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이창동이 소설가인지 몰랐다. 어딘가 먹먹하고 생각이 많아지는 이창동의 영화들이 문학적이라 느끼긴 했지만, 처음부터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건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鹿川에는 똥이 많다」는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가 추천해 주었다. 네가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당부가 마음에 남았는지,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곧장 중앙 도서관으로 향했다. 문학과 지성사 네 글자가 한자로 박혀있는, 투명 테이프로 단단히 코팅된 책이었다. 그 자리에서 단숨에 절반 넘게 읽어 내려갔다. 단편집임에도 흡입력이 훌륭하고, 인물의 서사와 관계의 입체감이 뛰어났다. 글이 마치 영사기가 된 것처럼 머리 한 편에서 영화가 재생되었다. 영화를 볼 때 책장이 넘어가는 듯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총 다섯 작품이 실려있다. 성민엽의 해설과 짧은 작가 후기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길이나 분량과 관계없이, 다섯 작품 모두 완성도가 뛰어나고 한 작품 한 작품이 살아 움직인다. 세계가 작품의 끝과 함께 종결되지 않고 계속 지속될 것이란 인상을 선사한다. 영화로 만들어줬으면- 하다가도 이렇게 글로 영원히 남아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고. 이런 게 소설가구나 싶다.

 

다섯 작품은 각자 존재하는 듯하지만 결국 또 합쳐져 우리에게 어쩌면 통일된 고찰을 전달한다. 성민엽의 해설을 적극적으로 빌려보자면, 진정한 가치 탐구 바로 그것이다.

 

요즘 나도 참 그렇다. 졸업이 다가오면서 생각이 많다. 주변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깊어지다 보면 항상 한 가지의 딜레마에 봉착한다. 나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돈과 자아 실현 그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 것이겠고,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진정으로 삶을 사는 것처럼 산다고 느낄까-라는 것이겠다.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식재료를 고르듯 선택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다. 애초에 이것과 저것, 이분화하여 나눌 수 없을뿐더러 둘 간의 연관성이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 사회에서 인정받아야 하지 않겠어?, 사회가 이렇다면 난 최대한 올라탈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살 거야-, 소소한 행복을 즐기며 살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들. 이 세상을 더 평등하게 바꾸고 싶어-, 모두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가 되게 할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 속에 우두커니 선 나는 귀가 마구마구 커지다가도 어느 순간 이 과정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애당초 답도 없는 질문을 붙잡고 있기보단 그저 흘러가듯 그저 눈앞에 주어진 것에 전념하며 사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가 승리의 깃발을 흔들고 있으며, 그에 힘입어 황금 주의가 팽배하고, 과학과 이성의 담론이 지배하고 있다. 이 속에서 진정한 가치 추구는 그 자체로 넌센스, 즉 허무하고 터무니없으며 그저 구름 위를 걷는 소리로 치부된다. 이창동의 작품은 가치 탐구를 잃은 착잡한 삶 속에서, 근원적 가치의 가능성과 방향을 제시한다. 특정한 사상이나 도식을 넘어서, 더 근원적인 가치를 바라본다. 그 가치가 적극적으로 뿌리 뽑혀 사회에 나와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의 심리를 면밀히 조명하여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그러나 필수적인 질문들을 끝없이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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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아내와 어린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민주주의 운동에 전념하여 살아가는 장병만(진짜 사나이). 우리는 감히 그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그저 무거운 현실에서 도망쳐 나와 그저 도피할 곳을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는, 행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과연 아주 잘못한 일이냐 되묻고 싶다. 우리는 단연코 그런 적 없으며 앞으로도 절대로 그러지 않으리라 할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도망쳐 나오는 것이 그토록 비난받을 일인가. 쇠사슬로 자신과 리어카를 묶은 채 온몸을 맨바닥에 던져 세상의 무게를 떠밀어 가는 명동 바닥의 장병만을 지켜보는 작품 속 소설가 '나'. 를 지켜보는 독자 '나'. 가 느끼는 딱함은 이토록 멀어진 거리에 속아 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아버지(용천뱅이)는 어떠한가. 혁명을 위해 한 몸 불사지르지도 못하고, 돈을 벌어 출세하며 가정의 안락을 지키지도 못한 아버지는 간첩죄를 뒤집어씀으로써 마침내 용천뱅이 신세에서 벗어나 지난 삶을 구제하고자 한다. 감히 말하건대, 장병만 보다 훨씬 더 힘든 마음일 것이다. 그는 정말로 간첩이 되어버리는 것을 원하고 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도 아니고, 간첩의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롭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그저 또 다른 용천뱅이가 될 짓이라 비판하는 아들과의 이루어지지 않은 화해는 우리로 하여금 들여다볼 수 있는 뻥 뚫린 구멍을 선사한다.

