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알츠하이머 환자에 대한 새로운 관점, 소설 < 스틸 앨리스 > [문학]

한번 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이야기
글 입력 2016.02.17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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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이야기

소설 <스틸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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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설 <스틸 앨리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스틸 앨리스>의 이미지를 첨부합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


인간의 영혼에 무게를 달 수 있다면, 기억은 그 중 얼만큼이나 차지할까. 꽤 많은 부분일 것이다. 한 사람의 기억은 인생 그 자체다. 그런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곧 나를 잃는 일일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이 암이 아니라 치매라고 들은 적이 있다. 질병이 주는 고통의 경중을 그 누가 따질 수 있을까냐마는, 기억뿐 아니라 기본적인 사고 능력까지 박탈당하는 치매의 고통은 어떤 육체적 아픔보다 더 무서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버드 대학 교수

세 자녀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

알츠하이머병 환자


리사 제노바의 소설 <스틸 앨리스 Still Alice>를 읽었다. 주인공 앨리스는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의 저명한 교수이며, 같이 하버드에서 강연을 하는 남편 존의 자랑스러운 아내이자 세 자녀를 둔 엄마다. 뛰어난 지성을 기반으로 심리학 언어 분야에 훌륭한 연구업적을 쌓은 앨리스는 어느 날 ‘조발성 알츠하이머’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을 받는다. 처음엔 나이가 들어서 조금씩 깜빡 하는 것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뛰어난 달변가였던 그녀가 강연 도중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말문이 막히고, 25년을 매일같이 다니던 곳에서 길을 잃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앨리스는 병원을 찾았고, 결국 50세의 나이에 치매 환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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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틸 앨리스>


이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이지만 현실에 기반한 논픽션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앨리스로 묘사된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실 작가 자신이다. 리사 제노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를 지켜보면서 소설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소설가로써 작가의 이력은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스틸 앨리스>는 그녀의 첫 장편소설임에도 2008년 브론테상을 수상하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아마존 종합 베스트 셀러를 기록했다. 그녀의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본 소설이 유례없이 알츠하이머 환자의 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나오는 영화나 소설을 보면 치매 환자가 느끼는 고통보다 주변 보호자의 고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작가는 할머니를 떠올리며 기억을 잃어가는 앨리스의 심리를 섬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했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의식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그 내면세계를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묘미이다.  



1층에 작은 화장실이 있었는데, 아닌가?

분명 있었다. 바로 여기. 하지만 화장실이 아니었다. 
앨리스는 황급히 부엌으로 갔지만 그곳엔 문이 하나뿐이었고 뒤 포치로 나가는 문이었다. 
그녀는 거실로 달려갔지만 물론 거실엔 화장실이 그녀는 도로 현관으로 달려가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아, 제발, 아, 제발, 아, 제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마술을 부리는 마술사처럼 현관문을 활짝 열었으나 화장실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내 집에서 길을 잃을 수가 있지?



그녀는 점점 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이해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떻게 느끼고 지각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비눗방울처럼 자꾸 하늘로 올라가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얇디 얇은 막만이 희박해지는 공기 속에서 그것이 터지지 않도록 막고 있었다.
 


작가는 알츠하이머에 점령된 한 인간이 어떻게 퇴행해가는지를, 일상의 한 순간 순간도 그냥 놓치지 않고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외면 받는 잔인한 현실도 솔직하게 그려낸다.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은 본인도 치매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까 두려워 유전자 검사를 한다. 남편 존은 아내의 기억이 남아있을 때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과 자신의 경력을 위한 기회 사이에서 갈등한다. 학교는 알츠 하이머 환자인 교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두의 존경을 받던 그녀는 불쌍하면서 동시에 피하고만 싶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은 단지 기억뿐이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그녀에게 알츠하이머란 가장 잔혹한 저주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Still Alice,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고 앨리스는 여전히 앨리스다. 달걀의 얇은 껍질이 부서지듯, 그녀 삶을 정의하던 모든 수식어가 사라져도 그녀는 오늘을 살아간다. 치매 환자 모임을 만들어 환자들끼리 우정을 나누고, 교수가 아닌 치매 전문가로써 연설도 맡는다. 병은 점점 악화되어 나중엔 자식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지만, 앨리스는 생각을 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대학을 가지 않고 연기를 하려는 막내 딸을 인정하지 못해 갈등을 반복하던 딸과의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이 기억을 잃어갈수록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회복된다. 반항기 많던 막내딸은 엄마의 곁에 머물면서 병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그녀는 딸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여배우’라고 인식하면서 그녀의 연기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낀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녀가 정상적이지 않게 보이더라도, 가족 곁에서 여전히 앨리스로 살아간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다시 새로운 것을 얻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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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일부로 남기 위해.jpg
 


Still, Alice 나는 여전히 앨리스입니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철저히 방관자였다. 책을 읽기에 앞서 호기심보다는 줄거리에 대한 섣부른 추측이 앞섰다. 치매에 걸린 50세 하버드 교수의 가여운 삶을 동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장 두 장 책장을 넘겨가면서 방관자는 점점 앨리스가 되고 있었다. 잠시 읽던 책을 멈추고 내 사고의 흐름을 새삼 점검하면서 혹시 내 뇌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앨리스가 느끼는 당혹스러움, 혼란, 난해함, 비참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가족간 일상적인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옷을 입는 법을 잊어버렸을 때, 가장 당황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녀의 가족이 아니라 바로 앨리스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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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틸 앨리스> 예고편 中 


좋은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책을 골랐다기보다 책이 내게로 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책도그런 책이었다. 적절한 시기에 맞춰 내게 와준 책, 우연 같은 필연이랄까. 앨리스를 보면서 몇 달 전 할아버지를 여의시고 혼자가 되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치매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셨지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셨다. 돌아보면 그때도 나는 방관자였다. 나이가 드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그 행동과 말 이면에 자리한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본 적은 없었다. 그저 할머니가 낯설게만 느껴지고 불편했다. 하지만 앨리스가 여전히 앨리스인 것처럼, 할머니가 조금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할머니는 나의 엄마의 엄마이고 또 나의 할머니라는 걸, 결코 변하지 않는 이 사실을 왜 인지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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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은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망령 같은 존재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을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망령이라 규정하고 피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만 같은 역경이 계속 찾아와도 여전히 ‘나’로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 이 시대의 앨리스들을 응원한다.





[윤정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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