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공포증이 있어 바다보다는 산이요, 수영은 꿈도 못 꾸는 내가 울렁거림과 불편함을 견디면서 이 절망적인 바다 표류기를 끝까지 본 이유는 어떤 사람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 여인이 날 그렇게 만들었다. 망망대해 위, 목숨을 위협받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처절하게 삶을 붙드는 ‘미아’의 집념에 그 생명력에 기가 눌려 버리고 말았다.
신세가 기구할 정도로 주인공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진이 빠지기도 하지만 주인공와 함께 힘든 여정을 버텨 낸 기분도 든다. 마치 간접 생존의 느낌이랄까. ‘생존함의 연속’은 이 영화의 큰 기둥이다. 미아의 끈질긴 발버둥과 마지막까지 악착같은 몸부림이 메인 서사다.
자신을 지키던 모든 울타리가 붕괴됐을 때 우리는 어떤 액션을 취할 수 있을까? 다음이 그려지지 않는 상황에서 다음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봐도 나는 그녀 스스로 그녀를 구한 것 같다. 다사다난한 생존 여정 앞에서 나도 모르게 주먹 불끈 쥐게 된다.
망망대해 컨테이너 생존 탈출기
<노웨어>는 임산부 ‘미아’가 희망 없는 나라를 떠나기 위해 밀항을 하던 중 예기치 못한 사고로 컨테이너에 갇히게 되면서 바다를 표류하게 되는 이야기다. 망망대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여인의 절박한 생존을 그린 작품이다.
전체주의가 팽배한 이 국가에서 망명은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자원 부족에 식량난으로 혼란을 겪는 나라는 약자를 소탕하는 정책을 펼친다. 임산부와 어린 아이, 난민들은 국가적 짐이 된지 오래다. 뱃속의 아이까지 식구가 셋. 도망만이 살길이라고 여긴 미아와 그녀의 남편은 브로커에게 돈을 건네고 컨테이너에 탑승해 밀항을 시도한다.
하지만 밀항 과정에서 부부는 서로 다른 컨테이너에 몸을 싣게 되고 다시 생이별을 겪는다. 설상가상으로 미아가 있던 컨테이너는 수색대에게 잡혀 숨어있던 사람들이 발각되면서 그 자리에서 전부 사살되고 만다. 상자 꼭대기에 간신히 몸을 숨긴 미아만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배에 실린 미아의 컨테이너가 거친 파도를 만나 따로 떨어지게 되면서 그렇게 바다 위의 표류가 시작된다. 바닷물이 거칠게 들이치는 컨테이너 안에서 미아는 힘겹게 출산을 한다. 최악의 환경 속에서 너무 힘겨워 이성의 끈을 놓기도 하지만 태어난 아이를 위해 악착같이 버티는 그녀다.
채류 시간은 어느덧 3주를 훌쩍 넘기고 물이 점점 차오르는 컨테이너는 더이상 보금자리가 아닌 탈출해야 하는 덫이 돼 버린다. 미아는 급하게 만든 뗏목을 타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해안가를 향해 나아간다.
과연 미아는 자신의 아이와 그녀 자신을 구할 수 있을까? 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생존하기’의 이미지화로 시각적 긴장감 최고조
*아래의 이미지들은 공식 트레일러 영상에 등장한 장면입니다*
1. ‘생존하다’의 연속
바다 한가운데에서 컨테이너 생존이 가능했던 건 주인공 미아의 동물적인 감각과 순발력 때문이다.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그리고 최악일수록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은 점점 더 강해진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그녀의 생존 투쟁은 강렬하고 거친 이미지로 다가온다.
때문에 날것의 장면들이 좀 있다. 시청에 수위가 있는 편이다. 도저히 먹을 게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태반을 먹고 간신히 열량을 채워 아이에게 젖을 물리거나 물고기를 생으로 베어먹으며 어떻게든 주린 배를 채우는 신들이 바로 그 예다. 동물적 움직임은 선택 사항이 아닌 불가항력의 자연적 섭리다.
2. 공간 교차에서 오는 오묘함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 공간은 크게 두 곳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컨테이너 박스 내부. 보면서 참 묘했던 것이 바다와 컨테이너 속 장면이 교차될 때마다 개방감과 폐쇄감을 번갈아 가며 느꼈다. 컨테이너가 당장은 생존을 위한 보금자리이지만 결국 탈출해야 하는 덫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활짝 열린 공간에 놓여 있으면서도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은 주인공의 무기력감과 절망감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3. 즉석 생존 도구 만들기
컨테이너 안에 실린 랜덤한 물건들. 미아는 복불복의 느낌으로 상자를 하나씩 개봉한다. 후드티, 대형 TV, 밀폐용기, 각종 술, 줄 이어폰 등등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은 아이템들이 쏟아진다. 미아는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 즉석에서 필요한 생존 도구를 만들어 낸다.
