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봄이 다가올 때면 굳이 올 한 해를 점쳐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피어나는 꽃봉오리가 마치 새로운 시작 같아 알 수 없이 설레기도 하는데, 그 가지에 한 줄기 희망을 심으며 작년보다 나은 한 해를 맞고픈 마음이 커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혹은 더 나은 1년을 위해 작년의 일을 되감아 보다 보면 올해도 똑같은 일들이 되풀이될까 두려워 굳이 겁먹게 되어 그럴 수도 있다. 정작 운세나 점을 보다 보면 행운과 불운이 정확히 언제 우리의 삶에 닥쳐올지 알 수도 없는 일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의 매일 별자리 운세를 확인한다. 십이궁도 중에서 나의 별자리가 비교적 운세가 나쁜 낮은 순위에 자리할 때면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들기도 하는데, 간혹가다 당당히 1위에 그 이름이 적혀있을 때면 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막 차오른다. 뭘 해도 될 것 같은 기분,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똑같은 하루인데도 이상한 보람이 따라온다.
그러나 운세가 나쁘다고 해서 그날을 아예 비관적으로 버릴 수는 없다. 나에게 그날은 상승세가 있으면 당연히 하락세도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날이다. 이럴 때마다 언제나 나에게 스스로 건네는 어쭙잖은 말이 있다. 인생은 하나의 여정이라고. 좋은 일 나쁜 일 다 겪을 수밖에 없는 그런 과정이라고. 이런 작은 행위에도 의미 부여를 하며 살자니 머리가 꽤 아프긴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스스로를 다독이는 법을 깨우쳐 간다고 생각하면 그날의 운세가 나쁠지라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렇게 여정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가끔 여행이라면 다 좋은 일만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억울할 때도 있지만,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좋은 점은 닥쳐오는 불행까지도 추억으로 남기게끔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예고 없이 문을 닫은 기대했던 가게. 맞닥뜨리는 순간 온갖 짜증이 밀려오지만, 그 순간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인연과 장면들은 새로운 감상을 심어주고, 시간은 이 감정을 열심히 다듬어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든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에는 분명 태생적 기질도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접해온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대개 노래로 나에게 전해져왔다. 수없이 많은 가사와 멜로디, 목소리와 연주가 삶을 노래 해왔다. 그리고 이렇게 인생을 노래할 때 아티스트들이 가장 많이 사랑하는 소재를 꼽자면 단연코 ‘여행’일 것이다. 가사로 풀기도 쉽고, 청자들이 연상하기도 쉽고, 무엇보다 공감이 쉽다.
여행과 노래, 인생. 낭만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순간 마음속에는 울렁이는 설렘이 생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과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고양감이 동시에 휘몰아친다. 그 감정이 인생을 곧 즐기게 만들고, 불행에서 행운으로 나아가는 힘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제일 큰 영향을 준 여정을 담은 노래 세 곡을 소개한다.
청춘들의 뱃노래, 세븐틴 - My My
하루하루 눈을 뜨고 나면
새로움 투성이
거울 속에 나는 나를 만나
새로운 나를 꽃피워
2020년도 6월에 발매된 세븐틴의 미니 7집 ‘헹가래’의 수록곡. 나와는 2022년의 시작을 같이한 노래다. 그런 속설이 있다. 1년 중 가장 먼저 듣는 노래가 그 해를 결정짓는다는 믿거나 말거나스러운 가벼운 미신이. 처음에는 케이팝 팬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지던 장난스러운 문화였는데, 이제는 대중 대다수가 알게 되어 매 해마다 1월 1일 12시 신년 차트를 확인하는 재미도 생겼다. 그래서 몇몇 팬들은 좋아하는 가수의 좋아하는 파트를 들으며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미리 노래의 재생 시간을 정해놓기도 하고, 미리 재빠르게 재물운이 좋은 노래, 들으면 성공하는 노래 등을 찾아놓기도 한다.
평행선을 넘어 꿈의 노를 저어보자
행복의 시간은 마음속 주머니에 가득 차
서두르지 마 늘 충분하니까
그대로 있어도 돼
나의 여행의 시작은 나야
내가 한 해를 이 노래와 시작하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바라던 청춘을 그대로 담아낸 노래이기 때문이다. ‘My my’는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이 아니라 희망으로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과 불안하더라도 이 모든 과정을 여행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낙천적인 마음을 한데 담아냈다.
