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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아트인사이트 모임] 영원한 천국


*

독서 모임 후기를 쓰다가 글이 너무 비대해져,

‘영원한 천국’ 북 리뷰 파트를 따로 뚝 떼왔다.

군데군데 논리 일탈이 있어도 감안해주시길.

 

 

아트인사이트 독서 모임의 마지막 책으로 ‘영원한 천국’을 골랐다. ‘영원한 천국’은 아마 영화 매트릭스 덕분에 유명해진 개념, 시뮬레이션 우주를 다루는 소설이다. 가상현실에 업로드 된, 말하자면 ‘통속의 뇌’가 된 지성체들이 자기가 체험할 삶인 시뮬레이션을 커피 고르듯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스토리를 형성하는 주 동력. 하지만 이 책은 가상현실과 정신체에 얽힌 철학적 문제와 딜레마를 고찰한다기보다는, 그것을 소재로 펼쳐내는 서스펜스 소설에 가깝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소재를 통해 그려낸 세계선을 넘나드는 로맨스는 퍽 드라마틱했다. 그러니까, 이하는 책의 주제의식에 대한 리뷰라기 보다는 멋대로 떠오른 생각들임을 먼저 밝힌다.

 

 

극장 속 서사는 실제 삶과 똑같이 인식된다. 자신의 자아가 서사 속 주인공의 자아로 대체되기에 가상의 삶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다. 인지하는 시점은 극장을 벗어난 후다. 극장 속 삶이 끝나야만 본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삶은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도록 설계돼 있다.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극장 속 삶이 좋았다면 반복해서 갈 수도 있다. 스포일러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삶이 재시작되는 순간, 이전 삶에 대한 기억은 말끔하게 사라진다.


반대로 이전의 삶이 싫었다면 다른 극장을 찾으면 그만이다. 점점 더 행복한 삶을 찾다 보니 행복에 내성이 생겨 도무지 행복하지 않다면,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고달픈 삶을 택할 수도 있겠다. 도파민 평형을 되찾는 데 가장 유용한 전략이다. 쾌락 역치를 낮춰 사소한 즐거움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으므로.


(중략) 그들이 우리 업계의 주요 고객이다. 업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성격이나 습관, 취향, 일상 패턴 등을 파악해 삶의 서사를 설계한다. 극장이라는 툴은 롤라가 제공한다. 롤라의 극장과 작동 방식도 동일하다. 반드시 죽음에 이르도록 설계된다는 점 역시 같다.


(중략) 의뢰인은 드림시어터 안에서 자신의 실제 인생을 두 번째로 살게 된다.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게 되는 것이다.


- 정유정, 영원한 천국, 은행나무, 2024, 20~21p

 

 

사람의 정신이 시뮬레이션 세계에 업로드 되고 그 상태에서 여러 생을 고르듯이 체험할 수 있다면, 선택한 한 번의 삶이 끝나고 난 다음, 가상현실로 돌아올 때 마치 그 한 번의 삶이 하나의 긴 꿈, 호접지몽 胡蝶之夢인 것처럼 생각된다면. 그 후에도 삶은 계속 되고, 지루한 삶을 잊기 위해 또는 새로운 인생을 맛보기 위해 또 다른 삶, 혹은 꿈으로 나아가고, 이 모든 것이 굽이치듯 무한히 반복되고 있었더라면… 그건 정말 나비의 꿈 같은 삶이 아니일까.


