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병’이라는 말이 있다. 주로 로맨스 장르에서 사용되는 이 말은 주인공 이외의 ‘서브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어쩌면 생소할 수도 있는 단어지만,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처럼 주인공보다 더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일은 꽤 흔하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종종 이 병을 앓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다른 ‘NPC병’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조연 캐릭터인 NPC를 좋아하는 것이다. 공략할 수 없는 상대를 좋아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지만, 좋아하는 맘을 스스로 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드라마나 소설처럼 스토리가 드러나지 않는 게임의 특성을 이겨내고, 플레이어의 마음을 사로잡은 NPC의 정체는 무엇일까?
NPC는 Non Player Character의 약자로, 플레이어가 직접 조작할 수 없는 캐릭터를 의미한다. 이때 NPC는 주인공 이외의 모든 캐릭터들을 지칭하며, 쉽게 말하자면 드라마나 영화 속 조연 캐릭터 정도가 된다.
사람들은 보통 NPC를 힌트를 주는 의문의 길잡이나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점 주인처럼, 그저 우호적이거나 일정 수준의 상호작용만이 가능한 캐릭터로 생각한다. 하지만 NPC는 플레이어가 직접 조작하는 메인 캐릭터를 제외한 게임 내의 모든 캐릭터를 지칭하며, 조금이라도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면 모두 NPC가 될 수 있다.
이러한 NPC들은 주로 리니지와 메이플스토리 같은 MMORPG나 GTA,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와 같은 오픈월드 장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들은 무엇을 물어도 같은 대답만 하거나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NPC가 없는 게임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들은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고 플레이어를 이끄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NPC가 게임을 휘어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입체적인 NPC에 열광한다. 주어진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는 캐릭터라 하더라도 짙은 캐릭터성을 지닌 캐릭터, 혹은 플레이어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그런 입체적인 캐릭터를 원한다. 멋있고, 귀엽고, 웃기고! 사람들을 사로잡은 NPC에게는 무슨 매력이 있을까?
귀여운 사장님인가, 무서운 사채꾼인가
너굴은 힐링 게임으로 유명한 동물의 숲 시리즈에 등장하는 NPC로, 귀여운 너구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초기작부터 등장한 캐릭터임은 물론, 게임 플레이의 중심이 되는 상점의 주인이기도 하다. ‘-구리’라는 귀여운 말투와 툭 튀어나온 뱃살이 매력 포인트로, 튜토리얼 플레이부터 엔딩까지 모두 함께하는 명실상부한 게임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다.
시리즈별로 다르지만, 대체로 너굴은 상점 밖으로 나오는 일 없이 꾸준히 상점 안에서 플레이어를 응대한다. 고정적으로 주어지는 선택지와 답변이 매일 반복되지만, 언제든 플레이어를 반기며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그런데, 이런 너굴에게는 이면이 있다. 바로 악당 중의 악당, 사채업자의 얼굴이다.
동물의 숲은 기본적으로 입주와 동시에 대출금을 갚아 나가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돈을 수금하는 것이 다름 아닌 너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증축을 핑계로 점점 더 큰 돈을 받아 가며, 빚 탕감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내어준 후, 턱없이 적은 돈을 임금으로 준다. 이러한 탓에 동물의 숲은 일부 애호가들 사이에서 ‘채무의 숲’으로 불린다는 웃긴 이야기가 있다.
상점에만 머무르며 빚 탕감과 물건 판매에만 집중하는 너굴은 그리 많은 대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 덕담을 건네거나 집으로 초대하는 귀여운 주민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인기와 화제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너구리’와 ‘사장’이라는 특성을 꾹꾹 눌러 담은 캐릭터 같다. 귀엽고 친근한 너구리의 이미지에 계산적인 사장의 이미지가 덧붙으며 상충되는 두 성질로 알쏭달쏭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웃긴놈, 나쁜놈, 이상한놈
빅 스모크는 오픈월드 어드벤처로 유명한 GTA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캐릭터 중 한명이다. 거대한 덩치와 그에 맞는 호쾌한 성격, 그리고 능글맞은 말투까지. 알 수 없는 친근함은 마치 그가 NPC가 아닌 실존 인물로 느껴지게 만든다. 한 마디로 빅 스모크는 유쾌함이 두드러지는 캐릭터로, GTA 시리즈 중 가장 유명하다고도 할 수 있는 ‘햄버거 주문’ 밈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빅 스모크는 NPC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 부분은 ‘빌런’으로서의 빅 스모크라는 캐릭터에서 잘 드러난다. 처음 빅 스모크는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하지만,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인공을 배신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욕망과 현실적인 한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빅 스모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빅 스모크에 자신을 투영하며 게임에 더 깊게 빠져든다.
이러한 NPC의 속사정과 캐릭터성은 게임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보통 갱스터나 음모론자가 악당인 GTA 시리즈에서 친근한 인물을 빌런으로 내세우며 게임에 신선함을 부여하고, 현실적인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는 빅 스모크를 단순한 게임 캐릭터 그 이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실제로 이 게임을 플레이한 유저들 사이에서는 빅 스모크가 주인공을 진짜 친구로 여겼는지, 혹은 처음부터 그를 이용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NPC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NPC는 게임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지만, 반드시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주인공으로 자리 잡는다. 한 게임을 오래 즐기다 보면, NPC들의 대사를 외워버릴 때가 있다. 매일 만나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NPC를 보고 있으면 여러 감정이 밀려 들어온다. 언제나 처음 만난 그대로 나를 반겨주는 모습이 좋기도 하지만, 우리의 사이가 더 깊어질 수 없음에 아쉬운 마음이 든다.
플레이어와 친구가 된 너굴과 배신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고른 빅 스모크가 존재하는 게임 세상이 한없이 궁금해진다.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느새 게임 저 뒤편의 세상을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게임을 하면서도 게임 저편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드는 무한한 NPC의 매력 속, 나는 오늘도 또 다른 NPC에게 말을 걸기 위해 게임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