가장 혼란스럽고 역동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내용이다. 20대 청춘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모호한 도전 정신으로 휩싸여 갈피를 잃기 십상이다. 어디로, 어떻게, 얼마나 가야 할까. 벌써 인생에 답이 없어 보일 때 이 노래를 틀면 마치 고래의 노랫소리 같은 인트로 멜로디와 트로피칼 느낌이 나는 드럼 리듬이 이 막막한 기분을 설렘으로 휙 변신시켜 준다.
저 태양 위로
My my my my my way
한 걸음마다 가까이 가까이
내가 바라던 곳이야
흔들리지 않게 맘을 잡아
나에게로 Oh oh
가까이 My my way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를 처음 감상할 때의 두근거림이다. 그 순간의 설렘은 현실의 바다에서 뭐라도 열심히 젓고 싶게 만든다. 밀물이든, 썰물이든 상관없이 푸르른 바다를 항해하고픈 마음이 든다. 청춘의 뱃노래다.
그러면서도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위안을 건넨다. 주변을 살펴보면 모두 훌쩍 나아가고 성장하는 모습에 괜히 초조해지고 무서워진다. 뒤처지고 도태된다는 공포 속에서 별것 아니어도, 그대로여도 괜찮다는 한마디는 굉장히 큰 힘이 된다. 내가 가는 길의 궁극점이 어디인가, 언제부터 나는 나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을까. 시작은 했을까. 잠시 머물러 숨을 돌리게끔 만드는 마법의 한 문장이다.
꿈 바깥에서 내가 바라본 나의 길, 송소희 – Not a Dream
Like sea, like ocean
나의 안식이 기다리지
있나 내게도 드디어
구름곶 너머 꿈이 아니야
나의 날 온 거야
2025년 3월 21일 발매된 송소희의 ‘Not a Dream’이다. 처음에는 미발매 곡으로 공연에서만 부르던 곡이었는데, 며칠 전 싱글로 발매되어 음원 사이트에서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노래를 알게 된 지는 2개월이 좀 넘는다. 어쩌다 알고리즘에 의해 라이브 영상을 접한 된 순간에는 충격스러워 듣는 것을 아꼈는데, 몇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목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을 힘이 생겼다. 한창 국악 소녀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귀여움받던 송소희가 개척한 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노래 시작부터 조곤조곤 바람결을 느끼는 듯한 속삭임이 부드러운 기타의 선율과 함께 들려온다. 마치 눈앞의 풍경을 의심하는 듯한 목소리지만 어쩐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단순한 희망이 아니다. 발견하고자 했던 꿈의 풍경, 이곳에 당도하기 위해 거쳐온 수많은 나날을 회상하는 듯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가능성의 풍경을 마주한 송소희는 그 뒤로 감격하듯 목소리를 키운다.
마음을 놓아
이곳에서 널 불러
눈물은 닦고
달려온 나의 저 길을 바라봐
국악의 미가 드러나는 특유의 창법과 탁 트인 발성, 곧게 뻗어나가는 맑은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 울린다. 뒤를 받치는 감미로운 바이올린과 박차를 가하는 리듬은 벅찬 고동을 이끌어내고, 눈물겨운 해방감을 선사한다.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듣는 이들에게도 전해져 오고, 눈앞에는 어느새 비현실적인 푸른 초원과 커다랗게 피어오른 뭉게구름이 보인다. 노래 중간중간 시원한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칠 때면 풀이 바람에 스치우며 마구 휘몰아치는 꿈과 같은 장면들이 눈앞을 지나간다.
하나 마음에 숨이 불어
하나 바람 온도를 느껴
아- 그래 내가 바란 거야
의심스럽고 위태로웠던 나날들이 쌓여 절경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다. 헤맨 끝에 기어코 바라던 순간을 마주한다면, 그 모든 구석을 누비며 달리고 싶어지지 않을까. 코끝에 닿는 풀내음과 촉촉한 흙을 만끽하며 질주하는 순간 '살아있다'고 그 누구보다 명확하게 느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곳이 종착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그림들이 수없이 많이 남았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이 초원에서 억눌려 있던 마음을 놓아주었다면, 이제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길로 나아갈 순간이다.