그렇다면 지금의 삶, 내가 감각하고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인 지금은 어떠한 함의를 지닐까. 스스로 나비인 줄 모르는 나비에게, 그 각 한 번의 삶들이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 그러나 그 자체로서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의미에 대함이 아닌 삶들의 관계, 되풀이하는 삶과 삶들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생겨나는 상대적 의미에 대한 질문인즉, 말하자면 ‘무엇이 이번 회차의 삶을 이루는가’. 이는 전생과 현생, 그리고 업 業과 연기 緣起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불법 佛法을 공부한 바 없으므로, 업과 연기에 대한 설은 어머니의 말씀으로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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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자기 인생을 지독히도 원망하고 통탄하는 분이셨다. 곁에서 가까이 지켜본 바 자격 있는 분이시고… 사람에게 크나큰 부조리가 주어지고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바 일종의 숙명처럼 여겨질 때에,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끊임없이 주어질 때에, 인간은 그 대상 없는 보상심리로 인해 세상과 운명을 탓하고 통탄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비단 어머니 뿐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끝없이 소리쳤고, 누군가는 숨죽여 울었다.


‘일생을 선량하게 살았는데 세상은 왜 나에게 정반대의 것을 주는가. 일생을 기쁨이란 모르는 바보처럼 일하고 “쌔가 빠지게” 가족들 뒷바라지만 해왔는데, 세상은 왜 나에게만 정반대의 것을 주는가.’ 어머니는 실로 상냥하고 선량하셨다. 그녀가 풀 길 없는 부조리의 굴레에 빠져 삶을 지옥으로 생각할 때 불교와의 인연이 찾았고, 어머니는 거기서 나름대로 이해한 그것을 어린 내게 설명해주었다. 나로서 지금껏 이런 주제에 천착하게 된 것은, 어쩜 조기 교육의 산실일지도 모르겠네.

 

"덕아, 세상 모든 일에는 인연이 있어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고, 거꾸로 원인이 존재하면 반드시 결과가 일어나는 법이라 카더라. 한 번 일어나버린 거는, 돌릴 수도 없고 무를 수도 없는 거라 카더라. 꼭 갚아야 하는 기라꼬. 그니까 엄마가 이래 힘들게 사는 거는, 거꾸로 전생에 내가 저 사람들을 죽도록 못살게 굴어서 그카는기란다. 엄마는 지금 몸땡이로 업보를 갚는 기고, 이게 다 전생의 업이란다. 근데 내 대에 이 굴레를 못 끊으면, 이게 다 너거 대에 물림된다 카더라. 그건 죽어도 안 된데이. 내 그 꼴은 죽어도 몬 보겠다.”

 

어머니, 그 업이 내게 오겠소, 다음번 당신 생으로 가겠지… 그 어린 마음에도 어느 스님이 어머니께 해주었다는 말은 일종의 위안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삶과 현실을 지탱하고 받아들이게 하려는, 상냥하면서도 알량한 거짓말 같은 거라고. 물론 인연의 법은 지엄하기에, 어머니가 집을 나갔더라면 내 삶 전체에 크나큰 다름이 일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업의 대물림이 되는 건 아니잖아, 엄마.


그러므로 일찍이 정유정으로 인해 품어본 질문, 말인즉 ‘나비로서의 삶의 의미’란 순진무구한 질문이다. 업의 윤회, 달리 말해 강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므로. 적어도 어머니가 설해준 불교의 세계와 달리 ‘정유정’이 그린 세계는, 모든 것이 주체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 결정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단절된 상태에서 이 생과 저 생의 인연이 불멸의 인과성으로 이어져 있는, 닫힌 연속성의 세계가 아니라 운명과 인과, 업과 천성마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세계. 자신의 결함과 불편마저도 스스로 요구하여 채택한 세계, 말하자면 ‘도파민 디톡스’와 같은 정도의 이유만으로. 그때 ‘업’은 어찌할 수 없이 감내할 빚이 아니라, 스스로의 요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윤회와 환생의 가장 큰 차이, 아니 간극일 것이다.

