '보도지침'의 한계이며, 동시에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현 시점 우리나라 언론자유의 한계다. ‘김일성 만세’라고 적힌 자보가 찢기는 현 사회의 민낯이 연극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반공, 반 사회주의는 이제 더 이상 애국의 전제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성장과 공정한 정치의 걸림돌이다. 우리는 냉전질서를 벗어난 새로운 애국의 개념을 정립해야만 한다. <보도지침>은 냉전프레임에 갇혀 있지만, 그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국가는 정부가 아니다. 국가는 어떠한 관료 조직이 아니라, 그 테두리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다. 결국 애국이란 그 사람들의 삶을, 권리를, 행복을 생각하는 거다. 이런 점에서 <보도지침>은 지금까지 애국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애국이 만들어져야 할 방향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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