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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실험적인 공연을 자주 시도하는 세종 S씨어터에 토끼가 찾아왔다. 지난달 예매 창이 열렸지만,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극히 한정적이다. 연극을 보러 오는 결정을 내리기 위한 조금의 정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알려진 정보라고는 ‘감독도,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오르는 단 한 명의 배우가 대본을 처음 마주한다’라는 것이다. 실험적일 수밖에 없다. 배우조차 낯선 이 극을 보는 관객은 현장에서 배우와 함께 호흡하며 낯선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공연을 예매할 때는 정보가 없다고 하더라도, 공연이 10회차에 접어들면 무어라도 이미 관람한 관객에게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한 미지의 영역을 다른 관객들도 느끼길 원하기 때문인지, ‘관객 참여형’ 외에는 어떠한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다. 그렇게 필자는 물음표가 가득한 머리를 들고 공연을 보고 나왔다.

 

이 연극의 제목은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이다. 공연은 5월 25일까지 이어지며 매일 다른 배우가 무대 위에 등장한다. 지금부터 연극의 제목은 편하게 ‘하얀 토끼 빨간 토끼’라고 부르겠다. 극작가는 이란 사람이지만, 우리가 공연을 볼 이곳은 한국이니 말이다. 먼저 소감을 짧게 이야기하자면, 다른 친구들에게도 한 번은 보여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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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공연의 정보를 파악하고 싶었다.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얻는 정보는 ‘관객 참여’뿐이며, 공연 시간이 70분이라고 공지되어 있지만 120분을 넘긴 회차도 존재한다는 것뿐이었다. 필자는 책을 읽을 때, 영화를 볼 때는 스포일러를 피하지만 연극 고유의 현장성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 연극, 뮤지컬 관람 전에는 꼭 정보를 예습하고 극장을 찾는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으니, 필자의 습관을 포기하고 빈칸을 남긴 채 공연을 봐야 했다.


올해 공연에 관한 정보를 찾기 어려우니 과거도 살펴봤다. 한국 첫 공연은 ‘2016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공연집단 우주콜라주의 창단 공연이었다. 다음 해 ‘2017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무대에 올랐다. 연극을 보며 필자가 ‘어떤 배우(이번 배우 라인업에 존재하지 않는)가 맡은 공연이 있다면 보고 싶다’라고 떠올린 배우들이 있다. 그들은 필자가 한 차례 이상 1인극으로 만나서 홀로 무대를 이끌고 가는 능력이 너무도 인정된, 믿고 보는 배우들이다.


놀랍지 않게 그중 한 사람이 2017년 초연 때 존재했다. 손상규 배우다. ‘하얀 토끼 빨간 토끼’를 그의 연기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 대본으로 연기한 배우는 공연을 두 번 할 수 없으므로 물 건너간 기회이다. 무척 아쉽지만, 그가 과거 이미 선택한 작품을 보았다는데 기쁨을 느끼며 위안한다.

 

공연 관람을 마친 후, 연극에 대한 사전 정보를 찾기 어려웠던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보았을 때, 정보가 하나둘씩 연극을 보며 쌓여가는 환경에서 이 극은 더 큰 역량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필자도 주어진 정보만으로 (하지만 더 이 연극이 상상되고 궁금해지도록) 후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대본을 처음 읽는다는 설정은 단순히 관객의 관심을 처음에 빼앗기 위해 삽입한 도구가 아니다. 대본을 배우조차 처음 마주하는 상황은 극의 중심이고, 공연장에 있는 모두가 텍스트에 몰입하게 되는 시작점이었다. 처음 연출이 올라와서 하는 말처럼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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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한 이야기를 배우가 대사, 표정, 행동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아닌 배우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의 실험이다.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르고, 오직 대본이 이끄는 대로 배우도 관객도 무대에 올라와 움직인다. 그날의 배우마다 대본을 수행하는 방식이 다를 것이고, 관객 참여는 더욱 공연의 즉흥성을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참여라고 부르는 극작가의 조종에 일부가 된다. 과거에, 이 대본을 쓰는 그가 15년이 지난 미래에 한국의 공연장에 함께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된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의 말에 오롯이 집중하고 귀 기울이는 일만 할 수 있다.


연극이 끝나고 광화문을 걸으며 정세랑 작가의 말을 떠올렸다. 놀라운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그의 글은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정세랑 작가는 소설이 '자본으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운 예술'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서 시작된 문학이지만 결코 현실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상상의 한계를 돌파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하얀 토끼 빨간 토끼’는 지금껏 본 공연 중에 가장 새롭고 특별한 극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필자도 그처럼 글을 통해 전 세계의 공연장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렴하게 세상을 누비며 공연 시간만큼은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로 그 자리에 머문다는 게 정말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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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본 연극의 배우는 사실 배우가 아니었다. 이번 공연에서 유일하게 연기를 해본 적이 없는 한 사람. 대한민국의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님이다. 이분의 공연을 보게 된 이유는 ① 연극을 보러 올 팬이 확실한 배우들보다 원하는 자리를 구하기 어렵지 않았고, ② 연극 소개부터 실험극일 것을 예상했기에 교수님과 함께라면 심리학 실험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③ 배우는 아니지만 교수이기에 발성이 좋으실 거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또, 다른 회차 공연을 보지 못해서 비교해서 말하긴 어렵지만, 교수님의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라 그런지 협업이 잘 되었다. 연극에 참여하고 싶은 지원자가 많았고, 필요한 물건들이 이곳저곳에서 슬금슬금 등장했다. 미리 알고 준비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날 것의 소품들이라 더 그 상황이 흥미로웠다. 마치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교수님을 열심히 도와 하나의 프로젝트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공연은 아직 반 이상, 충분히 많이 남았다. 원하는 자리를 찾긴 어려워도 대부분의 배우가 모든 위치의 관객들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무대를 다양하게 쓰기 때문에 어디든 구하기만 하면 연극에 참여할 준비가 되었다. 2017년 이후로 8년 만에 돌아온 이 연극이 다음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새로운 형식의 1인극을 경험하고 싶다면, 배우의 대사에 온전히 집중한다면 만족스러운 관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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