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배짱인지, 마감을 몇 시간 앞두고 초고 하나 쓰지 않았다.
초인적 힘으로 소재를 쥐어짜 내 보지만, 오늘 저녁은 돈까스일지 제육일지 뜬구름 잡기 바쁘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자와 나는 점점 어색해져만 가고, 이제 나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한다. 그러한 관계로, 어쩔 수 없는 필살기다. 군대 얘기나 늘어놓자.
전역도 벌써 1년 전 일이다. 재입대를 하느니 밀항을 하겠다던 다짐과 달리, 아버지가. 형이.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놀랍게도 나는 다시 군대를 가고 싶다. 지금 와서 보니, 그곳에서 불행했던 기억은 너무나 사소했고. 그곳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너무나 귀중하다.
여직 기억에 선명한 막사와 막사 안 화장실 위치. 자주 막히던 변기와 은근하던 풀 냄새, 밤꽃 냄새까지 전부 기억에 선명한데. 맞후임 성빈이 석희 준현이 말투도. 동기 선우 정빈이 수용이 채민이 근현이 발냄새도. 동갑 동욱이 사투리도 여직 선명한데. 왜인지 나는 이제 그곳에 없는 사람이다.
전역 이후 나는 아주 탄탄대로다. 바라던 대학에 합격했고. 바라던 여자친구와 바라던 연애도 하고 있다. 술도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마실 수 있고. 영화도, 여행도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보고, 갈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미슐랭 라면보다 보급 신라면이 더 진한 것만 같고. 초호화 리클라이너 영화보다 옹기종기 쭈그려 몰래 보던 무료영화가 더 재밌는 걸까. 으쌰으쌰 보다는 꾸역꾸역. 다 같이 보다는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지금이 그곳, 그때 그 사람들 앞 공허하고 허무하다.
그게, 그러니까 바깥세상이 고단할 때. 그럴 때마다 그곳이 자주 그립다. 그 사람들이 자꾸 떠오른다. 휴가 때 맛보던 달콤한 바깥세상이, 매일 마주하니 아주 가끔 달콤하고 대개 씁쓸하다. 웃을 일은 거의 없고 한숨은 갱신된다. 한숨 쉬다가도 웃을 일이 생기고. 갑갑해도 달콤함을 기약하며 쌍대를 나눠 피던 그곳이, 그때 그 사람들이 나는 정말 보고 잡다.
성빈아, 요즘도 회계사 공부 계속하니? 석희야, 요즘도 클럽 자주 가니? 준현아 요즘도 닭볶음탕 나오면 밥 두 그릇씩 먹니? 선우는 그림 계속 그리고 있니? 정빈이 수용이는 살 좀 빠졌니? 채민아 요즘도 담배 그렇게 많이 피니? 근현아 이제 잘 씻니? 동욱아 수능은 어땠니?
얘들아, 잘 지내니? 전역 날 우르르 내려와 주었던 너희들이 나는 자주 보고 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