아무도 모르게 날아오른 포근한 비행, 투어리스트 – 유랑
빛바랜 오후 햇살에
낮잠이 늘어만 갈 때
어디론가 던져놓은 닻줄을 되감아
2015년 발매된 투어리스트의 리패키지 앨범 ‘유랑-설렘 가이드북 Repackage’의 타이틀곡 ‘유랑’이다. 조용한 일본의 작은 섬, ‘이키섬’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작곡된 곡으로 시원하되 동화적인 현악과 피아노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앞선 두 곡보다는 확실히 잔잔한 매력이 돋보이는 곡인데, 나른한 한낮의 햇살 같기도, 고요한 한밤의 달빛 같기도 하다. 왠지 모를 아련함은 덤이다. 그렇게 자박자박 촉촉한 땅을 밟는 것 같은 섬세한 목소리를 따라 노래를 감상하다 보면, 어느 특정한 순간 몸이 둥실 날아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날아가도 돼
바라고 바라던 나만의 여행
눈 감아도 돼
도시의 불빛에
긴 밤 소란스러울 때
나의 맘 채우네, 별의 노래들로
바로 순식간에 고조되는 코러스 파트 때문이다. ‘날아가도 돼’, 라는 주문 같은 말에 마법처럼 마음은 두둥실 떠오른다. 어디든 내가 상상하는 대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유로움은 눈앞에 반짝이는 윤슬, 혹은 도시의 불빛을 별빛처럼 모두 그려낸다. 마치 피터팬과 웬디, 알라딘과 자스민이 된 것처럼 말이다.
이 노래를 제일 많이 들은 시절은 고등학교 3학년, 10대 중에서 제일 생각이 많고 길었던 시절이다. 불안한 미래와 다가오는 결정의 시간들이 가차 없이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에게 제일 필요했던 건 현실을 잠깐이나마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필터였다.
이 노래가 그 얇은 장막 같은 필터였다. 누군가에게 밤은 안락한 휴식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시간이 누구보다도 소란스러운 고뇌의 시간이다. 그 고뇌를 느끼는 사람이 나였고, 그 시간은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올 때마다 반복되었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의 가로등이 습기에 번져 무지갯빛으로 빛날 때, 그 길을 혼자 거니는 시간이 누구보다도 소란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시선을 바꾸고 싶었다. 뿌연 눈앞을 희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이 노래를 틀었다. 그러면 그 거리가 아름다워 보였다. 발밑이 붕 떠 있는 것같이 가벼웠고, 삶이 한 편의 여행 같았다.
남몰래 숨겨둔, 비밀 소원마저 들켜버릴 것 같은
고요한 밤바다
그래 그렇게, 천천히 떠올라
우리의 유랑
그렇게 내일에 대한 기대와, 매일을 반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오늘이 비록 어둡고 우울한 하루였어도 마무리가 이렇게 아름다우니 내일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지금까지도 꽤나 향기롭고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
이 셋은 비슷한 주제로 노래하고 있어도 각기 가지고 있는 매력이 달라 선곡하면서도 듣는 재미가 있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풍경, 비슷하면서도 다른 여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남는 감정은 다시 하나로 모인다. 선명한 고양감. 뭐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의 상황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길래 이 고양감을 느낄 수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한 나날이었을 수도 있다. 이미 기쁜 일이 생겨 자신감이 가득 차 있을 수도 있다. 미치도록 힘들고 지쳐 다 놓아버리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평행선 너머로 노를 저으려면 자연스레 꽤나 힘이 들 것이고, 마음을 놓으려면 그 전에 꽉 붙잡혀야 했을 테고, 날아오르려면 무거운 중력을 박차야만 한다고. 그럼, 그 풍경이 보일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의 여행이자 항해이자 비행이라는 사실은 눈을 시리게 만들면서도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절망과 희망이 반복되는 세상에서 진정한 건 희망 그 자체가 아니라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다시금 깨닫게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던가. 정말 지겨운 말이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정설이기에 다시 고생에 나의 낙을 걸어야 하는 이 현실이 지독하리만치 아름답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나의 인생을 점쳐보고 싶다. 언제 어떤 고난이 나를 덮칠지 궁금하다. 언제 명확하게 수준 이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직접 겪는 동안에는 내 나름대로 깨닫고 정해놓은 마음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점친 내 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내가 정한 대로 그 길을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글을 읽은 당신도 삶의 이정표가 필요하다면, 나만의 여행곡을 찾아 들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