밀폐용기 뚜껑의 고무 패킹을 컨테이너 구멍을 막는 용도로 쓰거나, 줄 이어폰을 엮어서 물고기를 잡는 그물로 사용하거나, 다리에 난 상처(지나가는 비행기를 보고 SOS 요청을 하기 위해 컨터이너 위를 오르다가 허벅지 살이 심하게 찢어지는 부상을 입음)를 꿰매기 위해 술로 바늘을 소독하는 식으로. 다음에 어떤 도구를 만들어서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갈지 주인공의 생존 행보를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4. 인간의 양면성
‘다 포기하고 싶다 vs 살고 싶다’. 두 가지 면모 모두 미아 마음 안에서 서로 겨루 듯이 존재한다. 팽팽하고 치열하게 대립한다. 또 인간이 거대한 환경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취약한 존재인지 그러면서 얼마나 강인하고 질긴 집념을 가졌는지도 주목해 볼 만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미아는 배우자의 죽음을 맞이하고, 홀로 아이를 지키고, 오늘 하루를 간신히 살아 낸다. 정말이지 한없이 약하고 강한 인간의 생명력이다.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은 순간에도 사실은 희망을 향해서 한 칸씩 움직이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디스토피아’ 장르만의 힘
1. ‘디스토피아’라는 장르
디스토피아는 기본적으로 절망적이고 암울한 미래상을 이야기하는 장르이다. 그러면서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현실을 꼬집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태도를 보인다. ‘만약(If)’이라는 가정 상황을 관객에게 계속 던지는 장르이기도 하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미래를 한번 떠올려보게 하며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개연성을 느끼게 한다.
이 장르의 특징이 그러한 것이다.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면서도 계속 생각하다 보면 말이 된다. 상상과 현실의 중간쯤에서 개인적인 통찰도 가능하다. 영화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특히 <노웨어>처럼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밀도를 갖는 장르가 바로 디스토피아다.
2.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예전에는 작품 내용을 보고도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상의 영역으로 치부했는데 요즘 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서 현실과 상상에서의 거리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쩔 땐 우리 현실이 더 기가 찰 때가 많다. 사회 구조, 권력의 부조리함, 계급, 평등에 걸친 우리네 세상 문제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디스토피아는 르포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주인공 미아가 어쩌다 망망대해의 컨테이너에 몸을 싣게 됐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시작에는 자원 부족으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는 위기의 국가가 존재한다. 그로 인한 도미노 현상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고 생각한다. 결국 디스토피아라는 장르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서 뻗어 나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 세상. 약자가 내몰리는 약육강식 체제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고 추락할 수 있는지 작품을 통해 실감한다. 동시에 그 바닥을 보며 평소 당연하게 누린 나의 생명과 안위와 자유 같은 것을 새것처럼 여겨보기도 한다.
3. 최후적으로 우린 희망을 원한다
영화를 보며 말도 안 되는 시간을 함께 견딘 기분이었다. 극한의 상황을 가까스로 넘기면 또 다른 극한 상황이 주인공을 덮쳤다. 미아에게는 좌절할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자신을 제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가능성을 찾아내야 살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다 던져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주인공의 초인적인 모습은 인간의 것이 아닌 것도 같았다. 처절하게 절망하는 미아에게서 그만큼의 커다란 희망을 보았다. 살고 싶다는 희망이 절망의 크기에 비례하듯.
생존을 위한 그녀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잔상을 남긴다. 희망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맨 마지막의 것으로 언제나 희망을 원하고 있음을.
다음을 이어 갈 의지
영화 끝 무렵에 미아가 모든 걸 쏟아붓듯이, 마치 최후의 발악인 듯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장면이 있다. 그동안 잡아서 용기에 보관했던 물고기들을 바다에 한번에 풀며 갈매기 떼를 유인하는 신이다. 그 이후에 연결될 장면은 각자 한 번쯤 상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바다 한가운데 떨어진 컨테이너에 갇힐 확률은 살면서 거의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망망대해를 혼자서 표류하게 된다면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미아처럼 끝까지 삶을 붙들고 늘어질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어쩌면, 다음을 이어 갈 의지가 내게 있다면, 영원한 절망도 영원한 슬픔도 없는 것 같다. 그 의지만 있다면 희망 또한 언제나 조용하게 내 곁에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