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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이 책은 판타지 소설처럼 시작했다가, 환경소설로 정체성을 굳히는가 싶은데, 로맨스가 들어오고, 추리 소설의 긴장감도 가지며, 성장 서사처럼 끝을 맺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산업화에 따른 생태계 파괴는 다 함께 엎지른 물과 같다. 누군가는 이를 완전히 부정하고, 누군가는 마음은 쓰여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문제를 삶의 중심에 두고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여기 지구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이상 모두가 이 문제의 당사자라는 점이다. 그것이 이 소설이 환경 소설인 동시에 인간 사이의 갈등과 폭력, 연대와 사랑을 담은 이야기로 흘러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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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설 <늑대가 있었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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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자가 쥐고 있는 것


 

주인공 인티는 어려서 숲을 사랑하는 아버지 덕에 자연스레 생명체와 교감하는 법을 배웠다. 특히 ‘거울 촉각 공감각’이라고 하는 질환 덕분에, 혹 때문에, 지켜보는 모든 생명체가 겪는 고통을 함께 느끼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그녀였다. 언젠가 미지의 발자국 주인을 아빠에게 물어본 뒤, 그녀는 늑대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추적할 수 없는 짐승, 흔적을 남기지 않는 포식자. 늑대는 생명의 신비를 가까이서 배워온 인티에게 꿈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숲의 진동을 몸 깊숙이 담고 있는 그녀는, 이제 생물학자가 되어서 스코틀랜드의 숲을 찾았다. 포식자의 부재로 생태계 다양성이 소실되고 황폐해진 숲을, 늑대들을 들임으로써 재야생화하겠다는 포부이다. 자신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농경지와 가축이 늑대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주민들은 이 프로젝트에 맹렬히 반대한다. 인간의 끔찍한 면과 야생의 아름다움을 삶에서 너무나 대조적으로 경험해 왔던 인티에게, 마을 주민들은 매정한 적이다. 늑대들을 풀어놓는 것은 인간이 인간의 목적으로 살해한 숲을 되살리기 위한 가장 당위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환상 속 두려움에 의한 어리석은 대응이다.

 

하지만 ‘모두가 어우러져 잘 사는 세상’이라는 절대 선을 말하기 위해 이 소설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오래 지켜내 온 삶의 터전과 소중히 기른 약한 동물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기피하겠다는 입장 또한 어찌 당연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 속에는 공포가 키워낸 오해와 환경 보호라는 공동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도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인티 자신조차도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적으로 늑대와 생태계를 위한다고 믿었던 일이, 늑대를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본인의 선택으로 늑대를 거기에 데려다 놓고 방치한 탓에 죽지 않아도 될 늑대가 무참히 죽었다. 거기에 더해 늑대에게 너무 몰입한 나머지, 피식자 동물이나 인간의 고통에는 무감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이 개입 자체가 늑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것에 불과할까?

 

작가의 생태계 보호에 대한 신념은 이러한 부딪힘 속에서 결론에 닿는다. 환경보호란 인간으로서, 생명체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위 양식인 ‘다정함’으로부터 출발한다.

 

: 야생의 섭리가 곧 정의라면, 우리는 태초의 인류로 돌아가는 것이 맞는 걸까? 나 역시도 이러한 질문을 자주 하곤 한다. 인간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과는 심하게 다른 독선적인 길을 가고 있다고. 모든 걸 멈추고 다시 원시 상태로 돌아가야만 이 모든 부정의와 불평등을 끝낼 수 있다고.

 

인티의 아빠도 자연에 털끝 하나라도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나머지 문명의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 끝에는 피폐함과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딸에게 상처를 내고,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쓸쓸히 홀로 떠나야 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에게 다정해야 한다는 것은 비단 뜬구름 같은 공허한 말이 아니다. 특출한 지능으로 생태계 최고 포식자가 된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그것을 어디까지 휘둘러도 되는지에 대한 인지가 필요하다. 공존해야 할 생명체들에 대한 다정함을 잊고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렀다면,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니 환경 운동은 현대 사회에서 위선이나 무용이 아니다. 마지막 선택이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다정함이 남지 않는다면 모두가 파멸할 수밖에 없다.

 

 

 

폭력의 굴레


 

생명체 간의 존중이 바람직한 연쇄작용을 일으킨다면, 불행히도 폭력은 더 강력한 걸쇠를 걸고 이어진다. 이 긴 이야기에서 인물들을 끊임없이 절망 속에 밀어 넣는 것은 폭력의 기억, 특히 남성 권력에 의한 폭압이다.

 

인티는 또 다른 자신과도 같은 쌍둥이 동생이 있다. 선천적 질환 때문에 고통에 취약한 언니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맞서 싸워주는 강한 동생이다. 그러나 애기(인티의 동생)의 남편이 된 거스는 그의 아내에게 너무 큰, 너무 커서 도저히 아무 말도 뱉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폭력의 전조와 그것이 행해지는 현장을 옆에서 그대로 느낀 인티는,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애기 자신에게 남은 트라우마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그녀의 두려움이 광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 배운 진실에는 광기가 없었다.’ – 사건 이후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모두 닫아버리고, 결국 또 다른 비극에 선 동생을 인티가 묘사한 문장이다. 애기를 비롯해 이 소설의 인물들이 가장 안쓰러운 데는, 부당한 폭력에 노출됨으로써 그 분노에 휩싸여 다른 이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추함을 이기지 못해 저질러 버린 폭력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폭력을 낳는다. 엄마가 딸들에게 강해져야 한다고 다그치던 것, 그 딸들이 다른 남성의 선의의 손길도 신뢰할 수 없었던 것, 남편의 학대를 받는 이웃 여성의 일에 어쩌면 주제넘게 개입했던 것. 모든 일이 폭력의 굴레 위를 아프게 밟아간다.

 

그래서 이 이야기 뒤에는 두 문장이 남는다. ‘우리는 모두 뭐든 할 수 있다.’ 어떤 참담한 상황은, 따스하던 고운 손도 칼자루를 쥐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사랑을 안다.’ 슬플 것도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울 것도 슬퍼지는 이 세상의 힘이 아니겠는가.

 

 

 

감각의 주인


 

의식하는 감각을 그대로 전해 받는 인티의 ‘거울 촉각 공감각’ 능력은 초반엔 매우 낯설었다. 이 현상을 책을 통해 처음 접했기 때문에 판타지적인 설정으로 다가왔을 정도이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서 점점 이 특별함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느끼는 고통이 묘사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따라 불편해지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옆 사람이 종이에 손을 베이면 나도 같이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정도는 다르지만 매우 일상적인 일이다.


그리고 생태계 보호를 설계하는 인티에게 이러한 특성을 부여한 것에 작가의 분명한 의도가 느껴졌다. ‘공감’은 인간에게 너무나 큰 가치이자 능력이다. 공감이 앞서 말한 다정함에 동기를 부여할 테다. 하지만 식물이나 늑대는 고사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인간에게도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공감은 힘들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런 DNA가 남아있다는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아플 때 남이 나를 도울 수 있도록, 나도 아픈 남을 돕는 것. 주변의 생명들을 자꾸 감추고 지우는 오늘날이지만, 공감을 통한 생존 전략을 기반으로 나가는 발걸음이 인류를 재생할 것이다.


외면하지 못하고, 외면하지 않는 감각으로 다른 생명을 고스란히 머금는 그녀의 언어로, 숲의 녹음과 정기를, 인간의 야생적 본능과 고통을 느껴보길 권한다. 늑대의 보드라운 털과 체온이 당신에게 기대어 오는 꿈을 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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