 

나는 속으로 질문했다. ‘그렇다면 내 어머니, 그 이전의 어떤 존재도 스스로 이 생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망각과 무지는 모든 선택을 이끌어내는 동력이 되기도 하는 까닭이다. 겪게 될 모든 결과를 이미 깊이 느끼고서도 차마 행할 수 있을 리야. 그랬더라면 우리가 ‘인간의 삶’ 자체를 선택할 수 있을까? 어쩌면 무한한 아픔과 슬픔으로 점철된, 차마 오래되어 그런 줄도 다 모른 채 묵묵히 감내해나가는 이 존재의 서사를? 차라리 다음 생에 나는 소로 태어날 리야.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거기 삶이 무한히 선택되고 반복된다면, 달리 말해 육도윤회가 끊임없이 일어난다면, 뭇 짐승의 삶을 수 없이 지나 다시 한 번쯤은 스스로 인간으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러한 두려움마저 지난 지 오래돼 낡고 닳아버린 여느 존재는, 역설적으로 생의 의미를 위해 스스로 비탄을 바라는 지독한 역설을 앓게 될지도. 정유정의 세계관 하에선 엄마가 전생에 잘못한 게 아니라, 그저 지독히도 무료해진 삶에 자극을 원한 누군가의 우발적인 선택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성공한 선택일 게다. 무엇이 이보다 더 슬플 수가 있으랴…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내가 또 하는구나.

 

 

롤라 극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안내문 밑엔 ‘경고’라는 표지판도 붙어 있었다.


극장에 입장한 후 중간에 되돌아 나올 수 없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세계의 생애가 끝나야만 롤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신중하게 선택하세요.


대형 모니터 화면엔 두 개의 버튼이 떠 있었다. 식물계, 동물계. 나는 동물계 버튼을 눌렀다. 하위 버튼이 차례차례 열렸다. 척삭동물문, 포유강까지 누른 다음 스스로 물었다. 다시 인간의 삶을 살고 싶은가. 내 대답은 ‘아니오’였다. 영장목 대신 식육목을 눌렀다. 다음 선택은 거의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여우속, 사막여우.


(중략) 인간의 발이 닿지 못하는 곳에 서식하는 야생 동물의 삶을 무량으로 살았다. 그사이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에 풍화작용이 일어났다. 망각이 깎아낸 두께만큼 고통도 줄었다. 비로소 나는 인간 세상에 가볼 용기를 얻었다.


(중략) 롤라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길이었다. 이 무수한 길 안에서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찾아가고, 생성과 소멸을 무한 반복하는 삶. (중략) 억겁을 살아도, 모든 것이 가능한 천국에서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고통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감정적 존재였다.


- 정유정, 영원한 천국, 은행나무, 2024, 382~384p

 

 

윤회와 환생, 주어진 것이냐 선택한 것이냐의 문제. 하지만 둘 중 무어건 아예 알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지금의 삶에 있어 무슨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완벽한 망각 혹은 무지의 장막 너머, 이 삶의 저편에서 결정되고 마는 것이라면. 삶의 바깥에서 결정된 것에 대한 의문은 마찬가지 그 삶이 끝나고 난 다음, 그 삶의 바깥으로 되돌아간 때에서야 제대로 답할 수 있는 것이며, 어쨌든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질문과 상관없이 말이다.


윤회건, 환생이건, 심지어는 단 한 번뿐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세계이건, 또는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회귀’의 세계이건 간에 주어진 지상에서의 삶은 살아내야만 하고, 어떤 형태로든 끝을 보아야만 한다. 관계적 의미에의 속 깊은 의문과 갈증, 더러 그것에 천착하는 삶의 시기가 누구에게나 찾을 것이라 믿지마는, 그것과 무관히 삶은 이미 일어나 버린 것, 현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삶 자체가 지닐 수 있는 고유하고 독자적인 의미(물론 그것도 알아내기 무척이나 어렵겠지만)이지, 삶의 상대적 의미와 그 위상이 아니이며, 그것은 한 번의 삶이 끝나고 난 다음에 알아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윤회이냐 환생이냐, 즉, 이 삶이 순환하는 생명의 굴레였던지, 연극 혹은 꿈이었던지, 또는 아무런 연속성도 없는 유일의 순간이었는지, 또는 박제된 영원의 순간이었는지는.

