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우리 넷은 독서 모임으로 만난다. 여느 때와 같은 4개월짜리 만남이었다. 4개월, 그리고 겨울이었다. 피코트를 입고 만나 싱글 코트로 작별한다. 이제 겨울도 다 간 셈이다. 그 사이에 두터운 패딩 점퍼를 입은 내가 있었겠으나, 그때 기억이 벌써부터 잘 나지 않는다. 늘 이런 식이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무척 즐거웠고, 퍽 따스했다는 인상만이 남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정말로, 겨울이 다 갔구나야.


이번 모임의 주제는 독서이다. 편안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돌아가면서 책을 고르고, 각자 책을 읽고, 이야기만 나누면 되는 아주 심플한 모임. 만나서 무엇을 말해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나는 말이 아주 많은 사람이지만 주제를 고르는 데 자주 난처함을 느끼는 고로, 책 모임은 편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평일 저녁, 스산한 신사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가로수 길이 사람깨나 붐빈다는 것도 다 옛말이 되었다. 식당에 손님이 우리뿐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첫 만남 때 나는 아주 짙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인중에 뾰루지가 나서 칼날을 대기 난감했던 까닭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으로 오래전 일인 것만 같다, 수염을 기른 것이 말이다. 그러면서 가까운 일인 것도 같다. 얼마 만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4개월이라는 시간의 양적인 크기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내 시간관념은 어딘가 뒤틀려 있다. 모임을 3번 하면 1년이 지나 있을진대 모임 하나가 이리 짧게 느껴지다니. 모임 후기를 쓸 때마다 늘 아연실색한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시간의 양감이란, 실은 기억의 양감에 의존하는 까닭에. 그 시간들을 얼마나 소상히 기억할 수 있는가에 시간의 무게는 달린 것이었다.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일찍 마쳤던 첫 번째 달을 제외하고, 우리는 석 달 간 3권의 책을 읽었다. ‘시칠리아에서의 대화’, ‘사이코패스 뇌과학자’, 그리고 오늘의 책, ‘영원한 천국’이다. 기억하기 위해 나는 북적북적 어플리케이션을 킨다. 우리가 무엇을 함께 읽었는지도 앉은 자리에선 얼른 기억이 나지 않는 까닭이다. 하나, 둘,셋, 넷, 다섯…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를 고른 이후로 열네 권이나 더 읽었구나. 내심 뿌듯하면서도 어딘가 허전한 일이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 말이다. 어플리케이션의 메인에는 완독한 책의 제목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맨 위를 장식한 책,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는 단편집인데, 공교롭게도 그 책의 마지막 단편, 그러니까 개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읽은 단편인 ‘문학의 건망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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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들이대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그리고 기록해 두려고 생각한 요점 역시 앞서 글을 읽은 사람이 벌써 써놓았다.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내 자신의 필체였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오래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무(無)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2021, 73p

 

 

읽은 것들은 고사하고, 겪은 것들마저 사라져 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던지를 맨 먼저 상실하는 까닭에, 상실이 극적인 것으로 탈바꿈되지 못한 채 그저 밋밋하게 스러져버리는 것에 놓여있다. 나는 내가 웃고 있었던 것만은 기억할 수 있지만, 왜 그렇게나 가열 차게 웃고 있었는지를 먼저 잃어버리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음울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우리 모임은 조금도 슬프거나 아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지독한 역설을 앓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 그것은 결단코 개인적인 일이다. 말인즉 나누어 공감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즐거웠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겨우 웃는 얼굴 몇 개와, 오늘 있었던 일들이 전부이다. 그러니 나는 쓴다. 낭패가 낭패에 덩그렁 남아있어서야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는 까닭에. 나는 기록하기 위해, 정말이지 그것을 위해 쓰는 것이다.

 

 

지금 책을 한 권 읽으면, 결말에 이르기도 전에 나는 처음을 잊어버린다. 때로는 기억력이 책 한 페이지를 기억하기에도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단락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읽어 본다. 그러면 낱말 몇 마디는 의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그 낱말들은 여전히 미지로 남아 있는 어두운 전체에서 쏟아져 나와 읽는 순간 유성처럼 빛나고는, 곧 다시 완전한 망각이라는 레테의 강으로 깊이 가라앉는다. (중략)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직접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 꼼짝하지 못하게 불어넣는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 주고, 표절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2021, 75p

 

 

그래서 나는 쓴다.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전 모임 후기에 나는 ‘글을 잃었다’고 말했고, 그럼에도 여전히 쓴다. 쓰지 않는 것은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기억이 사라지기 전의 초읽기처럼 나는 쓰나, 한편 다행인 것은,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에 비례하게 글이 잘 쓰인다는 사실이다. 이 또한 지독한 아이러니일 것이다.


기억이 선명했더라면, 촘촘히 나열된 사건과 사건 중에 무엇인가를 먼저 선별해내야 하고 그런 다음에 그 사건들 사이의 유기성을 점검하기 위해 고생깨나 썼겠지만, 한때 나도 그랬던 적이 있더랬는데, 이제는 떠오르는 몇 안 되는 장면들을 그저 나열하는 것으로 밑작업을 마친다. 그리고 사건들 사이의 논조를 보강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다. 이 또한 희미하게만 기억나지만, 일전의 내 수많았던 글 어드매 한 번쯤은 활용한 구절들인 까닭이다. ‘쥐스킨트’ 씨는 망각이 쓰는 이의 표절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고 했지만, 내 경우에는 ‘자가복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셈이다. 내가 ‘망각’이라는 주제를 두고, 얼마나 많은 글을 써냈던가?