 

용천뱅이와 비슷하게, 여기 어떤 곳에서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감각에 고통받는 소녀(하늘燈)가 있다. 신혜는 엄마를 완전히 사랑하거나 가엾게 여기지 못하고, 수임이와 뜻을 동일시하지 못하고, 야학에서도 노동자와 같은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다방에서도 함께 몸을 팔지 못한다. 어디에 가도 애매하게 손바닥 정도만큼 붕 떠 있는 듯한 기분. 탄광촌 첫 도착과 함께 뒤집어쓴 낯선 이의 체액이 그토록 반가웠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낯설고 험악한 땅의 환영을 받아 순식간에 일원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에 매료된 것이다. 신혜는 남들이 나에게 부여한 '나'와 진짜 '나'의 합치가 이루어진 경험이 없음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자신의 죄, 남에게 손을 내밀어보지도 못하고 남의 손을 잡아보려고 생각하지 못한 죄를 깨닫는다. 나흘 만에 경찰서에서 풀려나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진정한 '나'를 느끼고 삶에 대한 강한 사랑과 열망을 경험한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녀는 오랫동안 그 별을 올려다보았다. 별을 이렇게 가까이 느껴본 것은 그녀의 생애에 단 한번도 없었다. 자신이 경찰서에서 그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던 때에도, 김광배와 함께 있던 시간에도,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변함없이 자기 궤도를 돌고 있고, 우주 속의 저 별은 외롭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반짝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신혜는 얼음을 뒤집어쓴 것 같은 오한과 함께 자신의 내부에서 뭔가가 혼돈을 뚫고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늘에는 저 별이 있고 나는 여기 이렇게 서 있다. 아무도, 그 무엇으로도 저 별의 자리를 빼앗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내 가슴 속에도 어떤 세상의 힘으로도 빼앗지 못할 별 하나 있으리라. 그래, 난 이렇게 살아 있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감정이 벅차도록 가슴에 파고 들었다. 문득 그 별이 그녀의 눈앞에까지 날아와 부서졌다. 어느샌가 까닭을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혜가 밤하늘의 별에서 치유를 받았듯, 흥남(운명에 관하여)은 아버지의 유물, 고물 시계에서 치유 받는다. 흥남은 공주님에게 키스를 받지 못한 채 갇혀버린 두꺼비처럼, 혹은 마츠코의 혐오스러운 일생처럼, 항상 행운이 바로 코 앞에서 달아나 평생을 불운 속에 살아왔다. 그런 그가 결국 자신의 손으로 들어온 아버지의 고물 시계를 바라보며, 운명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가히 놀랍다. 이제껏 그를 괴롭혀왔던 지긋지긋하고 원망스럽던 운명.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지난 삶 전반을 긍정하고 구제해 낸다. 신혜와 흥남 모두 조력자나 타인이 구원을 선사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의 치유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큰 가치점을 시사한다.

 

긍정과 구제를 통한 치유만이 여기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준식(鹿川에는 똥이 많다)의 진한 울음이 있다.  똥과 오물이 많은 녹천, 그 위에 높게 쌓아 올려진 아파트에 사는 준식과 그의 아내는. 그저 그래야할 것 같아서 결혼을 하고,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선생이 되고,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거실에 수족관을 놓는다. 그럴듯해 보였던 자신의 가정이 민우의 등장으로 인해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 위에 세워진 거짓의 삶'이라는 것이 드러나며 균열은 시작된다. 무거운 수족관을 등에 업고 아픈 배를 움켜잡으며 집으로 향하는 준식은. 이렇게 사는 걸 정말 산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아내의 말을 떠올리고, 최승호의 북어가 연상되는 금붕어를 바라본다. 끝내 민우를 신고하고, 그러나 또 모른 채 달리고, 넘어져 똥 더미 위에서 울부짖는 준식이 낯설지 않다. 참 남 일 같지 않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고상하고 우아한 삶? 어쩌면 똥이 가장 인간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체면을 버리고 생계를 위해 빵을 훔치고, 용변을 시장 바닥에 해결한 어머니가. 진실과 도덕을 위해 싸우는 민우보다 더 인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순결함과 품위를 잃어버린 세상 속에 사는 준식과 달리, 민우는 고고한 이상과 도덕의 세상 속에 산다. 똥 더미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준식, 그리고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당장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다고 같은 세상에 속한 게 아니다.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다(퍼펙트 데이즈, 2024).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세상에 속할지 선택할 수 있다. 비록 그 선택권이 공평하냐는 물음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으나. 그래도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삶을 다시금 제대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타인의 삶을 알고, 이해하고, 끌어안아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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