 

개개 사람이 지니는 삶, 그 이후에의 ‘믿음’에 있어 각자 다름이 있다면 이 삶의 끝에 돌아갈 가상세계가 있느냐, 약속된 내세가 있느냐, 또는 윤회의 다음 생이, 혹 끝없는 반복, 혹은 그 무엇도 없느냐일 뿐. 허나 이 모든 것은 단 한 번도 관측된 적 없는 것, 실은 우리의 두려움과 갈망이 그려낸 환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삶 이후에 대한 믿음이 이토록 다변한 것과 달리, 삶 자체란 무지 속에서 미리 정해진 과정을 통해 결말을 향하는 모습을 띠고 있지 않을까. 다만 거기 또 다름이 있다면 과정과 결말을 정하는 주체가 전생의 인연인지, 천성과 운명인지, 신인지, 또는 설계자인지의 다름이겠지. 허나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없는 것과 얼마나 다른 일일까. 적어도 지금,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런 것을 모르고서도 삶은 계속되고, 삶은 나아간다. 삶은 나아가기만 한다, 심지어 멈춘 채로도. 이런 알 수 없는 것들을 완전히 떼어놓은 다음, 삶 자체는 아주 단순한 한 가지 사실만을 남기는 듯하다. 모르는 채로 나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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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운명이 나 자신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나 자체라 믿는다. 이 신념이 내가 설계한 운명에도 적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중략)


경주 : 해상 씨가 내 미래를 설계하면 그게 곧 내 운명이 됩니다. 내갠 해상 씨가 신이나 다름없는 거고요. 그렇죠?


완전히 옳은 답은 아니었다. 그의 미래는 그의 과거가 만들어내는 그림이었다. 단지 내 손을 통해 그려질 뿐.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경주 : 저쪽 세상에서 살 때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고 생각했어요. 사는 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살다 보면 나아질 거라 믿었고, 결국 그런 믿음은 허상이었어요. 내가 왜 사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 거죠.


해상 :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삶을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경주 :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서 롤라에 온 게 아닙니다. 그저 도망친 겁니다. 그것도 아주 성급하게. 이곳에 와서야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 삶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이해할 만한 실마리라도 찾지 않았을까.


그 이해가 왜 그리 중요한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생명체는 우연에 의해 태어난다. 우연하게 관계를 맺고 우연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정의되는 삶은 롤라 극장에나 존재할 것이다.


경주 : 내겐 운명의 설계 없이 살아볼 기회가 필요해요. 도망치지 않는다면, 견뎌낼 수 있다면 내가 그 세상에 존재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아서.


- 정유정, 영원한 천국, 은행나무, 2024, 388~390p

 

 

정유정의 세계에서, 지성체들이 체험하게 되는 모든 삶은 ‘연극’이고 그것은 누군가가 인과율을 사전 설계한 결과물이다. 무지를 담보로 지정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바 일종의 재현,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연극’이다. 한편 연극,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 자체와 그 얼마나 다른 것일까.

  

