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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색채, 그리고 유령처럼 떠도는 사람들

《트랜짓》 (Christian Petzold, 2018)

by 고요한 에디터
2026.06.06 15:39


 

어렵다는 감정으로 남겨두었던 영화를 우연히 다시 꺼내보았다. 이전과는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꼭꼭 씹어 남김없이 이해하려 하기보다 흘러가듯 영화를 보았다. 여전히 많은 의문을 남겼지만, 이게 이런 영화였나 싶어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보고 관련 글들도 찾아보았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트랜짓>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난민들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풀어낸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난민들의 내면세계와 현실을 탐구하고, 게오르그와 마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들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특히 사실주의적 양식과 환영주의적 양식을 절묘하게 결합한 영화의 시선은 문득 평소 좋아하던 인상주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에 영화의 시각적 표현과 내용적 요소를 인상주의 회화와 함께 살펴보게 되었다.

 

 

 

인상주의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빈센트 반 고흐 등의 화가들로 알려진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등장한 미술운동이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빛에 따라 변화하는 순간의 색과 인상을 담아 감정을 강조하는 인상주의 화풍은 생동감 있는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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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Monet, Water Lilies series

 

 

 

색채와 빛의 상징성: 감정과 분위기 전달


  

앞서 말했듯, 색채와 빛은 감정과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는 영화 연출에서도 마찬가지로 배우의 대사나 연기에 못지않게 감정과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몇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면, 마르세유에 도착한 게오르그를 흑백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흑백필름 속에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존재하며, 사람들은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리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다시 컬러로 전환되고, 게오르그의 얼굴에 빛이 들어온다. 내내 그늘져 있던 게오르그의 눈이 밝게 빛나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도 거의 유일하다. 이는 그녀가 앞으로의 전개와 그의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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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리처드를 뒤 가게의 TV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푸른 조명이 비춘다. 이 연출 속 푸른 조명이 배에 타지 못한 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듯한 리처드의 우울함을 강조하고, 관객이 그의 감정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점은 관객에게 감정적, 감각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제공하고, 저마다의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점에서 인상주의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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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복합적이고 깊은 본성을 인상주의로 풀어내다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복잡성은 게오르그라는 인물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위조된 신분과 그로 인한 갈등, 그리고 마리와의 사랑 등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담아낸다.


<트랜짓>의 결말은 전형적인 해피엔딩이 아니다. 마리를 떠나보낸 후 게오르그는 분명 마르세유를 떠났어야 하는 그녀를 거리에서 마주하지만 곧 그녀가 탄 몬트리올호가 침몰해 모두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그렇다면 게오르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리의 생존 여부에 대한 의문은 계속되며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유지한다. 그리고 게오르그의 과거 기억과 열망이 현재에 떠오른 것인지, 혹은 마리가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그가 몽벵뚜의 한 자리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은 인간의 무력함과 존재의 쓸쓸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게오르그는 바텐더가 은신처를 마련해주겠다고 말하지만,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하염없이 기다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들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구두 소리 역시 결말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게오르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나타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의 미소는 희망과 절망,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삶의 복잡성을 담고 있다. 이는 어쩌면 게오르그가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기로 했다는 표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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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는 종종 인간의 심리와 정체성을 탐구하고,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을 중요하게 다룬다. <트랜짓> 역시 주인공들의 갈등과 욕망, 상실과 발견 등 인간에 대한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마리를 알게 된 게오르그는 평온한 삶을 꿈꾸고, 리처드는 마리에 대한 애정, 직업과 명예 사이에서 갈등한다. 마리는 후회와 그리움의 감정을 느끼며 매일같이 마르세유 곳곳을 헤맨다.


세 인물의 관계는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중에 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관객이 한 번쯤 경험했을 복잡한 내면의 감정을 환기하며, 잔상처럼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현대 난민 문제에 대한 인상적 해석과 감정 전달


  

영화는 현재의 마르세유를 배경으로 난민 문제를 다루며, 이를 통해 현대적인 상황을 과거에 오버랩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의 문제를 강조하며, 시대를 초월한 난민 문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국비자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붓지만, 닿게 될 도착지는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러한 비애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떠도는 사람들의 현실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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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동일한 공간에 서로 다른 시간대의 이야기가 겹쳐지고 사방으로 열린 경유지와 달리 인물들은 마치 갇힌 것처럼 격리되어 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경계의 뒤틀림은 인상주의가 시간과 공간을 비현실적으로 변형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대표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있다. 고흐가 그려낸 강렬한 색채와 농도 속 빛나는 별들과 마을의 조명은 실질적인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넘어 상상적인 세계를 창조한다. 고흐의 내면세계와 감정 상태가 투영된 표현기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정적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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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van Gogh, The Starry Night (1889) 

 

 

등장인물들의 여정은 현실과 상상,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간다. 페촐트 감독은 이를 제3자인 내레이터(바텐더)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달한다. 이는 감독이 담고자 한 주제를 강조함과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현재 진행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는 듯한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환영주의적 양식과 사회적 소외 표현


 

유령 3부작(<내가 속한 나라(The State I Am In)>(2000), <유령(Ghosts)>(2005), <옐라(Yella)>(2008))으로도 유명한 페촐트 감독의 영화 속 유령과 같이 부유하는 인물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주변화된 개인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특징은 <트랜짓>에서도 나타난다.


게오르그는 영사관에서 만난 어느 유대인 여성과 우연히 재회해 식사하고 담배를 나눠 피운다. 그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감돌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컷에서 여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녀가 피운 담배만 남아 있다. 그가 유령과 동행한 걸까.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자살을 선택했음을 보게 된다. 한순간에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져 버리는 연출은 인간의 존재와 부재, 이미지의 무심한 침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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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의 굴레에 갇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떠도는 인물들은 마치 유령처럼 고독하고 이내 사라진다. 이러한 환영주의적 표현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물론 인상주의가 환영주의를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화나 역사적 사건보다 파리의 거리, 카페와 같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과 자연 풍경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그리고 정확하고 명료한 그림보다는 의식하지 못하면 놓치기 쉬운 찰나들을 그렸다는 점도. 그렇기에 나는 두 작품을 볼 때 더 많은 생각과 해석이 가능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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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Auguste Renoir, Bal du moulin de la Galette (1876)

 

 

 

영화가 건네는 질문


 

인상주의는 감정과 상태를 강조하는 데 효과적이며, 현대 영화에도 새로운 시각적 표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트랜짓> 역시 색채와 빛, 시간과 공간의 모호성을 활용해 난민 문제와 사랑, 갈등과 소외감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현실과 상상 사이를 부유하는 인물들처럼 영화는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가슴 속에 오래 껴안은 채 자신의 해석을 만들어가도록 관객에게 질문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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