 

*

 

자, 서설은 여기까지 하고 이쯤에서 오늘의 본론을 꺼내와 볼까 한다.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굽어볼 적에, 어딘가 못마땅하거나 심히 통탄스러운 구석이 하나쯤 있으리라 믿는다. 의식이 밀어내고 다시 가두려 해도, 무의식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마음의 어느 한구석 반드시 존재하리라고, 내 경우에는 너무도 많지만, 개중 오늘은 건망증 하나를 꺼내와 여러분 앞에 펼쳐 보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그럴 리는 없지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이번 삶이 실은 여러분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또는 이 세계가 거대한 시뮬레이션 우주이고, 이번 생이 몇 번째 시뮬레이션인지를 생이 끝나기 전까지 알 수 없으며, 이 생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번 생이 시작되기 직전에, 자신의 두 눈과 손으로 분명히 승낙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들을 할까. 현실감각과 저항감이 차차 걷어지고 난 다음, 그러한 가설을 전제로써 단단히 세워둔 다음 찬찬히 우리 삶을 다시 되짚어 보게 될 때에… ‘그때 우리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허무한 상념 말고, 나는 무엇이 우리 이전의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생을 선택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해 골몰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전 생의 끝에서 다음 생을 결정할 적에 스스로 ‘망각하는 삶’을 선택했더라면, 일단 사실과 논리 여하를 차치하고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기꺼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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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속 서사는 실제 삶과 똑같이 인식된다. 자신의 자아가 서사 속 주인공의 자아로 대체되기에 가상의 삶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다. 인지하는 시점은 극장을 벗어난 후다. 극장 속 삶이 끝나야만 본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삶은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도록 설계돼 있다.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극장 속 삶이 좋았다면 반복해서 갈 수도 있다. 스포일러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삶이 재시작되는 순간, 이전 삶에 대한 기억은 말끔하게 사라진다.


반대로 이전의 삶이 싫었다면 다른 극장을 찾으면 그만이다. 점점 더 행복한 삶을 찾다 보니 행복에 내성이 생겨 도무지 행복하지 않다면,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고달픈 삶을 택할 수도 있겠다. 도파민 평형을 되찾는 데 가장 유용한 전략이다. 쾌락 역치를 낮춰 사소한 즐거움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으므로.


(중략) 그들이 우리 업계의 주요 고객이다. 업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성격이나 습관, 취향, 일상 패턴 등을 파악해 삶의 서사를 설계한다. 극장이라는 툴은 롤라가 제공한다. 롤라의 극장과 작동 방식도 동일하다. 반드시 죽음에 이르도록 설계된다는 점 역시 같다.


(중략) 의뢰인은 드림시어터 안에서 자신의 실제 인생을 두 번째로 살게 된다.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게 되는 것이다.


- 정유정, 영원한 천국, 은행나무, 2024, 20~21p

 

 

우리는 마지막으로 정유정이 그린 세계, ‘영원한 천국’에 대해 토론했다. 이 책이 운명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아니기에, 우리는 시뮬레이션 우주를 낭만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던 것 같다. 시간 선과 세계 선에 무관하게, 자기가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과 운명 마저 바치는 모습에 열광했다. 누군가는 연인을 가상세계로 보내기 위해 실제의 삶을, 누군가는 연인과의 서사를 바로잡기 위해 가상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는 장면은 꽤 드라마틱했다.


그 외에도 ‘우리의 삶은 시뮬레이션인가’로부터 시작해, ‘인간에게는 정말로 자유의지가 있는가’를 지나서, ‘영원한 천국은 정말 천국인가’와 같은 것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가상세계에도 인간적인 모든 한계, 욕망과 좌절, 불안과 권태가 살아 있다면, 그게 정말로 천국일 수 있을까. 하느님의 천국과 정유정의 천국이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영원이란 반드시 추구할 만한 것일까. 모든 것이 설계된, 달리 말해 결정된 삶을 체험하는 것이라지만 누군가 개입할 수 있고, 어느 순간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전부 다 결정된 운명일까.’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의견은 분분했지만, 나는 작가가 위의 질문들에 ‘아니오’라고 답했다고 믿는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혼자일 때마다 늘 그렇듯 상념을 시작한다. 마지막과 망각에 대해 생각하고, 시뮬레이션 우주와 내 삶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 내가 ‘망각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면, 그건 이전 삶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모조리 기억하는 삶의 불행을 모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없지만, 거기도 다 이유가, 정유정의 세계 법칙에 따르자면 ‘사소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컨대는 이전의 삶이 너무 자극적이었다거나, 피로했다거나 하는, 그런 사소한 이유가.


그건 이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이유거리 중의 하나가 되어준다.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그 흥미로운 상상에 이르러 나는 내 삶이 꽤 유쾌하게 생각됐다. 내 삶이 천국인가, 분명 아니오, 하지만 영원한 천국이 한편 존재할까. 말하자면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그건 천국일까. 책은 ‘아니오’라고 답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어떤 존재는, 지금의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똑같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덜 불안할까. 모든 만남에 끝이 없다면 그건 행복일까. 나는 여기에 이르러 ‘아니오’라고 답한다. 그리고 밤은 정오가 조금 지났다. 나는 기쁘게 노트북을 덮으며, 우리의 인연에 대한 꼬리 긴 미련에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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