누군가 미리 삶을 설계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삶이 이미 전부 결정되어 있다는 것. 이는 ‘결정론적 운명’으로 이어진다. 단 여기서 결정론적 운명이란 무엇을 행해도 피할 길 없는, 일종의 영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되는 모든 이유와 계기가 우리 안에 내재하여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변수가 무량하고 은밀해 미리 알아볼 수 없을 뿐, 사건이 일어난 다음 돌이켜 보면 분명한 이유와 수순을 지니는 것에 미루어, 그러한 관점으로 미리 일어날 것들을 상정하는 관점이자 태도. 책은 이를 ‘롤라’라는 소재를 통해 장치화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내렸고 또 앞으로 내리게 될 선택과 그 결과까지 우리의 삶과 몸속에 녹아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무것도 안 하면, 무엇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손쉬운 그 선택지마저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이 이미 오랜 시간을 통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결정된 채, 미처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 그리하여 무지의 안개 속에서, 각자가 택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한정된 결말로 나아가는 것. 그러니 삶이 무엇이건 간에, 아니, 삶에 대한 우리 각자의 믿음과 해석이 그 무어건 간에, 그것이 한 편의 연극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나는 내게 주어진 테마가 있다고 믿는다. 그 테마의 옆 얼굴이 바로 내 글에 녹아난 아우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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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비단 나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진 테마가 있으리라 믿는다. 로코냐, 사실주의냐. 비극이냐, 희극이냐. 우리가 실은 제한 없이 자유함이 아니라, 정해진 범위 내에서 자유하다고, 말하자면 주어진 심장의 색깔에 걸맞은 것들을 택할 수 있노라고 믿는다. 한정된 운명, 이 낱말 앞에는 응당 반감이 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건 무척이나 단순한 논리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또 하지 않음으로써, 먼 미래로 나비의 무수한 날갯짓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지금 나의 행동이 또한, 먼 과거로부터 불어온 그 바람의 물결이 아니었던가? 이 모든 것이 인과의 관계로 묶여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실타래를 가리켜 이름이 바로 운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모든 삶의 시간과 내력이 한줄기의 바람으로 이어져 있다고 할 때, 최초의 바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대목에서만이 내 어머니는 전생을, 나는 기질을, 서로 다른 것을 말한다. 어머니는 전생의 업을 통해 운명은 미리 결정되었기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는 지니고 태어난 천성을 통해 운명의 방향은 미리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운명, 미리 알아볼 수 없으되 돌이켜 비로소 알아볼 수 있으며, 돌이킬 제 속절없이 알아버리는 것.

 

이 또한 단순한 현상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다. 내가 갑자기 살인마가 될 수도 없는 것이며, 그와 반대로 아무런 공격성도 없는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또는 내가 10년을 넘게 고뇌해온 내 성격적 결함과 정신 병리를, 아무리 경멸하여도 채 이별치 못하였고, 다만 치열히 파헤쳐 낱낱이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스스로의 의지로 지워내거나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는 것처럼. 달리 말해 조절하고 억제하려 노력할 뿐, 그러한 결과와 그에 앞선 원인마저 아예 없는 일로 만들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내가 살아온, 달리 말해 쌓여온 인과의 범위 내에서만 한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인과의 범위, 바로 그것이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이야기하였다.


사람들은 내게 말하곤 했다, 자신의 의지와 선택 그것만이 삶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허나 그때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의지와 선택은 결정된 운명의 방향에 이미 녹아 있는 것, 종속된 것이자 그 도화지 위로 펼쳐지는 것, 즉 후행하는 것. 그것이 아무리 권면할 만한 것인들 모든 사람이 같은 시점, 같은 현상에 같은 선택을 내릴 수 없으며, 까닭인즉 선택이란 그 한순간의 우발적 충동이 아니라, 쌓아온 과정의 집체이자 산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는가, 다시 한 번, 선택은 쌓아온 과정의 산실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선택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어린아이의 선택은, 그 순수한 충동은? 그 충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렇다면 모든 선택이 자유의지가 아니라는 말이냐고 내게 따지어 되묻지는 말아주었으면. 그 모든 과정이 무지의 베일 아래에서 우리의 것, 징글징글할 정도로 우리 전적인 소유가 아니었는가. 몰랐다 하여 화해되지 않고, 어쩔 수 없었다 하여 면피 되지 않는 것. 능력 여하와 무관하게 선택은 우리 삶에 내리꽂힌 징이자 말뚝이 아닌가.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와중에도 고민을 거친 후에나 무언가를 선택한다. 어렵사리 선택한다, 오 자유라!


