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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동과 말이 밉게 느껴지고 이유 없이 불편할 때,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대방과 내가 닮아있는 경우가 많다. 애써 외면해 왔던 나의 못난 구석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그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 칼 융은 무의식에 들어 있는 자아의 어두운 면, 우리의 의식이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성격을 ‘그림자’ 자아라고 불렀다. 이는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특질과 감정을 의미하며,부정하거나 억압할수록 더욱 짙어지는 경향이 있다. 만약 타인에게서 내가 감추려고 애썼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라고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 있다면, 어쩌면 그 사람에게 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투사된 것일지도 모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성난사람들(Beef)>은 지독하게도 닮은 그림자를 품고 있는 두 사람이 우연히 얽혀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게 되는 이야기다.
대니는 자살 시도를 위해 산 물품을 환불하러 간 마트 주차장에서 길게 클락슨을 울리는 흰색 SUV 차량과 마주친다. 안 그래도 환불에 실패해 잔뜩 화가 나 있던 그는 SUV 운전자 에이미가 창문 밖으로 내민 가운뎃손가락에 격분하고, 그를 잡기 위해 도로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며 한바탕 추격전을 벌인다.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된 이들의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증오의 불꽃으로 타올라,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까지 모두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도급업자 대니와 성공한 사업가인 에이미는 다른 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대니는 미국에서 모텔 사업을 하다가 사업 실패로 한국에 돌아간 부모님을 다시 모셔 와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 돈 벌 생각이 없는 예술가 남편을 둔 에이미는 실질적인 가장으로, 사업 상대자인 토니의 비위를 맞춰가며 고군분투 중이다.
이들은 나 아니면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부담감 외에도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대니는 동양인이란 이유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에이미는 우연히 아빠의 불륜을 목격한 뒤 부모님이 싸우는 게 내 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린 에이미의 내면 깊숙이 아무도 ‘날 원하지 않는다.’는 믿음의 씨앗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상처받은 어린아이의 영혼을 갖고 몸만 어른이 된 이들은 저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된다.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언제든 이글거리는 분노를 기꺼이 표출할 준비가 된 이들은 본능적으로 나와 닮은 상대방을 알아보지만 금세 부인하고 만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고 끝없이 상대방에 상처를 입히는 대니와 에이미의 복수는 자살 시도를 하고, 나이 많은 남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던 그들의 자기 파괴적 행동과 겹쳐져 있다. 상대방을 죽일 듯이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이 그토록 분노한 대상은 증오, 자괴감, 화로 점철된 자기 자신이었다. 대니와 에이미는 자신들이 벌인 복수로 사랑하는 가족과 어렵게 일궈낸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상대방에게 투사한 자신의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은 트라우마를 싸는 거야."
"내면의 표면 바로 아래가 비어 있는데 꽉 찼어."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거로 생각해 혼자 끌어안고 있던 속마음을 처음으로 털어놓으며, 대니는 에이미가 되고 에이미는 대니가 된다. 대니가 에이미의 이야기를 하고, 에이미가 대니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다른 게 없는 같은 인물임을 알려준다.
그들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약하고 보잘것없는 그림자를 타인의 모습을 통해 마주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상처투성이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화해할 수 없었던 끔찍한 '나'와의 솔직한 대면을 통해 화해를 시도한 이들은 의기투합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찾아 나선다.
"내가 기억하는 한 살아 있다는 건 그런 거야. 공간이 없으면 형태도 없어. 어둠 없이는 빛을 경험할 수 없고."
정신 나갈 거 같이 시끄럽고 악에 받친 복수극은 조용한 병실 안에서 에이미가 대니를 끌어안는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짙은 어둠이 가득했던 병실 안으로 하나가 된 그들을 비추는 빛이 들어오고, 이내 색색깔의 불빛은 주변의 어둠을 서서히 몰아내며 그들의 그림자를 천천히 지운다. 어둠 없이 빛을 경험할 수 없다던 대니의 말처럼,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한 내면의 밑바닥을 직면한 그들에게 남은 건 상처를 딛고 일어서겠다는 한 줄기 빛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