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윤동주, 자신으로서 승리한 인간 [사람]

인간 윤동주에 대해서
글 입력 2024.03.1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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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를 그리워하며


 

유독 찬 바람이 사무치던 지난 2월 16일. 79년 전 그날은 윤동주 시인의 순국일이었다. 윤동주는 내가 가장 사모하는 시인이다. 어린 시절엔 마냥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시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나, 그의 고고한 정신이 어린 시를 접하고 그의 팬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를 유독 다른 문학인과 구분지어 가장 사모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다만 시에 있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윤동주가 살아온 삶에 있다. 오늘날에야 명실상부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지만 그의 시대에 윤동주는 단지 식민지 조선의 평범한 사람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아무런 칭호나 명예도 없던 평범한 청년 윤동주는 눈앞에 가로놓인 시대의 폭력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까지 얼마나 좌절하고 참담했을까.


오늘은 그에 대한 존경에서 우러난 경외감을 잠시 내려두고, ‘인간 윤동주’의 모습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을 새롭게 이해하다


 

그의 시 전반에 공통되는 주제는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국이 일본 제국의 통치 아래 놓인 시대에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 어떤 시대에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느냐는 문제는 인간의 탄생서부터 종속되는 운명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냉정하게 누군가는 시대의 불우함 따위 외면하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어쩔 수 없고 너무나 거대한 불의를 직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불우함을 좌초한 제국주의의 논리에 저항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용서할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창씨개명을 함으로써 그가 느꼈던 부끄러움을 나의 상황에 빗대어 다르게 이해해보고 싶다.


그것은 인류 모두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 때문에서다.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에서 그나마 오랜 기간 평화가 이어지고 있는 현재도 국민 대다수의 신념과 반대되는 온갖 불의가 일어나곤 한다. 그 원인은 개인주의를 가장한 이기주의, 부(富)와 권력의 논리, 황금만능주의 등 다양하지만, 결과적으로 평범한 국민이자 소시민인 우리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일제는 아시아 전역으로 제국주의의 힘을 뻗치고 있는 와중에 조선 사람들을 지켜줄 나라는 사라졌고, 정당한 목적도 없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인들을 향한 수탈과 폭력, 강압이 정당한 허울로 포장되는 세상. 불의한 세상임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저항을 위해서는 기꺼이 큰 희생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


그 시대에 태어나서 윤동주가 바란 것이 그리 큰 것이었을까.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국가의 보호 아래서 평화로운 일상을 향유하며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는 것. 오늘날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요구되는 그것이 죽음마저 감수해야 할 과분한 바람이었을까.


누군가는 대학 진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한 일에 대해 조국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는 일이라 비난할 수 있겠으나, 윤동주도 평범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그려놓은 미래를 실현하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테다. 더 높은 수준의 학업을 바라는 순수한 청년을 오늘날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을 텐가. 도리어 식민지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성장을 제약하였던 일제에 죄의 화살을 겨누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단지 창씨개명을 하였다는 것만으로 그에게 지나치게 과한 비난이 가해진다면 응당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단지 창씨개명을 하였다는 것만으로 일제에 동조하였다며 헐뜯기보다는, 그가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을 들여다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나는 윤동주의 부끄러움을 이해한다. 너무나 거대한 불의와 숨 막히는 강압의 시대에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사는 대가로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그에게 측은한 마음이 든다. 태어난 배경으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는 더욱 편안했겠으나, 윤동주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의에 반하는 선택을 내린 스스로에 대해 내리는 죗값이 부끄러움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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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글쓰기는 곧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의 독립운동 방식은 다양했으나, 우리가 인상깊게 기억하는 인물들은 독립단체에 참여하여 무장투쟁을 벌인 이들이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양상은 윤동주의 글쓰기와 크게 상이하다. 윤동주의 독립운동은 공격적이라기보다는 저항적이다. 즉, 자기 내면에서 일제의 찬탈을 거부함으로써 조용하지만 굳건하게 신념을 지키고, 그것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러한 독립운동의 방식 또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단지 그의 저항시가 아름다운 까닭만은 아니다. 다만 문학을 창작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실천하는 윤동주의 방식이, 시대의 위협과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그가 세운 타협점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 일상이 침범당했을 때, 모두가 들고 일어나 무력 항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소중히 지키고 싶은 일상과 가족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폭력과 강압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삶을 영위하던 인물이 순간 깨우쳐 자신의 삶을 180도 바꾸기를 기대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십수 년을 살아오며 윤동주가 꾸려온 삶과 안전한 일상이 존재했고, 그가 보호해야 할 가족들도 있었다. 이를 일부 포기하고서라도 일제의 폭압에 전면적으로 항쟁할 때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과연 알지 못했을까? 윤동주도 이러한 이유로 수십 번 무너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결단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을 표출하는 수단으로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동시에 강력한 힘을 지녔다고 믿는 문학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일상을 지켜나가면서 독립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었을 테다. 


 

오히려 윤동주의 독립운동에 진실성을 의심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과연 그가 시와 소설을 창작함으로써 식민지 시대의 조선 청년에게 주어진 의무감을 다하였다며 후련한 마음이었을까? 오히려 현실 앞에 좌절했을지언정 후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을 바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는가. 같은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문학을 기꺼이 독립에 바친 것이나 다름없다. 그로 인해 돌아올 위협을 기꺼이 감수하고서, 시대를 초월하는 문학의 힘을 믿으면서.

 

 

 

시대에 져버린, 그러나 자신으로서는 승리한 인간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걸어보면 불의에 저항하고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한 고뇌가 읽힌다. 그러한 결과로 그는 일상에서 독립운동을 실천할 수 있었다. 인간 윤동주의 고뇌와 결단이 담긴 문학이야말로 독립을 위한 강력한 호소였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인간 윤동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존경심을 품는다. 시인 윤동주의 작품에 감탄하면서도 인간 윤동주의 삶을 사모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일제의 압제로 투옥되어 잔혹한 생체실험을 당하다 순국하였다. 냉정하게는 시대에 지고 말았다고 기술될지 모르나 끝끝내 일제가 승리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윤동주의 신념은 쓰러뜨리지 못한 것이다. 


일제가 깨닫지 못한 것이 윤동주의 삶에 있다. 한 인간의 숭고한 신념은 폭력과 압제로 위협될 수는 있겠으나, 결국 그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당대의 시대를 수호하는 것은 영웅의 신념이고, 후대에 시대를 설명하는 것은 그러한 영웅들의 활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시대의 불의에 희생되고 말았으나 자신으로서는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 모두가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의 내적인 승리는 더욱 의미가 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불의하더라도, 스스로 내면을 성실히 가꾸어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에게도 무언가를 시사한다. 불의 앞에 우리 모두가 엄청난 영웅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일상 속에서 저항하며 정의를 지킬 방법이 분명 있으며 그 힘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느끼는 아쉬움에 단지 불만을 표하기보다는 윤동주의 삶을 되뇌어 그리며 나 또한 ‘자신으로서 승리’하도록 노력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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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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