그런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 속에서 우리는 결정된 자기 운명의 범위 내에서 자유하며, 스스로 내린 선택에 칭칭 감싸인다. 내가 이해하는 자유의지란 운명보다는 작고 핍진한 범위의 것인 셈이다. 우리는 결과를 누리되, 그 결과는 원인과 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다만 이 말은 패배주의도, 허무주의도 아니이다. 그 얼마나 좋은 일일까. 세상 모든 것이 원인을 내포하고 있고, 희미한 인과를 통해 설명되는 한 줄기 서사라는 것은? 사람의 전 생애는 천성이 정해둔 운명의 커다란 방향성 그 범위 내에서 환경과의 상호작용, 선택을 통해 조금씩 ‘고정된다’. 나는 그것을 ‘결정된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 결정된 여러 가능성의 범위 내에서, 점차 ‘고정된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시간은 그것을 드러낸다.

 

 

설계의 인력이 백지의 무작위를 지배하리라는 내 계산은 틀렸다. 죽음을 통해 경주를 데려오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다. 계획이 잘못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중략)


나는 경주를 오독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의식이라는 외피에 가려진 ‘무엇’이었다. (중략) 가슴에 칼이 박히는 찰나에 기어코 상대의 눈에 젓가락을 찔러넣은 걸 기억했다면 나는 사전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의 본성에 웅크리고 있는 ‘무엇’이 무엇인지.


견디고 맞서고 이겨내려는 욕망이었다. 나는 이 욕망에 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어쩌면 신이 인간 본성에 부여한 특별한 성질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봉인을 풀고 깨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점에서. 어떠한 운명의 설계로도 변질시킬 수 없는 항구적 기질이라는 점에서.


이제 경주는 롤라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됐다. 스스로 자신을 죽이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 가상세계의 길을 떠돌며 인간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중략) 나도 다시 끝나지 않는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고통도 죽음도 없고 스스로 나 자신을 죽일 수도 없는 곳.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미치기에 딱 좋은 세상. 영원한 천국의 길을. (중략) fin.


- 정유정, 영원한 천국, 은행나무, 2024, 518~520

 

 

‘영원한 천국’ 속에서 삶이란 설계된 바를 따르는 결정된 운명이고, 그 운명은 성격과 천성을 통해 그려지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긴밀한 인과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절정부의 사건은 등장한다. 경주는 설계자 해상에게 자신의 삶을 다시 설계하되, 중간부터는 백지로 비워달라고 청한다. 아무런 설계 없이, 미지 위에 자신을 펼치어 달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돌이키고 싶은 서사, 다시 살며 끝맺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이야기를 다 살아보기 전에 육신을 버리고 가상세계로 도망쳤다.


하지만 해상은 망설인다. 롤라라는 연극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이 끝맺을 수 있으며, 그 죽음이라는 것도 반드시 설계되어야만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주는 단호하게 요구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제대로 대면하지 못해 미지 속으로 사라져버린 삶의 뒷이야기, 누구도 간섭하지 않은 채 저절로 드러나는 인과의 미지이지, 남이 그려준 이야기가 아닌 까닭이다.


마치 그에게는 ‘영원한 천국’인 가상세계에서의 삶이 지속되는 것 보다, 단 한 번뿐이었던 그때 그 현실 세계에서의 마침표가 절실했던 모양이다. 비록 죽지 못해 영원히 그 연극 안에 갇혀버릴지라도. 그래서 해상은 타협 안으로 경주의 삶과 자신의 삶을 교차 설계한다. 자신이 직접 경주의 적대자에 빙의해, 그의 시뮬레이션에 마침표를 찍어주기 위함이다. 애틋한 살인이라, 재미있기도 하지. 그러나 해상의 설계는 실패한다. 직접적으로 운명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교차 설계를 통해 간섭하려고 했기 때문에 변수가 많았을 테고, 그 결과 해상은 물론 경주 자신도 다 몰랐을 단 하나의 변수 때문에 설계는 실패했다. 작가는 이를 ‘야성’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여기까지 글을 진전해놓은 다음, 일전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하여 볼까. ‘무엇이 이번 회차의 삶을 이루는가.’ 나는 지니고 태어나는 바인 기질 천성을, 어머니는 전생과 업을, 작품은 이 설계자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결정론인가, 모조리 결정된 채로 이미 고정되어 있는 것인가. 이 대목에 관해 책은 내게 조금 더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야성, 그 말이 내겐 이렇게 들렸다.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설계자도, 기질과 천성도 아니라, 충동과 방어기제라고. 앞선 장광설이 가리키는바, 삶과 운명의 거시적 흐름은 결정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그것은 커다란 방향일 뿐, 그 운명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것은 야성, 즉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것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내 야성과 충동을 묶어두기 위해 긴 시간 노력했기에 작가의 말에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고 억제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도 나도, 운명을 수용하고 그에 순응하는 것을 택하는 대가로 저항하고 분노하고 이내 맞서 싸우게 하는 마음을 먼저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석연찮은 것이 아직 마음에 남는다. 순응하려는 마음,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질긴 저항과 대결의지를 느끼고 있는 까닭이다. 아직 다 설명할 수 없는 이것은 언젠가 이 주제 앞에 다시 설 때, 그때엔 조금 더 정리되어 있기를 바라며 슬슬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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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와 환생, 나는 다음 생이 없었으면 한다. 죽음 이후에 다시 눈뜰 일이란 없기를. 시뮬레이션이든, 또 다른 삶의 연속이든, 내세와 천국이든, 이 삶의 이후가 없었으면 한다. 삶이 너무 피로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나 뿐만의 일은 아닐 것이라, 사람인 이상 누구나 느끼고 감내하고 견디면서도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여, 잊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하는 것은 삶의 고단함이다. 지금껏 겪고 감내하고 상처받으면서도, 다시금 일어서 받아들이고 마침내 익숙해진 것들, 사람에의 감정과 사람으로 말미암은 감정, 그 격랑의 파도를 기꺼이 택할 자신이 없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했던 모든 ‘어찌할 수 없는 것들’과 ‘가슴 벅찬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겪어낼 자신이 없다.


허나 만약 이 삶으로 다음의 삶이 결정되고 있다면, 다음 생에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기를 바란다. 또는 이 삶의 끝에 저승이 있어 그 앞에 내 죄를 무게 달게 된다면, 나는 그럭저럭 선하게 살기를 노력한 대가로서, 내 영혼이 완전한 무로 돌아가기를 청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 이 삶이 한 편 꿈이고 생이란 끝없이 이어진 꿈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내가 ‘영원한 천국’ 속의 꿈 꾸는 나비라면, 나는 선뜻 인간으로의 환생을 택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게 오랜 윤회를 돌고 돌아 인간이 다시 그리워질 때쯤, 마치 잘못 생각나서는 얼른 지워지지 않는 그 애 얼굴처럼, 그로 인한 어리석은 내 선택처럼 인간으로 돌아오게 되겠지, 또는 그 결과가 지금의 나일지도 모르고 말야.


그런 심정으로 ‘경주’와 그의 선택을 바라본다. 그리고 공감한다. 삶이 끝없는 꿈의 연속이라면 다시 그 극장, 롤라로 돌아가지 않는 것. 영원한 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허나 그것은, 이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 되어주기도 한다. 만약 그 모든 것, 윤회도 환생도 꿈도 아니라 삶이 단 한 번뿐이고 다시는 되돌이킬 수도 다시 겪을 수도 없는, 이른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면, 나는 그 삶을 더없이 긍정하며 기쁘게 눈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죽기는 싫지만, 환생하고 싶지는 않아.’ 이런 썰렁한 패러디로 줄이며, 감상평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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